프로야구 구단소개

SK 와이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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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한번 오는 저 배는 / 무슨 사연 싣고 오길래 / 오는 사람 가는 사람 / 마음마다 설레게 하나 /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 / 말해다오 말해다오 / 연안 부두 떠나는 배야”

김트리오의 ‘연안부두’는 오랫동안 인천야구를 대표해온 응원가다.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부터 현재의 SK 와이번스까지, 수차례 주인이 바뀌는 동안에도 항상 인천의 야구장에는 ‘말해다오’를 외치는 구슬픈 곡조의 노래가 끊이지 않았다. 돌아보면 ‘연안부두’는 마치 인천야구의 운명을 예언한 노래처럼 들린다.

노랫말처럼 인천의 야구팀들은 ‘어쩌다 한번 오는’ 배처럼 찾아와 인천 팬들의 ‘마음마다 설레게’ 했지만, 잠깐 머물다 떠나가길 반복했다. 삼미와 청보, 태평양이 정붙일 새도 없이 순식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현대 유니콘스는 팬들의 사랑을 배신하고 야반도주했다. 인천 팬들의 가슴에는 오래도록 아물지 않을 커다란 생채기가 났다.

‘현대’ 태풍으로 상처 입은 연안부두에 찾아온 다섯 번째 배의 이름은 SK 와이번스. 2000년 창단한 뒤 올해(2011년)까지 12년간 인천 팬과 함께하고 있다. 12년은 역대 인천 연고 구단 중에 가장 오랜 기간이다.

SK는 3차례 한국시리즈 우승과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 등 빼어난 성적은 물론, ‘스포테인먼트’를 앞세운 관중동원으로 성적과 인기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인천야구의 새로운 역사가 SK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당초 SK가 원한 연고지는 인천이 아닌 서울이었다. 2000년 2월 1일 그룹 고위 관계자가 “신생팀인 우리로서는 시장성과 흥행성이 큰 서울을 연고지로 원하고 있다”고 발언한 바 있고, 같은 달 16일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제출한 가입신청서에도 희망 연고지는 서울로 되어 있었다.

삼미-청보-태평양-현대로 이어진 인천야구의 역사는 2000년 현대의 야반도주로 중단될 위기에 빠졌다. 그때 새로운 인천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팀이 SK 와이번스. 가운데는 SK의 창단 당시 유니폼, 오른쪽이 현재 유니폼이다. 인천 야구 100년을 기념해 열린 전시회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출처: 황승식>

하지만 다음날 열린 KBO 정기총회에서는 ‘신규 구단 SK의 지역권은 수원으로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는 이미 1999년의 KBO 이사회에서 현대 유니콘스의 서울 이전이 결정된 상태였기 때문. 당시 이사회에서는 ‘2000년 시즌 후반기부터 현대는 서울을 연고로 한다’는 내용으로 정확한 이전 시기가 정해지지 않은 결정문을 발표했다.

여기에 문화체육관광부 박지원 장관이 “연고지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지만 총재가 리더십을 발휘해 정상적으로 리그가 시작되게 해 달라”고 발언하며 간접적인 압력을 행사하자, SK는 결국 2월 23일 ‘지역연고를 수원을 포함한 경기도로 변경해 준다면 서울을 포기할 수 있다’고 한 발 물러섰다.

결국 3월 15일 KBO 이사회에서 ‘SK 연고지는 인천, 현대는 2001년 후반기에 서울로 이전하는 조건으로 수원을 연고지로 삼는다’는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3월 18일 SK는 연고지를 ‘인천’으로 표기한 정식 창단신청서를 제출했다.

SK 마스코트는 ‘비룡’이란 뜻의 ‘와이번스(Wyverns)'로 정해졌다. “날개가 달리고 두 개의 다리와 화살촉 모양의 꼬리를 가진 상상 속의 동물”로 “용중의 왕인데다 새천년 ‘용의 해’를 맞아 새로이 도약하자는 뜻에서 팀 이름으로 결정하게 됐다”는 게 당시 안용태 창단준비팀장의 설명이다.

