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잘 하겠제, 그쟈?"
사위가 신문 기자지만 뉴스에 통 관심 없는 장모님도 발어사(發語辭)처럼 롯데 소식을 물어오는 곳, 네! 이곳은 '야구 도시' 부산입니다.
[부산일보 권상국 기자] 허영만 화백은 '식객'에서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식이조절을 해나가는 보디빌더를 '도시의 수도승'이라고 불렀습니다.취재를 위해 사직야구장을 찾으면 '식객'의 그 에피소드가 떠오르는 건 웃음기 빠진 얼굴로 훈련에 집중하는 손아섭이 '그라운드의 수도승'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운데 가르마를 탄 머리가 반응이 좋다"며 인사를 건네자 보기 힘든 웃음을 지어 보입니다. "짧은 머리를 계속했더니 강해 보이기만 한다고 해서 인상을 부드럽게 바꿔보고 싶었거든요."
'부드러운 인상을 갖고 싶다'는 말과는 달리 손아섭의 타격 페이스는 범상치 않습니다. 지난 3월과 4월에는 타율 0.276에 그치며 부진했지만 5월 0.356으로 반등에 성공했습니다.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손아섭 타율 걱정'이라는 부산 팬들의 우스갯소리가 틀리지는 않은 게지요.
6월에는 0.388로 쾌조의 컨디션을 뽐낸 뒤 7월 0.311로 다소 주춤하다 이달 들어 다시 0.339의 불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습니다.
후반기면 달아오르는 특유의 페이스에 대해서는 손아섭 본인도 의아해합니다. 체질이 땀이 많고 여름에는 금방 몸이 처지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랍니다. 워낙 많은 경기를 뛰니까 하체 피로도도 누적이 되어 있고요.
"성적은 늘 여름이 괜찮더라고요. 후반기 성적이 전반기보다 좋은 건 저도 아이러니하게 여기는 부분이에요. 매년 겪으면서 노하우는 생겼는데…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고 누가 대신해주지도 않는 거잖아요? 결국은 내가 이겨내야 하는 시련이란 결론이 나오죠." 여름이면 체력적으로 다른 선수들보다 더 힘들어서 훈련량을 조절하며 신경을 더 쓴다는 손아섭입니다.
25일 현재 118경기에 출전한 손아섭의 안타 수는 161개입니다. 두산 베어스의 김재환(159개)을 2개 차로 따돌리고 리그 선두에 나섰습니다. 남은 경기 수와 페이스를 고려하면 200안타도 사정권입니다. 2014년 넥센 히어로즈의 서건창 이전과 이후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게 200안타 고지 아닙니까.
일단 타이틀 욕심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롯데 프런트마저 '손아섭은 인터뷰마저 한결같다'며 웃음 짓지 않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손사래를 칩니다. "타격왕이나 최다 안타왕이나 타이틀을 일단 의식하게 되면 스윙 메커니즘과 밸런스가 흐트러져요."
그건 왜일까요? 안타 욕심과 볼넷과의 양립되지 않는 관계 때문입니다. "어쨌든 안타를 치기 위해서는 포볼로 나가면 안 되거든요.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안타 욕심이 나면 타석에서 나쁜 볼에 방망이가 나가게 됩니다."
이미 2012년과 2013년 최다 안타를 기록했던 손아섭인지라 타이틀 욕심이 불러오는 악영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바로 '평정심'입니다. "200안타에 대한 생각은 지우고 어떻게든 출루한다는 생각부터 해요. 평정심을 잘 유지한 뒤 시즌이 끝나고 나서 돌아보면 충분히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믿는 겁니다."
타석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방법은 '최대한 사고를 단순하게 가져가는 것'이라는 게 손아섭의 설명입니다. "일단은 한 가지 생각만 하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 타이밍 싸움에서 불리해지기 때문이죠."
타석에 들어설 때 가지는 생각은 그때그때 다르지만 보통 2~3가지 정도라고 합니다. '힘을 빼자' '타구를 어디로 보내자' 정도라고.
타석에서 방망이를 마주 보는 행동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그만의 의식이다. "방망이를 단순히 보는 게 아니라 대화를 나누는 겁니다. '이번 타석에서 해결하게 해주세요' '이번에도 안타 치게 해주세요' 이런 거로요. 이제는 하지 않으면 되레 어색해져요." 마음가짐이 만들어낸 작은 차이가 쌓이고 쌓여 이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교타자를 탄생시킨 셈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타석에 들어설 때까지 손아섭의 신경은 곧장 경기를 뛸 수 있는 몸을 유지하는 데 맞춰져 있다네요. "200안타가 탐이 난다 해도 결국 그것도 경기를 뛰어야 이룰 수 있는 거잖아요. 우리 팀도 어떻게든 가을야구를 가야 하는 실정입니다. 모든 건 내가 경기를 뛸 수 있는 몸이 돼야 가능한 거지요."
'절제된 생활에 가끔은 어떤 선물을 하느냐'는 질문에도 손아섭의 절제된 생활에 대한 예찬은 이어집니다. "사실 제가 완벽주의자거든요. 방망이를 닦는 것에서부터 스트레칭 시간, 마사지 시간까지 시합 전에 생각했던 대로 다 해놓고 성적이 안 나오면 후회가 없어요.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오늘 힘들다고 준비를 소홀히 해서 부상이 오면 스스로가 너무 원망스러울 거 같아요. 최대한 후회를 남기기가 싫은 거죠. 시즌이 끝나면 대신 많은 휴식을 줘요. 대신 그만큼 시즌 중에는 내 몸을 강하게 몰아붙이는 거죠."
이쯤 되면 기자가 손아섭의 모습에서 수도승을 떠올리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습니까? 손쉬운 약물의 유혹을 떨치고 오로지 평정심 하나로 리그 톱 타자 반열에 오른 그에게서 이제는 장인의 향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탱크' 박정태 전 2군 감독에 이어 '롯데의 악바리' 계보를 이어나가는 손아섭은 올시즌 가을야구를 노리고 있는 롯데 자이언츠의 '첨병'입니다.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한 중심 타선에 파괴력을 더하기 위해서는 손아섭이 투수와 끈질긴 승부를 펼쳐줘야 하니까요.
"우리 팀이 4년 동안 포스트시즌을 못 갔잖아요. 매번 TV로 경기를 보다 한 번은 제가 야구장에 가봤어요. 가슴이 찡하더라고요. '내가 여기 있을 게 아니라 저기 있어야 하는데' 이런 생각 들어서요. 팬들과 가을에 야구를 할 수 있는 건 큰 행복입니다. 올해는 사직구장에서 가을 야구를 하고 싶은 생각이 그 어느 때 다 강합니다."
손아섭은 24일 '운명의 사직 4연전' 첫 경기인 LG전에서 5타수 3안타 3타점 2도루의 원맨쇼를 선보였습니다. 8회말에는 큼직한 쓰리런으로 LG에 결정타를 날리기도 했지요.
남은 3경기의 결과에 올해 가을행 티켓의 향배가 가려질 듯합니다. 월요일 아침 조간신문에서 다시 한 번 손아섭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