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계약 굳어진 리모델링 시장… “신용등급 AA-만 들어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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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용평가 신용등급 ‘AA-’ 이상만 시공사로 입찰하세요.”

리모델링 조합이 시공사 입찰 참가 자격으로 신용등급 ‘AA-’(회사채 기준) 이상을 내세우는 사례가 늘고 있다. 서울 강남구 대치2단지, 서울 용산구 이촌 강촌아파트, 이촌코오롱, 서울 서초구 잠원동아, 서울 성동구 금호벽산, 수원 영통구 신명동보, 영통구 신성신안쌍용진흥 등이 약속이나 한 듯 줄줄이 ‘AA-’ 기준을 내세웠다. 일각에서는 수의계약으로 시공사를 선정하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서울 용산구 이촌 강촌아파트 리모델링조합의 시공사선정 입찰공고문. 신용등급 ‘AA-’(회사채 기준) 등급 이상만 지원하도록 자격 제한을 뒀다. /독자 제공

18일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이 기준을 충족하는 국내 건설사는 4곳뿐이다. 삼성물산(시공능력평가 1위·AA+), 현대건설(2위·AA-), 현대엔지니어링(6위·AA-), DL이앤씨(8위·AA-)다. 시공능력평가 10위 안에 들어도 다른 건설사들은 ‘AA-’ 기준에 막혀 위 사업지에 입찰서류조차 내지 못한다. GS건설(3위·A+), 포스코건설(4위·A+), 대우건설(5위·A-), 롯데건설(7위·A+), HDC현대산업개발(9위·A+), SK에코플랜트(10위·A-) 등이다. 10위 이하 건설사들도 물론 마찬가지다.

신용등급이 높으면 저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어 금융비용이 감소하고, 전체 사업비를 줄이는 효과가 있다. 시공사 선정기준으로 삼을 만한 지표다. 그러나 신용등급으로 참가 자격을 아예 제한하면 조합 입장에선 손해가 될 수 있다. GS건설, 포스코건설 등 다른 건설사들이 신용등급의 이익을 상쇄할 만큼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조합이 신용등급 ‘AA-’ 이상을 조건으로 내세우는 이유로 수의계약을 꼽는다. 조합이 마음에 둔 시공사가 단독 지원할 수 있게끔 입찰 기준을 맞추고, 단독 입찰로 두 차례 유찰되면 자연스레 해당 시공사와 수의계약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AA-’ 기준을 내세운 단지들의 시공사 선정은 입찰 과정에서 모두 두 차례 연속 유찰됐다. 이들은 수의계약을 통해 시공사(또는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했다. 현대건설(이촌 강촌, 잠원동아, 신명동보), 삼성물산(이촌코오롱), DL이앤씨·현대엔지니어링 컨소시엄(신성신안쌍용진흥) 등이다.

물론 이런 시공사 선정방식이 불법은 아니다. 리모델링 시공자 선정기준에 따르면, 조합은 제한경쟁으로 입찰할 때 시공능력평가액, 신용평가등급, 해당 공사와 같은 종류의 공사실적을 기준으로 자격을 제한할 수 있다. 법 취지는 이외 다른 부당한 조건으로 자격을 제한하지 말라는 것인데, 리모델링 시장에서는 이 자격 기준이 수의계약으로 직행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최근 들어 리모델링 시장에서는 수의계약이 대세로 굳어가는 상황이기도 하다. 2019년 서울 서초구 잠원훼미리 사례를 끝으로 리모델링 수주전에선 건설사 간 표 경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건설사는 리모델링 사업의 수익이 재건축보다 적다고 판단해 타 건설사가 먼저 공을 들여놓은 사업장에 공격적으로 도전하지 않고 있다. 조합에서도 과열된 수주전으로 정부에 찍히며 사업 속도가 늦어지는 것보다 낫다며 수의계약을 선호하고 있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나타난 현상이지만, 건설업계에서는 수의계약이 정석으로 굳어질 경우 조합원 선택권을 막고 조합 집행부가 건설사와 ‘짬짜미’로 시공사를 선정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여러 기업이 입찰해 경쟁하는 게 조합 입장에서 최고의 사업조건을 찾는 방법 아니겠느냐”면서 “입찰도 못 하게 문호를 닫는 것은 리모델링 시장의 경쟁적 발전을 막는 행위이며, 이런 입찰이 굳어지다보면 ‘짬짜미’ 입찰도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동훈 리모델링협회 정책법규위원장(무한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은 “건설사들이 재건축 시공사 선정 때처럼 단가싸움을 경쟁적으로 하지 않고 안 될 것 같으면 적당히 빠져버리는 게 수의계약이 많은 원인으로 보인다”면서 “리모델링은 준공 사례가 많지 않아, 어느 정도가 적정 이익인지에 대한 데이터가 부족해 건설사들이 치열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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