또한 초대 사령탑에는 강병철 전 한화 감독이, 수석코치로는 쌍방울 감독대행으로 마지막을 함께한 김준환(현 원광대 감독)이 각각 선임됐다.

한편 SK의 창단은 기존 쌍방울 레이더스의 인수 형식이 아닌, 새로 팀을 창단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IMF 직격탄을 맞고 법정 관리 중이던 쌍방울은 야구단 매각을 통해 최대한 많은 금액을 받아낼 계획이었다. 이에 7개 외국기업과 2개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협상을 벌였고 외국기업을 상대로 약 2000만 달러, 국내기업에게는 약 200억 원의 인수 대금을 요구했다.

당시 한창 프로야구 참여를 타진하던 SK 입장에서는 굳이 그 많은 돈을 쌍방울에 지불하고 야구팀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는 KBO와 직접 협상을 통해 연고지 이전, 선수보강 등 여러 부면에서 혜택을 얻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결국 회생에 실패한 쌍방울은 2000년 1월 7일 ‘금일 자로 (주)쌍방울은 KBO의 쌍방울 레이더스 법정 퇴출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내용의 팩스 한 통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사회적 여망을 받아들여 야구단 창단을 검토하겠다‘는 손길승 SK 회장의 발언이 나온 것은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2월 1일이었다. SK가 쌍방울과 전혀 무관한 팀이 된 사연이다.

KBO에 가입금 250억원을 납부하고 신생 구단의 자격을 얻은 SK는 전력보강 차원에서 ‘각 구단 보호선수 23명 외 1명, 2001년 신인 2차 지명 3명, 외국인 선수 3명 보유-2명 출장’ 등의 혜택을 얻어냈다.

그리고 7개 구단 보호선수에서 제외된 7명(강병규, 권명철, 김태석, 김종헌, 장광호, 김충민, 송재익)에 지명권을 행사했다. 여기에 웨이버 공시된 쌍방울 선수 50명을 전원 영입해 창단 멤버 구성을 완료했다. 2000년 3월 31일, 서울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인천의 새로운 구단 SK 와이번스의 공식 창단 행사가 열렸다.

SK 와이번스 창단 멤버
감독:
강병철
코치: 김준환, 함학수, 박상열, 김성현, 박철우
투수: 김원형, 오상민, 강희석, 박진석, 배홍철, 김명완(신승현), 이승호, 정수찬, 박주언, 김민환, 권명철, 박정현, 길배진, 김경태, 가내영, 빅터 콜, 강병규, 권명철, 김태석, 유현승, 정명수, 김형규
포수: 장광호, 정원배, 양용모, 장재중, 손석만, 김광현, 김충민
내야수: 뮬렌, 최태원, 김성래, 이동수,이민호, 신주일, 장재명, 김상호, 김선섭, 송재익, 장용대, 추성건, 김호, 손차훈
외야수: 이진영, 심성보, 조원우, 채종범, 손동일, 조병찬, 김종헌, 혼즈, 박재용, 윤재국, 강민규

1 오합지졸 창단초기

SK 와이번스의 출발은 상큼했다. 2000년 4월 5일 대구에서 열린 삼성과의 개막 경기. 두 팀 다 유니폼이 파란색이라 관중들이 “누가 홈팀이고 누가 원정인지” 헷갈리는 가운데, SK는 3-2로승리를 거뒀다. 롯데 출신 김태석이 7이닝을 무실점으로 버텼고, 신인 좌완 이승호가 세이브를 따냈다.

‘철인’ 최태원은 5회초 삼성 노장진을 상대로 2점 홈런을 쏘아 올려 구단 1호 홈런의 주인공이 됐다. 4월 8일 도원구장에서 열린 홈 개막전도 역시 SK의 승리였다. SK는 선발로 나선 박정현의 호투에 이승호가 또 한 번 마무리에 성공하며 7-3으로 이겼다. 특히 이승호는 1실점하긴 했지만 8개의 아웃카운트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 내며 괴력을 선보였다.

