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태의 요가로 세상 보기] 53. 부활과 약동의 상징, 개구리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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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자세는 손가락이 앞을 향하게 한 후 발등을 누른다. 어깨관절을 부드럽게 풀어주며 허벅지의 탄력성과 복근력을 강화시켜 준다. 시연 임은주.


얼었던 대동강물이 풀리고 개구리도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24절기 중의 하나인 경칩(驚蟄)이 눈앞이다.

일어난다는 뜻의 경(驚)과 겨울잠을 자는 벌레라는 뜻의 칩(蟄)이 합쳐진 말이다. 겨우내 동면하던 동물들이 깨어나고 잎이 돋아나는 시기가 바로 이때이다. 이처럼 경칩은 삼라만상이 약동하는 시기로 움츠렸던 겨울이 끝나고 새로운 생명력이 소생하는 절기인 것이다.

우리나라 수심가(愁心歌)에도 “우수 경칩에 대동강이 풀리더니 정든 님 말씀에 요 내 속이 풀리누나” 하는 가사가 있다. 계곡이나 개울가엔 올챙이가 꾸물거린다. 아직 젤 상태로 쌓인 알들도 보인다.

“개울가의 올챙이 한 마리 꼬물꼬물 헤엄치다”는 동요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읊조리는 재미있는 ‘올챙이 송’이다.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로 시작하는 ‘개구리 송’도 귀에서 맴도는 시절이 왔다. 황새에게 목이 먹힌 상태에서도 필사적으로 황새 목을 꽉 조아서 결국 토해내게 만드는 ‘네버 기브 업(never give up)정신’으로 끝까지 춥고도 시린 세한(歲寒)의 시간을 버티고 이겨낸 개구리들이 약동하는 계절이 왔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이 신화나 제의(祭儀)의 맥락에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은 겨울잠을 자고 깨어나는 이들의 상태가 죽었다 되살아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대지의 어머니 자궁 깊숙이 파고 들어가 깊은 잠에 빠졌다가 다시 생명의 기운을 되찾아 활기차게 깨어나는 이들 생물들은 모두 죽음을 경험하고, 죽음에서 되살아난 존재들로 볼 수 있다. 그것은 곧 부활과 재생 그리고 약동, 되살아남의 표상으로 여겨진다.

물과 육지 양쪽에서 생활하는 것을 양서류(兩棲類)라고 하는데 개구리는 대표적인 양서류 중의 하나다. 고어로는 머구리라 하고 사투리로는 개구락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먹이는 살아 있는 곤충이며 천적으로는 뱀, 때까치, 황새, 물장군 등이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청개구리는 얼룩무늬 참개구리다. 일상적으로 다른 개구리와 구분되는 두꺼비나 맹꽁이 등도 사실은 개구리목(木)에 포함된다.

식용으로 수입되었지만 방목되어 한국의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있는 황소개구리, 거의 아기만 한 크기까지 자라는 현존 최대의 개구리로서 골리앗 개구리도 있고 피부에 독을 분비하는 독화살 개구리나 무당개구리, 송곳니가 달린 송곳니 개구리도 있다. 심지어 박치기로 적의 몸에 독액을 주사하는 개구리도 발견되었다.

독개구리의 독은 사람에게도 치명적인 맹독이라 원주민들은 이 개구리의 독을 화살에 묻혀 사냥에 쓰기도 했다. 특히 남미산 개구리의 독은 뱀의 독보다도 더욱 독성이 강해 생명체가 낼 수 있는 독 중에서 가장 독성이 강하다. 이 개구리의 독 한 방울로 성인 남성 10만 명 정도를 살상할 수 있을 만큼 치명적이라 한다. 과학자들은 독개구리의 신경독을 이용해 수백 종류의 진통 물질을 개발하고 있다. 독은 독으로 다스리는 이독치독(以毒治毒) 치료법이다.

