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탄생의 배경

월드컵의 시작

월드컵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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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월드컵은 올림픽 이상의 인기를 누리는 세계 최고의 스포츠 축제이자 단일 종목 최대 규모의 세계선수권대회로서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수많은 각본 없는 드라마와 인간 승리의 주인공들을 탄생시켜 온 월드컵은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즉 1930년에 그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월드컵의 시작이 생각만큼 순조로웠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 모든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월드컵의 장대한 역사를 출발시킨 인물은 바로 프랑스 출신의 피파 3대 회장 줄 리메(Jules Rimet)였다.

1 최초의 구상은 1905년에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대회의 포스터

축구가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로 규칙이 정비되고, 영국으로부터 유럽 및 남미로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후반이었다. 그 후 19세기 말미에 이르러서는 각 나라들간의 국제 시합이 점차 보편화되었음은 물론, 올림픽에서도 1900년 대회부터 3회 연속 시범 종목으로 채택되며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각국의 축구협회를 리드할 수 있는 대표 조직의 필요성이 이곳저곳에서 제기됐다. 당시 잉글랜드의 축구협회인 ‘The FA’는 이러한 조직 창설에 소극적이었던 반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결국 1904년, 프랑스의 주도 하에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덴마크, 스웨덴, 스페인까지 총 7개국이 국제축구연맹 피파(FIFA)를 창립, 본부는 스위스 취리히에 두고 초대 회장직은 프랑스 출신의 로베르 게랑에게 맡겼다.

피파는 창립 직후 세계축구선수권대회 개최에 열의를 나타냈다. 이러한 노력은 1905년 들어 곧바로 실행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는데, 게랑 회장은 파리에서의 총회를 통해 유럽 15개국을 참가시켜 제1회 세계선수권대회를 스위스에서 개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는 15개국을 4개 조로 나누어 조별리그를 치르게 한 뒤 각 조 1위 팀이 준결승 및 결승전으로 올라간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대회는 계획처럼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유럽 각국의 축구 규칙이 완전히 통일되어 있지 않았고, 교통수단 역시 미흡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또한 잉글랜드를 비롯한 영국 4개국을 제외하면 축구협회가 대표기관으로서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나라도 그 숫자가 극히 적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세계선수권대회를 치르기 위해 체계적으로 대표팀을 운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피파의 계획은 백지화됐고, 게랑 회장은 그 책임을 짊어지고 자진 사퇴를 발표해야 했다. 이러한 피파의 실패는 종주국 영국이 “세계 축구가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더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피파에 가입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이에 1906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가 모두 피파에 가입하여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2대 회장직 역시 잉글랜드 출신의 다니엘 울펄에게로 넘어갔다.

2 영국인 회장 울펄의 활약

줄 리메는 국제축구연맹 피파의 제3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흔히 월드컵은 줄 리메라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구상되고, 그 후 또 다시 줄 리메라는 사람에 의해 현실화된 대회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피파는 이미 1905년에 월드컵 창설을 시도했던 전력을 갖고 있었고, 한 차례 실패 후에는 월드컵 개최를 위한 기틀 마련에 점진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피파 2대 회장 다니엘 울펄은 12년의 재임 기간 동안 위와 같은 공헌을 세운 ‘숨은 공로자’와 같은 인물이다. 울펄을 비롯한 영국인들은 게랑이 왜 월드컵 개최에 실패했는지, 더 나아가 문제 해결을 위해 어느 곳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를 매우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울펄이 피파 회장 취임 직후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부분도 바로 ‘축구 규칙의 통일 및 재정비’였다.

피파는 울펄 회장의 주도하에 유럽 각국의 규칙을 영국 기준으로 통일시키기 시작했다. 또한 울펄 회장은 축구를 1908년 런던 올림픽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시키는 한편,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의 협상을 통해 올림픽 축구대회가 피파의 주관 하에 진행되도록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후 올림픽은 아마추어라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긴 했지만, 역대 최초의 세계축구선수권대회로서 그 시작을 알리게 된다.

더 나아가 울펄 회장은 피파의 영향력을 유럽 바깥으로 넓히기 위해서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피파는 1910년에 남아공을, 1912년에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1913년에 미국을 가입시킴으로써 진정한 세계축구연맹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러한 울펄 회장의 지속적은 노력은 고대하던 월드컵 축구 대회의 개최로 이어질 뻔했지만, 이 계획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지속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잠시 보류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울펄 회장은 1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1918년 10월)에 건강 악화로 숨을 거뒀다.

울펄 회장의 사망과 함께 피파의 월드컵 개최 계획이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음은 당연했다. 또한 총칼을 겨누고 전쟁을 치르던 연합국(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과 패전국(독일, 오스트리아 등)은 서로 국제 경기를 치르는 것에 강한 반발심을 나타냈다.

특히 패전국과의 국제 경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국가는 다름 아닌 영국이었다. 영국인들은 축구라는 신성한 스포츠를 패전국과 함께 하는 것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피파는 이를 무시하고 연합국-패전국 간의 국제 시합을 주도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영국의 4개 축구협회는 1920년에 일제히 피파로부터 탈퇴하는 ‘초강수’를 뒀다.

영국의 탈퇴로 인해 피파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어만 갔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3대 회장으로 취임한 프랑스 출신의 줄 리메는 울펄의 뜻을 이어받아 월드컵 개최에 다시금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3 올림픽에서 월드컵으로

피파는 20세기 초 당시 세계 최강의 영향력을 발휘하던 영국의 도움 없이 진정한 국제축구연맹으로 기능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줄 리메는 프로와 아마추어를 총망라한 세계축구선수권대회의 필요성을 꾸준히 역설했음에도 불구,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했다.