현대에게 배신당한 인천 팬들은 좀처럼 새 구단 SK에게도 정을 붙이지 못했다. 초창기 SK 경기의 평균 관중은 1~2천명대. 사진은 ‘배신자’ 현대와 SK의 인천 홈 경기 장면이다.<출처: SK와이번스>

하지만 돌풍은 거기까지였다. SK는 4월 14일 두산전에서 6-10으로 패한 것을 시작으로, 4월 23일 홈 현대전까지 9연패 늪에 빠졌다. 또 6월 22일부터 7월 5일 사이에도 또 한 차례 11연패를 당하는 등 신생팀의 한계를 드러냈다.

결국 SK는 시즌 성적 44승 3무 86패(.338)을 기록하며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신인왕을 따낸 이승호의 활약(10승 9세이브)과 최태원의 ‘700경기 연속 출장’ 대기록(6월 18일 한화전에서 달성)이 팬들에겐 위안거리였다.

최하위로 끝난 창단 첫 해지만 소득도 있었다. 2000년 6월 1일, 해태와의 맞트레이드(<-> 성영재)를 통해 영입한 이호준은 이후 SK의 중심타자로 성장했다. 또 처음 참가한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초고교급 포수 정상호를 비롯해 김희걸, 김강민, 박남섭, 채병용, 조중근, 박재상 등 수준급 선수를 대거 지명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들 중 정상호, 김강민, 박재상은 현재 SK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같은 해 7월 7일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한 김경기는 성적과는 별개로 인천 팬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전력 보강을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2000년 11월 29일 열린 KBO 이사회에서 리그 1, 2위 팀인 현대와 두산에서 보호선수 1명씩을 받기로 결정된 뒤, SK는 현대에서 투수 조규제와 조웅천을, 두산에서 내야수 강혁을 각각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12월 4일에는 쌍방울 시절 지명한 국가대표 서브마린 투수 정대현이 팀에 입단했고, 베테랑 포수 강성우가 트레이드로 SK 유니폼을 입었다.

2001년 4월에는 거포 내야수 안재만을 LG와 1:2 트레이드로 데려왔다. 5월 31일에는 해태에서 양현석을 받고 이동수와 가내영을 내주는 트레이드가 이뤄졌다. 잇단 전력보강의 효과일까. 2001년, SK는 60승 2무 71패를 기록하며 창단 2년 만에 꼴찌에서 벗어났다.

SK 선수 영입의 결정판은 2001년 12월 16일 성사된 삼성과의 6:2 초대형 트레이드였다. SK는 삼성에 브리또와 오상민을 내주고 김기태, 김동수, 정경배, 이용훈, 김상진, 김태한 등 즉시전력감 선수 6명을 받는데 성공했다.

브리또가 대체 가능한 외국인 선수라는 점을 고려하면,오상민 하나를 주고 선수 6명을 받은 셈이었다. 이 트레이드는 SK가 창단 초기 이른 시간 내에 강팀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

2 비룡 비긴즈 - 문학구장과 박경완

SK 구단 역사에서 2002년은 매우 의미 있는 해다. 2002년부터 SK는 홈구장을 기존 도원구장(숭의야구장)에서 최신식 시설을 갖춘 신설 문학야구장으로 옮겼다. 또한 시즌 티켓 판매, 평생 회원제 도입, 인천 지하철과의 연계 행사 등 본격적인 구단 ‘마케팅’에 돌입했다.

SK가 자랑하는 ‘스포테인먼트’가 사실상 이때부터 싹을 티운 셈이다. 또한 인천팀의 정체성을 부각하기 위한 이벤트가 계속해서 열렸다. 6월 5일에는 인천프로야구 20년 올스타를 선정해서 발표했고, 9일에는 도원구장 고별전을 치렀다. 또 9월 7일 현대와의 문학 홈경기에서는 ‘인천 야구 라이벌 이벤트’를 실시했다.