양서류임에도 불구하고 사막비 개구리처럼 사막에서 사는 개구리도 있다. 게다가 성체인 개구리가 오히려 유체인 올챙이보다 작은 개구리도 있고, 중앙아프리카에는 몸에 털 같은 조직이 나 있는 개구리도 있는데, 보다 특이한 점은 손과 발의 뼈를 돌출시켜 호신용 무기로도 사용한다고 한다. 백악기에는 베엘제부포라는 거대한 개구리도 존재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문화권에서 많은 신화와 설화 그리고 종교 속에서 개구리에 관한 내용이 흔하게 발견되는 것을 보면 인간의 인식 속에 개구리가 자리 잡은 지 꽤 오래된 듯하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개구리는 가깝고 친근한 존재다.

‘개구리 왕눈이’, ‘개구리 중사 케로로’를 보며 성장한 우리들 삶 곳곳에는 개구리와 관련된 것들이 여전히 많다.

먼저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 신화 속에 금와왕(金蛙王) 이야기가 등장한다. 북부여왕 하모수의 아들로 동부여를 건국한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는데 길을 가다가 눈물 흘리는 큰 돌을 들치자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이가 나왔다. 하늘이 자신에게 내린 아이라고 여긴 부루왕은 그를 데려가 키우고, 아이 이름을 금빛 개구리를 뜻하는 금와(金蛙)라고 지었다는 설화이다.

삼국유사에 ‘선덕왕 지기삼사(知畿三事)’로 알려진 이야기로 신라 선덕여왕이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적이 몰래 침입한 사실을 알아내어 섬멸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또 강감찬 장군과 관련된 설화 중에 개구리가 너무 시끄럽게 울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개구리를 심문하고 입을 봉함으로써 소란했던 개구리들의 울음을 그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불가(佛家)에 전해지는 이야기로 어느 날 개구리 한 마리가 부처께서 법(法)을 설하시는 걸 듣기 위해 연못에서 나와 풀숲으로 가던 중 지나가던 행인들의 발길에 깔려 죽고 말았다. 이윽고 개구리의 육체와 영혼은 분리되었고 그 영혼은 저승으로 가게 되었던 바, 잠시 후 눈을 떠 보니 자신이 새로 태어난 곳이 불국토(佛國土) 정상에 위치한 도리천이었다는 것이다. 전생에 축생이었던 자신이 그리 된 이유를 몰라 의아해 했는데, 자신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기에 이러한 과보를 받은 것임을 뒤늦게 알게 된다. 이것이 곧 그 유명한 ‘경률이상(經律異相)’에 수록된 개구리에 관한 설화이다.

구약성서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이집트에 다섯 가지 재앙을 내린다. 그중 두 번째 재앙이 개구리에 관한 것이다(출8: 2~15). 나일강에서 엄청나게 많은 개구리들이 뭍으로 나와 온 나라를 뒤덮었고, 개구리들이 죽어 썩으면서 악취가 진동한다.

또한 요한 계시록에서는 개구리를 더러운 존재로 보고 사탄의 모습에 빗대 표현했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에서 개구리가 늘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인 것은 아니었다. 초기 기독교 문화에서는 개구리를 재생과 영적으로 깨어 있음을 상징하는 표상으로 삼기도 했다.

인도의 오래된 경전 중 하나인 리그베다에서는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개구리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개구리를 대지의 모신(母神)을 모시는 사제에 비유한 개구리 찬가도 전해진다.

힌두 전통에서 개구리는 울음을 통해 겨울 가뭄을 끝내고 봄비를 내리게 하는 신성한 존재다. 또한 개구리는 하늘의 천둥으로 여겼다. 게다가 개구리를 뜻하는 영어인 프로그(frog)는 범어로는 구름을 뜻한다. 비가 오지 않으면 개구리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인도 동북부에 있는 한 도시인 구와하티에서는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자 기우제로 개구리 한 쌍의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한 이 결혼식은 인도 전통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힌두 사제의 주례로 치러졌다. 아직도 개구리의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면 비의 신이 노여움을 풀고 축복을 내린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 신화에는 헤켓(heqet)이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헤켓은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신으로 출산을 관장하며, 특히 왕들의 탄생을 주관하는 신이다. 헤켓 여신을 모시는 사제들은 산파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신화 속에서 헤켓 여신의 모습은 개구리 또는 개구리 머리를 한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창조와 풍요를 뜻하는 원초의 여신, 매일 아침 물속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돕는다고 해서 산파의 여신으로 여겨졌다.

