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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579년 ~ 632년[진평왕대(眞平王代)]
저자 무왕(武王)

1. 작품

원문 현대역

善化公主主隱
他 密只 嫁良 置古
薯童房乙
夜矣 卯乙 抱遣 去如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사귀어(통정하여 두고)
맛둥[薯童]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2. 배경설화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미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의 용과 정을 통해 (그를)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으로, 재기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평상시에 마를 캐서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고 고운 것이 짝할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가서 마를 마을의 여러 아이들에게 먹이니, 여러 아이들이 그를 친하게 따랐다. 곧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했는데, 그 노래는 이러하다. …서동요 내용…

동요가 서울에 가득 퍼져서 궁중에 이르자, 백관이 극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게(내치게) 했다. (공주가) 떠나려 할 때에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귀양소에 이를 무렵, 서동이 도중에 나와 절을 하며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 따라온 사람을 알지 못했으나 뜻하지 않게 (그를) 믿고 좋아했다. 이 때문에 (그를) 따라 가 몰래 정을 통했다. 그 뒤 서동의 이름을 알고서 동요의 징험을 믿게 되었다.

함께 백제에 이르러 왕후가 준 금을 내다 (팔아) 생활을 꾸리고자했다. 서동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무슨 물건입니까?”
“이것이 바로 황금입니다. 한 평생(백 년)의 부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땅에 (이것이) 진흙처럼 흩어져 쌓여 있습니다.”
공주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말했다.
“이것은 바로 천하의 지극한 보물입니다. 서방님께서 지금 금이 있는 곳은 아신다면, 이 보배를 부모님이 계신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이 말했다.
“좋습니다.”
이에 금을 채취해서 쌓으니 구릉과 같았다.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가 계신 곳에 이르러 황금을 수송할 계책을 물었다. 법사가 말했다.
“저는 신력으로 수송할 수 있으니 황금을 가져오십시오.”

공주는 편지를 써서 황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두었다. 법사는 신통력으로 (황금과 편지를) 하룻밤에 신라 궁중에 옮겨 두었다. 진평왕은 그 신변(神變)을 이상하게 여기고, (서동을) 더욱 존경하여, 항상 글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과 부인이 사자사에 행차했는데, 용화산 아래 큰 못 가에 이르렀다. (그러자)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출현하였는데, 수레를 멈추고 치경을 드렸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이 땅에 대가람을 짓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은 허락하고는, 지명 법사가 있는 곳에 이르러 못을 메울 일을 물었다. (그러자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허물고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곧 미륵삼존 불상과 전과 탑, 낭무[행랑]를 각 세 곳에다 만들고, 이름을 미륵사[전북 익산군 금마면 용화산에 있던 절]라 했다. 진평왕은 여러 공인을 보내 도왔는데,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다.

3. 특징

(1) 민요적 정서를 노래한 대표적 향가.
(2) 「서동요」는 향가 중 민요체를 대표하는 작품.
(3) ‘서동’과 ‘선화 공주’라는 고유 명사만 제외한다면 누구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민요적 패턴을 가지고 있다.
(4) 출전 : 『삼국유사』 「기이ㆍ무왕(武王)」.

4. 의의

(1)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향가.
(2) 4구체 향가로 민요가 동요로 정착한 유일한 노래.

5. 서동요의 주술적ㆍ사회적 성격

고대인들의 노래에 대한 관념은 신성한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유흥의 대상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신 또는 지배층에 전달하는 여론의 수단이 노래였기 때문에, 그 부정적인 이용 방법으로 노래를 통하여 여론을 오도하는 일까지 가능했던 것이다. 서동요는 어린이들의 입을 통하여 불리어짐으로써 의도적인 결과를 만들기 위하여 부른 주술성을 띤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서동요」는 평민으로서 공주를 아내로 맞는다는 점에서 하층민의 강한 신분상승욕구가 반영된 참요(讖謠)라고 볼 수 있다.

6. 작가ㆍ연대에 대한 이설들

(1) 『삼국유사』 「서동설화」 그대로 무왕의 실화다 - 소창진평, 양주동, 조윤제 외.
(2) 신라에 청혼하여 이찬(伊湌) 비지(比智)의 딸과 혼인한 백제 동성왕의 작품이다 - 이병도.
(3) 원효의 「쇼뚱노래」가 서동요다 - 김선기.
(4) 무왕은 실제 인물이 아닌 설화적 존재인데, 이를 민담으로 발전시켜 승려들이 사실(史實)로 기록한 것이다 - 사재동.
(5) 표기법 상 광종(光宗)~충렬왕(忠烈王) 사이(9C~12C)의 작품이다 - 송재주.
(6) 「서동설화」의 주인공은 익산 미륵사 주변의 무강왕전설(武康王傳說)의 무강으로 사찰 연기설화로 보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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