인천고와 동산고 출신 선수들끼리 맞대결을 벌인 이 행사에서는 2003년 신인 1차 지명 선수인 동산고 우완 송은범이 인천고 출신 내야수 정경배와, 2차 1순위로 지명된 인천고 왼손 투수 정정호가 동산고 출신 포수 정상호와 맞대결을 벌였다.

또 인천고 출신 최계훈 코치와 동산고 출신 김충민-신홍중 코치가, 동산고 출신 박은진과 인천고 출신 김진우가 투타대결을 벌여 인천 팬들을 즐겁게 했다. 하지만 시즌 성적은 61승 3무 69패로 전체 6위, 이에 시즌이 끝난 뒤 강병철 감독은 구단에 사의를 표했다. 후임으로는 배터리 코치 출신의 조범현 감독이 선임됐다.

그리고 12월 28일. SK는 당대 최고의 포수 박경완과 계약기간 3년, 계약금 10억원에 FA 계약을 체결했다. 이 선택은 이후 SK의 운명을 바꿔놓은 역대 최고의 FA 계약이었다. 이듬해 SK는 66승 3무 64패(0.508)로 4위에 오르며, 창단 첫 5할 승률과 첫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조웅천, 이진영 등 기존 선수들의 활약도 돋보였지만, 무엇보다 박경완이 젊은 투수들을 효과적으로 이끌면서 투수력이 한층 향상된 덕이 컸다.

SK 돌풍은 포스트시즌에서도 이어졌다. SK는 준플레이오프에서 전년도 우승팀 삼성을 2연승으로 제압한 뒤, 플레이오프에서도 막강 전력의 KIA를 3연승으로 압도했다.

이어진 현대와의 한국시리즈에서도 6차전까지 3승 3패를 기록하며 첫 우승까지 바라봤지만 7차전에서 정민태의 구위에 눌려 0-7로 패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김정준 전력분석팀장은 “선수단 전체의 체력도 떨어진 상태였지만, 무엇보다 정민태의 공이 너무 좋았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2003년 준우승은 만년 하위권이던 SK의 전력이 일정 궤도에 오르는 계기가 됐다. SK는 이후 계속해서 5할 안팎의 승률을 기록하며 만만찮은 팀의 이미지를 굳혔다. 2004년에는 61승 8무 64패로 5위를 기록, 아깝게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홈런왕에 오른 박경완의 활약과 팀 역사상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이진영, 김기태의 활약이 돋보인 시즌이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LG에서 FA로 풀린 김재현을 4년 계약으로 영입, 선수단 리더이자 팀의 구심점이 될 선수를 얻었다.

2005년에는 ‘인천야구 100주년’을 자축하듯, 70승 6무 50패로 창단 최다승-창단 첫 시즌 3위를 기록하며 통산 두 번째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또한 박재홍의 200홈런-200도루 달성, 김재현과 박경완의 2000루타, 박경완의 포수 최다홈런 기록(253호) 등 신기록도 쏟아졌다.

SK는 창단 초기부터 인천 구단임을 강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사진은 2005년 시즌 중 주말 홈경기에서 착용한 ‘인천’ 유니폼. 가슴에 구단명 대신에 ‘인천’이란 영문이 또렷하게 쓰여 있다.
<출처: SK와이번스>

3 스포테인먼트와 야신시대

2006년 SK는 60승 1무 65패로 6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또 한 번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찾아온 것이다. 이에 SK는 계약기간이 끝난 조범현 감독과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일본 프로야구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코치로 있던 ‘야신’ 김성근을 감독으로 영입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코치로 활동한 이만수를 수석코치로 영입하며 새로운 코칭스태프 구성을 완료했다.

SK의 스포테인먼트는 성적과 팬서비스를 통해 팬들에게 보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유니폼에 이름 대신 ‘팬 사랑’을 마킹하고 경기에 나선 SK 선수단. <출처: SK와이번스>

과거 태평양, 쌍방울 등 약체 팀을 맡아 중, 상위권으로 이끄는 능력을 보여준 ‘김성근 매직’은 SK에서도 발휘됐다. 김성근 감독은 혹독한 강훈련으로 SK 선수단의 기량을 단기간에 끌어올렸고, 스피드와 수비에 중점을 둔 야구로 두산과 함께 ‘발야구 돌풍’을 이끌었다. 결과는 73승 5무 48패로 창단 이후 첫정규 시즌1위를 차지했다.