고대 중국에서는 북에 개구리를 그려 비를 부르는 의식에 사용했다. 북을 두드려 그림 속의 개구리를 울게 하고, 울리는 북소리는 천둥과 같으므로 비를 내리게 한다고 믿었다.

그리스 문화에서 개구리는 다산과 사랑을 주관하는 아프로디테(비너스) 여신의 상징이었다. 이는 개구리가 많은 알을 낳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일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두꺼비 신선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여기서 두꺼비는 신비한 약초와 영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개구리나 두꺼비를 불길한 존재로 여겼다. 이들은 악마와 마법을 대표하여 종종 검은 고양이와 함께 마녀 일당으로 취급되었고, 음모나 마약 같은 비책으로 인용되었다.

이와 같이 개구리는 많은 설화나 민담 속에 등장하여 다양한 상징성을 가진다. 여기에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있다. 개구리는 많은 우화에서 어리석고 조롱거리 대상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앞서 기술한 대로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대체로 개구리는 행운을 가져다주고, 가뭄에 단비를 내리게 하는 등 신성을 띤 긍정적인 존재로 비쳐지는 경우가 많다. 동양문화에서 두꺼비는 대체로 지혜롭고 신비한 능력이 있으며,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의리 있는 존재로 그려졌다.

이러한 동서양의 신화 중에서 공통적인 것은 개구리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개구리가 다량의 알을 낳고 또 특정 시기에 대규모로 출몰한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옛날 신혼집에는 개구리가 그려진 병풍과 족자를 배치하였는데, 여기에도 다산의 염원이 담겨 있다고 본다.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 병풍’에 나오는 개구리가 특히 눈에 띈다. 우스갯소리지만 요즘처럼 저출산 시대에 신혼부부들에게 개구리가 들어간 그림이나 사진이라도 선물하면 좋을 듯 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개구리는 3억 년간 몇 번의 대멸종까지 거치며 살아남은 생존왕답게 나름대로 천적에게 대항하기 위한 수단이 갖춰져 있다. 대표적인 방법이 뜀뛰기와 위장술이다. 근육질의 긴 뒷다리는 개구리의 트레이드 마크나 마찬가지이며 폭발적인 도약력은 메뚜기나 벼룩에 견줄 만큼 독보적이다. 위협을 느끼면 단숨에 점프하여 순식간에 천적의 사정권에서 벗어나 몸을 숨긴다.

단 지구력은 매우 떨어져서 오래 뛰지는 못한다. 위장술 또한 보편적인데 대부분의 개구리는 주변 자연 환경과 매우 유사한 색깔을 띠고 있어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

청개구리가 비 오는 날에 슬퍼서 운다는 말은 사뭇 잘못된 이야기다. 청개구리는 비 오는 날에만 우는 것도 아니고 슬퍼서 우는 것도 아니란다. 비 오는 날에 우는 게 활성화될 뿐이며, 암컷을 유혹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개구리는 피부호흡과 폐호흡을 같이 하는데 비가 오면 피부가 촉촉해져 피부호흡을 하기에 알맞은 환경이 된다. 개구리에겐 최적의 환경인 셈이며, 그래서 비 오는 날에 더 많이 운다는 것이다.

또한 개구리의 옹골찬 울음은 농염한 사랑 노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들의 유전자를 더 많이 퍼트리고 싶어하는 수컷들의 처절한 외침이다.

