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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어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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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27.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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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키어사지 (Kearsage)

 

 

 

키어사지는 미해군의 전함으로, 미해군의 함명 중 유일하게 주(州) 이름이 붙지 않은 함이기도 하다. 이것은 키어사지가

남북전쟁 당시 무공함인 <키어사지>의 이름을 이어받았기 때문인데 키어사지란 뉴 햄프셔 주 키어사지 산의 이름에서

기인한 것이다. 동형함은 <켄터키>가 있다.

 

키어사지급 전함은 2단으로 구성된 독특한 형상을 지닌 포탑을 전후로 장비한 첫 미국전함이었다. 이 포탑배치는

13인치 주포와 8인치 부포가 발사시 서로 장애를 받음으로 인하여 이후 함급에선 채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본급은

<치즈박스>라 불린 소형포탑을 장비한 마지막 함급이기도 했다. 이것은 남북전쟁시 존 에릭슨이 설계한 모니터식 포탑의

직계자손이기도 했다.

 

이들 <치즈박스> 포탑은 후방으로 포가 배치되어 포의 각도를 얻기 위해 크고 빈약한 개구부가 요구되어 최대각에 제한을 받았다.

이후 함급부터는 영국식의 박스형 포탑이 채용되어 방어가 효율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키어사지는 전근대적인 함선흔적이 남아있던 과도기적 전함이기도 했다.

 

 

 

키어사지는 1896년 6월 30일에 버지니아 주 뉴포트 뉴스 조선소에서 기공해 1898년 3월 24일 진수 후 1900년 2월 20일에

초대함장인 윌리엄 M. 홀저 대령의 지휘하에 취역했다. 키어사지는 취역 후 북대서양 기지의 기함이 되어 대서양 연안과

카리브 연안을 순항했다.

 

1903년 6월 3일부터 7월 26일에 독일의 킬 군항을 방문하며 유럽을 순방한 키어사지는 6월 26일에 독일 황제이던 빌헬름 2세,

7월 13일에 영국의 웨일즈 대공(훗날 조지 5세)이 방문했다. 7월 26일에 메인 주로 돌아간 키어사지는 북대서양 함대의

기함임무로 복귀했다.

 

1903년 12월 1일에 쿠바의 관타나모 만을 향하여 뉴욕을 출항한 키어사지는 12월 10일에 관타나모에서의 미국의 법적권리를

취득한 후 카리브 해에서 훈련 후 다시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방문하여 1904년 6월 11일에 카를로스 1세 국왕의 시찰단을

맞이했다. 그 후 그리스를 방문해 7월 4일에 그리스 국왕인 게오르기우스 1세 일가의 방문을 받았다.

 

이후 키어사지는 코르프, 트리에스테를 친선방문 후 1904년 8월 29일에 뉴 포트로 돌아왔다. 키어사지는 이후에도 기함임무를

계속하여 1906년 3월 31일에 전함 <메인>과 기함임무를 교대한 후 훈련에 종사했는데 1906년 4월 13일에 쿠바의 크루즈 만에서

사격훈련 도중 13인치 주포의 장약이 폭발하면서 장교 2명과 수병 8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를 냈다.

 

그 후 키어사지는 제 2전대 제 4부대에 배속되어 1907년 12월 16일에 세계순방에 나섰다. 순방에 나선 함대는 햄튼 로즈를 출항해

남미를 돌아 하와이,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일본을 방문했다. 이어서 실론을 방문한 후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지중해의 각 항구를

거친 다음 미국 동해안으로 귀환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1909년 2월 22일에 햄턴로즈를 방문하여 함대를 관람한 뒤 미국의 국위를 선양했다고 선전했다.

키어사지는 1909년 9월 4일에 필라델피아 해군조선소에서 예비역이 되어 근대화 개장공사를 받았다. 함교는 새장식 마스트로

바꾼 후 1915년 6월 23일에 재취역했다.

 

재취역한 키어사지는 대서양 연안에서 9월 17일까지 훈련에 종사한 후 멕시코로 이동해 베라크루즈의 해병대를 싣고 귀국했다.

키어사지는 1915년 9월 28일부터 1916년 1월 5일까지 베라크루즈와 버지니아 주 뉴올리언즈를 오가며 해병대를 실어날랐다.

그 후 필라델피아에서 1916년 2월 4일에 태평양 예비함대로 편입된 후 키어사지는 미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전까지

메사추세츠 주와 메인 주의 해군 주립병 훈련함이 되었다.

 

그 후 1918년 8월 18일 밤에 키어사지는 독일의 UE2형 잠수함인 U-117에 공격당해 침몰한 노르웨이 범선의 생존자 26명을

구조한 후 이들을 보스턴까지 송환했다. 키어사지는 기관원들의 연습함으로 이용되어 1919년 5월 29일까지 임무를 마친 후

해군사관학교의 사관후보생들을 태우고 서인도 제도로 연습항해에 나섰다.

 

그 후 필라델피아로 향한 키어사지는 1920년 5월 10일에 퇴역하여 크레인 선으로 개조되었다. 1920년 8월 5일에 키어사지는

새로이 <AB-1>이라는 선명이 주어졌다. 

 

대형 크레인선으로 운용된 키어사지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리함으로 명성을 떨쳤다.

 

 

 

키어사지는 무장을 철거한 후 250톤의 대형 선회식 크레인을 장비했다. 선체엔 벌지가 장착되어 안정성이 향상되었다.

키어사지는 그 후 20여년간에 걸쳐 다양한 작업에 종사했는데 가장 유명했던 작업은 1939년에 뉴 햄프셔 주에서 침몰한

잠수함 <스퀼러스>의 인양이었다.

 

1941년 11월 6일에 키어사지는 <기중기선 1호>로 개명되어 제 2차 세계대전시 미군전함 <인디애나>, <앨라바마>,

<서배너>, <시카고> 및 각종 항공모함과 순양함 등의 수리와 보급을 담당했다. 1945년에 샌프란시스코 해군조선소로

이동해 항모 <호넷>, <복서>의 건조와 <사라토가>의 수리에도 공헌한 키어사지는 전후인 1955년 6월 22일에 제적된 후

그 해 8월 9일에 매각되어 해체되었다.

 

 

<성능제원>

 

전장 : 114.38m

전폭 : 22.02m

높이 : 7.14m

기준배수량 : 11,540t

최대출력 : 불명

최대속력 : 16kt

항속력 : 불명

무장 : 33cm포 4문, 20.3cm포 4문, 15.2cm포 14문, 57mm포 20문, 37mm포 6문, 7.62mm 기총 4기, 45.7cm 어뢰발사관 4문

탑재기 수 : 없음

승원 : 553명

동형함 : 켄터키

 

출처 : 해인사 <미해군전함사>, 사진은 라이센스가 필요없는 무료공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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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후회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할 수 없다>며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이다. 적어도 <한번 도전해 보고나서>라면 그것이 비록 실패해도 가슴속에 번민은 남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