두산과 치른 한국시리즈에서도2연패 뒤4연승하며 창단 8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이듬해인 2008년에도 SK 돌풍은 이어졌다. 전해보다 더 뛰어난 성적인 83승 43패로 압도적인 정규시즌 1위.

한국시리즈에서는 두산을 4승 1패로 누르고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009년에는 박경완과 김광현의 부상으로 준우승에 그쳤지만, 2010년 다시 정규시즌 1위와 한국시리즈 4전 전승 우승을 거두며 ‘SK 왕조’를 활짝 열었다.

SK는 성적만이 아니라 흥행에서도 대성공을 거뒀다. 비결은 신영철 사장이 주도한 ‘스포테인먼트’. 스포츠(Sports)와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를 합성한 스포테인먼트는 우승과 성적만을 강조하던 기존의 야구단 운영과 달리, 팬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새로운 가치를 내세웠다.

그리고 와이번스 걸 선정, 신규 캐릭터 공모, 인천 지하철역 역명 변경, 야구장 투어 등 다채로운 이벤트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야구장 시설 투자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바비큐 존, 커플 존, 그린 존 등 다양한 관람석이 등장했고 유소년을 위한 새싹야구장, 여성전용공간인 파우더룸 등이 속속 야구장 내에 신설됐다.

여기에 인천 지역 팀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노력도 끊이지 않았다.

창단 초기 텅텅 비었던 SK 홈구장은 2007년 60만 관중을 돌파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 2010년에는 98만명이라는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다. 사진은 인천야구 100년 기념 전시에 설치된 입간판. <출처: 황승식>

국내 최고 시설의 야구장과 새롭고 참신한 팬서비스, 지역 밀착, 여기에 성적까지 더해진 결과는 놀라웠다. 첫 우승을 달성한 2007년 SK는 인천 연고지 팀 사상 최초로 60만 관중 돌파에 성공했다. 창단 첫 해인 2000년 홈 총관중수가 8만 4천 500여명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었다.

이후로도 SK는 2008년 70만, 2009년 80만을 돌파한데 이어 2010년 9월 7일 문학 두산전에서 홈 61경기 만에 홈 총 관중 90만 7천380명을 기록하며 해마다 관중이 10만 명씩 증가하는 성장세를 보였다. 야구장에 울려 퍼지는 ‘연안부두’는 더 이상 구슬픈 송가가 아닌, 환희의 찬가가됐다.

‘야신’ 김성근 감독과 SK의 만남은 4년간 4번의 한국시리즈 진출, 3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이뤄 냈다. 또한 상식을 파괴한 새로운 야구 전술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선수들의 투지를 통해 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출처: SK와이번스>

하지만 김성근 감독과 SK의 행복했던 동거는 2011년 중반에 파국을 맞았다. 재계약 문제와 구단의 처우 등을 놓고 의견 대립이 계속된 결과였다. SK는 이 과정에서 매끄럽지 못한 일처리로 팬들의 거센 반발을 사면서 아쉬움을남겼다. 김성근 감독 후임으로는 이만수 2군 감독이 감독대행을 맡아 남은 시즌을 마무리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71승 3무 59패로 전체 3위. 준플레이오프에서는 KIA에 먼저 1패를 당했지만, 내리 3연승을 거두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야신' 아래서 수년간 단련된 SK 선수들의 ‘승리본능’은 감독이 바뀌어도 여전하다.

  • 발행일2011.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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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지헌 야구 칼럼니스트

    배지헌은 야구 전문 블로그 <야구라>의 필진으로 활동 중이다. [야구생활], [스카우팅 리포트 베이스볼 2011] 등의 필진으로 참여했으며, 현재 네이트 스포츠 Pub에 기고하고 있다.

  • 감수
    신명철 前 스포츠 2.0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