개구리도 매미처럼 암놈은 소리를 내지 못하고, 수놈이 목 밑의 울음주머니를 부풀렸다 오므렸다 하면서 떼 지어 노래를 부른다. 요즘말로 떼창을 부른다. 그것도 밤새도록, 기운도 좋다. 이는 천적에게 주의를 분산시켜 포착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한 궁여지책이라고 한다. “개구리 너희들도 다 생각이 있었구나.”

또한 옴짝달싹 않고 암수 개구리가 붙어 있는 것은 교미를 하는 게 아니란다. 개구리는 교미가 없다. 그냥 껴안아 흥분시키고 자극할 뿐, 암놈이 알을 낳으면 잽싸게 수놈이 그 위에 정자를 뿌리는 체외수정(體外受精)을 할 따름이다.

역사적으로 개구리 고기가 전기의 발견에 기여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개구리 뒷다리를 익히기 전, 소금을 뿌리면 나트륨 때문에 경련을 일으킨다. 18세기 이탈리아의 해부학자인 갈바니(Galvani)가 발견한 갈바니즘, 즉 개구리 뒷다리에 전기가 흐르는 금속이 닿으면 경련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개구리 고기를 먹다가 우연히 이런 걸 보고 전기는 개구리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했는데, 비록 지금은 틀렸다고 밝혀졌지만 이로 인해 전기의 발견에 기여했다.

갈바니의 생물전기 이론은 훗날 신경계의 발견과 뉴런의 작용, 그리고 심장이 스스로 전기신호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음이 밝혀짐으로써 그의 생각은 나름 인정받게 되었다. 영어에 ‘전기가 통하다’의 뜻의 ‘갈바나이즈(galvanize)’라는 동사는 갈바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초기 전기 발전에는 개구리의 희생과 기여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라는 게 있다. 고생 끝에 성공을 하고 나면 지난날의 미천하고 어려웠던 때를 잊고 거만하게 행동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중국의 ‘후한서(後漢書) 송홍전(宋弘傳)’에 나오는 ‘빈천지교불가망(貧賤之交不可忘)’이라는 말, 즉 ‘가난하고 천할 때 사귄 벗은 잊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원본은 뒤에 ‘조강지처불하당(粗糠之妻不下堂)’이 더 있다. 즉 ‘술지게미와 쌀겨 가루 먹으며 가난을 함께한 아내는 보낼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조강지처’란 말이 나온다.

장자(莊子)에는 정저지와(井底之蛙)라는 성어가 있다.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라는 뜻으로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는 자기가 사는 우물 안의 좁은 세계만 알 뿐이다. 우물 바닥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이 우물 만하게 보일 뿐이라는 뜻이다. 알고 보면 우리는 대부분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닐까?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내가 속한 시간, 공간, 인간관계 등에서 벗어나 심안(心眼)을 보다 활짝 열어서 지금까지의 고착된 사고를 내려놓아야 될 것이다.

그 후로도 끊임없는 사유와 성찰을 통해 열린 자세로 세상과 새로운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사고의 폭과 시야를 끊임없이 넓혀 가야 되지 않을까?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의 ‘변화금와’에 기록된 유명한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신라의 자장율사와 금개구리에 관한 것이다. 자장율사가 통도사(646년 창건)를 세우기 전 어느 날 옹달샘에 갔다가 샘에서 개구리 한 쌍이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숲속으로 옮겨놓았는데, 다음 날에도 또 다음 날에도 여전히 그곳에서 놀고 있었다.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다른 개구리와는 달리 금줄이 선명하고, 등에는 거북 모양의 무늬까지 있는 게 아닌가. 이에 불가(佛家)와 인연이 있는 개구리라 생각하여 샘에서 살도록 하고, 겨울이 되면 동사(冬死) 할 것을 염려하여 암벽에 구멍을 뚫어 그 속에 살게 하였단다.