무엇보다 영국을 대표하는 잉글랜드와 다른 유럽 국가들 사이의 실력 차가 너무 컸고, 유럽과 다른 대륙들 사이의 실력 차도 마찬가지로 컸다. 굳이 월드컵을 통해 진정한 세계 최고를 가릴 필요가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은 위와 같은 사람들의 생각에 변화를 가져다주기 시작한다. 당시 유럽 국가들은 남미 국가들의 축구 수준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었고, 유럽과 남미 사이에 좁힐 수 없는 커다란 장벽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미의 우루과이가 프랑스, 네덜란드, 스위스를 연파하고 당당히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는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결승에서 격돌, 남미 국가들간의 금메달 쟁탈전이 벌어졌다. 재경기까지 가는 혈투 끝에 아르헨티나를 물리치고 올림픽 2연패에 성공한 우루과이는 마침내 유럽 사람들로부터 ‘마법사들의 팀’이란 애칭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유럽은 더 이상 남미 축구의 발전 속도를 무조건적으로 간과할 수 없었다.

제1회 월드컵 대회 대부분의 경기가 열린 몬테비데오 경기장

그럼에도 아마추어 대회인 올림픽 축구에 소극적이었던 잉글랜드는 “프로 선수들을 참가시킨다면 남미는 당연히 유럽의 상대가 될 수 없다.”며 남미 축구의 강력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줄 리메 회장은 이를 놓칠 수 없는 기회로 간주하고 올림픽 직후 암스테르담에서 피파 총회를 열었다.

줄 리메의 주장은 “프로 선수들까지 총동원하여 유럽과 남미의 힘을 제대로 겨뤄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정한 세계축구선수권대회인 월드컵의 개최가 필요하다”였다.

또한 같은 시기 IOC는 다음 대회인 1932년 LA 올림픽의 정식 종목에서 축구를 제외시키겠다는 방침을 피파 측에 통보했다. 이미 IOC는 피파와 아마추어 선수를 구분하는 기준 및 휴업 보상제도 등의 문제를 놓고 갈등을 겪어 오던 차였다.

뿐만 아니라 IOC와 LA 올림픽 조직위원회 측은 야구와 미식축구가 성행하는 미국에서 축구로는 별다른 흥행이나 수익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로 인해 올림픽 역사상 유일무이한 축구의 정식종목 제외 사태가 발생하고 만 것이다.

줄 리메와 그를 지지하던 전 세계 축구인들은 더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1928년, 피파는 제1회 월드컵을 2년 뒤인 1930년에, 그리고 다음 대회를 4년마다 한 번씩 개최할 것을 찬성 25, 반대 5로 가결했다. 또한 1930년 제1회 월드컵을 20년대 올림픽 축구를 2연패한 남미의 우루과이에서 개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4 진정한 세계선수권대회로 거듭나기까지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월드컵이었지만 제1회 대회는 기대만큼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1924년에 재가입했던 영국이 1928년 들어 다시 한 번 피파를 탈퇴해 버렸고, 다른 유럽 국가들도 남미의 우루과이를 초대 월드컵 개최국으로 선정한 피파 측의 결정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루과이가 개최국으로 확정된 이후 유럽 국가들의 참가 신청서는 피파 측에 단 한 장도 도착하지 않았다. 이에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 국가들은 크게 분노했고, 심지어 유럽에서는 “피파의 도움 없이 유럽선수권대회를 따로 치르자”는 목소리까지 흘러나왔다. 줄 리메는 남미 측의 분노를 진정시키는 한편 유럽 국가들의 참여도를 높이기 위해 다시 한 번 두 발로 뛰어다녀야 했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이 초대 월드컵 참가에 난색을 표한 이유는 비단 자존심 때문만이 아니었다. 비행기 교통이 발달되어 있지 않던 20세기 초, 유럽 국가들이 남미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2주 이상의 부담스런 항해를 감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동 및 대회 기간을 포함하여 2개월 가까이 주축 선수들을 대표팀에 내줘야 하는 유럽 각국의 클럽들도 거세게 반발했음은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줄 리메는 유럽 국가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고, 그 결과 모국 프랑스와 유고, 벨기에, 루마니아까지 총 4개국을 초대 월드컵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단, 이들 4개국만으로는 당초 16개국으로 예정되어 있던 월드컵 출전국 머릿수를 모두 채울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초대 월드컵은 예선 없이 13개국만을 참가시키는 조촐한 형태로 치러졌다.

이 문제는 1회 대회 이후에도 30년대 내내 계속됐다. 유럽에서 열리는 1934년과 1938년 대회에 우루과이가 2연속으로 불참하고, 아르헨티나 역시 1934년 대회에 2진을 내보낸 뒤 1938년 대회에 불참하는 등 유럽과 남미간의 감정 다툼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이러던 월드컵이 마침내 진정한 세계선수권대회로 거듭나기 시작한 것은 제5회 1954년 스위스 대회에 이르러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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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일2010. 0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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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형석 축구 칼럼니스트

    글쓴이 이형석은 국내 최대 규모 해외축구 전문 사이트인 <사커라인>(www.soccerline.co.kr)의 칼럼니스트로 다 년간 활동해 왔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현대축구의 전술, 알고 봐야 제대로 보인다!]와 [한 권으로 씹.어.먹.는 월드컵] 등이 있으며, 그 밖에 <후추>, <베스트일레븐>, <스포츠온>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기고활동을 벌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