그 뒤 불자들은 이 개구리를 ‘금와보살’이라 칭하고, 바위의 굴을 ‘금와석굴’ 또는 ‘금와공(金蛙孔)’이라 불렀다. 지금도 그 속에서 산다는 금개구리는 절에 행사가 있을 때는 모습을 드러낸다고도 하며, 불심(佛心)이 지극한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말도 있어 지금도 자장암에 가는 사람들은 지름 3.5cm의 금와공 앞에서 눈을 크게 뜨고 금와보살을 친견하려 애를 쓰고 있다.

필자 역시 수번 친견한 적이 있으며, 사진까지 담아온 경험도 있다(요즘은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는 듯). 그러나 자장암의 이 금개구리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수행·구도에 이르는 깨달음의 길을 인도하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삶겨 죽는 개구리 증후군(boiling frog syndrome)’이란 말이 있다. 미국 코넬리 대학교의 실험실에서 있었던 일로 개구리 한 마리를 처음엔 차가운 물 속 비커에 넣고, 서서히 그것도 아주 서서히 물이 데워지도록 온도를 올려가면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어어 하다가 어느 순간, 임계 온도에 이르러 뛰쳐나오려 했을 때는 이미 늦어 삶아져서 죽고 만다는 이야기다.

사실 우리 인간들도 대부분 비커의 개구리처럼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한 채 현실에 안주한 채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결정적인 변화가 도래했음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개인은 물론 기업의 경영 및 심지어 국가의 존망까지 말이다.

변화라고 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규모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변화는 잘 눈치채지 못하게 매우 서서히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가끔은 그 징후(사인)를 보내기도 한다는데 그것을 예사로 여기거나 또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그것은 우리 몸의 ‘건강상태’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천하의 대세를 아는 자 천하에 살아남을 수 있고, 천하의 대세를 모르는 자 천하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한 현자의 말을 떠올린다.

미국의 안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교수는 환경 문제가 지구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개인의 생활태도를 바꾸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 이유는 지금 당장 나에게,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이 크게 와 닿지 않기 때문이란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기든스 패러독스(Giddens Paradox)’라고 한다. 기후변화라는 재앙이 눈앞에 닥쳤지만 사람들은 실생활에서 애써 외면한다. 우선 눈앞의 달콤하고 안락한 작은 이익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자칫하면 앞서 기술한 ‘삶긴 개구리’ 신세가 될 수도 있음을 되새겨 보면 좋겠다.

항상 미래를 바라보는 열린 눈으로, 주어진 현실을 냉철히 직시하면서 쏠림이 아닌 균형 잡히고 깨어 있는 의식을 갖출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나도 그대도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개구리 자세는 만두카 아사나(Manduka Asana) 또는 베카 아사나(Bheka Asana)라고 한다. 만두카, 베카는 개구리라는 뜻으로 개구리의 형상을 닮은 동작이다.

복부를 바닥에 대고 엎드려 양 무릎을 접은 후 양팔을 손가락이 앞을 향하게 돌린 채, 발등을 누른다. 상체는 최대한 위로 들어 올리며 얼마간 이 자세를 유지하다가 자세를 푼다.

두 번째 단계로 ‘누운 개구리 자세(숩타 만두카 아사나)’를 시도해 본다. 복부를 천장을 보게 한 후 양 무릎을 뒤로 접는다. 이때 엉덩이와 가슴은 바닥에서 들어 올린다. 그리고는 한쪽씩 천천히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한 채, 손가락이 앞을 보게 하면서 발등을 받쳐 올린다. 팔굽으로 지탱한다. 얼마간 자세를 유지하다가 풀고 휴식을 취한다. 이 자세는 어느 정도 어깨 관절이 풀려야 가능하다.

무릎관절과 통풍 등의 트러블에 효과가 있다. 발뒤꿈치의 통증도 완화시켜 준다. 그러나 너무 오래 무리하게 이 자세를 시행치 않는 게 좋다. 허리와 하복부 단전의 힘을 배양시키며, 허벅지 앞쪽의 근육을 자극해 등산이나 행군 등 많이 걸었을 때 하체의 피로를 조속히 경감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

이 자세는 개구리가 올챙이에서 끝없이 노력하여 개구리로 탈바꿈하는 성장 과정을 떠올리며 자신의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의미의 자강불식(自强不息)을 되새기게 한다. 자신의 성장을 위한 변화엔 두려움이나 머뭇거림 없이 기꺼이 동참할 수 있어야 됨을 상징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예전의 탄광에서는 일산화탄소에 예민한 카나리아가 죽으면 광부들이 서둘러 탄광을 빠져나왔다. 개구리도 환경 변화에 민감하며, 피부호흡을 하기 때문에 물과 공기 모두에서 오염물질을 흡수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개구리를 지구환경 변화의 카나리아라고 부른다.

개구리 등 양서류의 감소는 인간의 삶에 근본적인 도전이 되고 있다. 양서류가 사라지는 것은 생태계 고리가 끊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끊어진 한 고리는 다른 고리도 망가트리고 만다. 고리의 하나인 인간도 살기 어려워질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느끼며 들으며 호흡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제 아무리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음률일지라도 자연의 소리만큼 평화로움과 안락함을 선사할 수 있을까? 개구리 소리 새소리, 풀벌레 소리 등이 그윽한 자연환경과 더불어 비로소 우리 인간은 제대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본다. 생태계를 인간의 이익만을 위해 인위적으로 변모시킨다면 결국 그 해(害)가 인간에게 되돌아올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호수와 저수지 및 아름다운 산하가 인공적인 구조물로 인해 더 큰 것을 잃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볼 일이다. 한 번 파괴된 자연 환경을 되돌리려면 너무 큰 대가를 지불하기 때문이다.

‘개구리는 옴쳐야 뛴다’거나 ‘개구리가 주저앉는 것은 멀리 뛰기 위해서다’라는 옛말이 있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말과도 맥락이 같다.

지금 오랜 기간 역질 등의 영향으로 모두가 일상생활 등 모든 면에서 조금은 주저앉아 있고, 움츠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래의 도약을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축적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서 결코 현재의 이 시간들을 헛되고 무의미하게, 또는 절망 속에 빠져 지내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머지않아 꽃 피고 새 우는 따사로운 봄날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꽉 잡아 본다. 이토록 오랫동안 움츠리고 주저앉아 기다렸으니 앞으로 다가올 시간들은 더 활기차고 약동적일 것이라 믿는다. 긴긴 겨울 죽은 듯 겨울잠을 자다 다시 깨어나는 개구리를 보며 부활의 의미를 되새긴다.

얼마 후면 나라에 대사(大事)가 있다. 가슴이 뛴다. 하늘을 우러르며 심호흡을 한다. 팽팽한 긴장감이 조여오는 ‘만두카 아사나(개구리 자세)’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복부를 바닥에 붙인 채 지긋이 두 발목을 누르며 머리와 가슴을 치켜올려 본다. 꿈과 희망에 부푼 부활과 약동의 봄기운을 한껏 들이키면서.

[ 개구리 / 최진태 ]

만물이 약동하는 바야흐로 봄이로세/ 경칩의 절기 쯤에 깨어나는 그댈 본다/ 춥고도 시린 세월 꿋꿋이도 잘도 견뎌

이 악물고 버텨왔다 인내와 끈기로써/ 오늘의 밝은 세상 이 날을 기약하며/ 죽었다 되살아났네 이걸 일러 오, 부활

새 삶을 노래하리 자손대대 번영이뤄/ 목놓아 울어보리 신천지를 만났으니/ 수억년 끈질긴 생명 너와 나는 한 가족

비커에 담기어서 나 모르게 삶기다가/ 결국은 숨 거두는 어리석음 경계하소/ 변화에 대처 못하면 너도 나도 죽음 뿐

나날이 새로와 짐 올챙이서 개구리로/ 영육(靈肉)성장 거듭하세 탈바꿈도 불사하고/ 부단한 자기 연단(鍊鍛)이 스스로를 지킨다네



최진태 부산요가지도자교육센터(부산요가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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