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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두는 장면

바둑의 본디 말은 바독이다. 그 용례이다.

바회예 받 갈 저긘 바독imagefontimagefontimagefont노라[경암진혁기(耕巖進奕碁)] (『두시언해』 초 3 ; 6)
imagefont 비오니 imagefont히 바독 두미 됴토다[금일하우 정호하기(今日下雨 正好下碁)] (『박통사언해』 상 ; 2)

최남선은 ‘바둑’이 돌 · 방위 · 옥석 · 이정표 · 체스 따위를 가리키는 인도네시아말 ‘바투(batu)’에서 왔다고 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바둑을 위기(圍碁) 또는 혁기(奕碁)로 적었다.

바둑판과 돌그릇

우리는 바둑을 일찍부터 즐겼다. 7세기 전반의 『구당서』에 “고구려에서 다른 놀이와 함께 바둑을 즐긴다.”고 적혔고(권199 「고려전」), 『북사(北史)』에도 “고구려사람들은 여러 가지 놀이 가운데 특히 바둑을 가장 좋아한다.”는 기사가 있다(권94 「고구려전」). 백제도 마찬가지이다. 『수서』에 “백제에서 바둑을 즐겨 둔다.” 하였고(권81 「백제전」), 6세기 중반기의 『주서(周書)』에도 “백제에 투호(投壺) · 저포(樗蒲) 등의 잡희(雜戱)가 있으며, 그 가운데 혁기를 첫 손에 꼽는다.”는 내용이 보인다.

아닌게아니라, 백제 개로왕은 바둑을 지나치게 즐겼다. 21년(475) 거짓 죄를 짓고 온 고구려 중 도림의 바둑 꾐에 빠져 고구려의 침공에 손을 쓰지 못하였고, 결국 목숨까지 빼앗겼다. 이로써 백제는 도읍을 웅진(公州)으로 옮기고 말았다(『삼국사기』 권25 「백제 본기」).

신라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수준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효성왕 2년(738) 봄, 당에서 성덕왕의 부음을 듣고 조문사절을 보낼 때, 현종은 좌찬선대부 형숙(邢璹)에게 “…(전략) 신라사람들은 바둑을 잘 둔다니, 이에 능한 병조참군 양계응(楊季膺)을 부사로 데려가라.”한 것이다. 중국에서 바둑으로 이름을 떨친 이도 있었다. 당 희종(僖宗, 874~888)의 바둑 비서였던 박구(朴球)가 그 사람이다. 그가 돌아올 때 장교(張喬)는 전별시(「송기대조박구귀신라(送碁待詔朴球歸新羅)」)를 지어 찬양하였다.

바다 건너 저 나라에 그대 적수 뉘 있으리.
고향이라 기쁘지만 바둑 수는 외로우리.
궁중의 임 모신 자리에 새로운 형세 전할 것이
뱃전의 판을 대하여도 옛날 기보 엎어 놓으리라.

고려에서는 바둑 잘 두는 이를 오늘날처럼 국수(國手)라 불렀다. 바둑으로 불행을 스스로 부른 일이 또 있었다. 거란 침입 때의 전선 사령관 강조(康兆 ?~1010)가 통주성 사령부에서 바둑을 두다가 때를 놓쳐 목숨을 잃은 것이다. 부하가 적의 급습을 여러 번 알렸으나, 바둑판에서 주춤거리다가 사로잡히고 말았다. 적장이 결박을 풀며 “내 신하가 되겠느냐?” 묻자, “고려사람인 내가 어찌 다시 너의 신하가 되겠는가?” 하였고, 살을 저미며 다시 물어도 마찬가지였다(『고려사』 권127 「열전」 권제40 강조).

고려의 바둑 수준도 뛰어났다. 13세기 중엽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곽희빈(郭希彬)과 낭장(郎將) 조정통(曺精通)이 원 황제의 부름을 받아 바둑 원정을 간 것이다(『고려사』 권28 세가 충렬왕 즉위년 6월 「곽희빈」).

우리는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17줄의 순장(巡將) 바둑을 두었다. 순장은 조선시대에 궁궐이나 도성 안팎의 야간 경계를 맡아 지휘하던 임시직 군관 이름으로, 순장이 순시하듯 차례대로 큰 곳에 두는 바둑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우리 고유의 바둑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초기에는 17줄 바둑판을 썼다. 오늘날에도 시킴이나 티베트의 것은 17줄이며, 시킴에서는 흑백 각기 6개를 미리 놓고 둔다. 따라서 기술적인 면에서 보면 우리 수준이 매우 낮았던 셈이다.

순장바둑판 처럼 흑 1에서 백 4까지의 대각선에 이른바, 화점포석(花點布石)을 하는 것은 재래의 중국식 그대로지만, 우리는 이에서 그치지 않고 흑 5이하 17까지 고정시킨 다음, 백부터 자유롭게 두는 방법을 찾았다. 곧, 흑 5부터 백 12까지 순서에 따라 큰 곳을 차지하는 수법에, 흑 13부터 백 16까지 적진을 유린하는 공격 수법을 더 한 것이다. 그러나 먼저 각기 8점씩 모두 16점을 일정한 곳에 놓는 까닭에, 변화가 적고 포석이 고정되어 묘미가 떨어지는 것이 결점이다.

순장바둑판

이것이 ‘조선바둑’으로, 화점바둑이라는 별명은 돌을 바둑판 꽃무늬에 놓는 데에서 왔다. 숙종 때 동지사를 따라 북경에 갔던 김창업(金昌業)은 “…(중략)… 방안에 바둑판이 있기에 주인과 두어보니 우리 방식과 같았으나, 다만 초두에 배자(排子)가 없는 것이 달랐다.”고 적었다(『노가재연행록』). 당시에도 순장바둑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꽃 모양이 아닌 좁쌀 크기의 흑점을 화점이라 부르지만, 순장 바둑에서는 이름 그대로 큰 꽃무늬를 놓았다. 이것은 백제 의자왕이 일본에 보낸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판과 12세기의 도요지(전라북도 부안군)에서 나온 청자바둑판에도 보인다. 그리고 1896년에 컬린이 낸 『한국의 놀이』에도 들어있다. 판은 가로 세로 17줄에, 289칸으로 이루어졌고, 흑백의 돌이 150개씩인 점도 일치한다.

오늘날의 바둑은 잡은 돌을 합산할 때 남의 집에 메우지만, 순장바둑에서는 모두 되돌려준다. 그리고 마지막 경계선의 돌을 빼고 안의 것만 들어낸 뒤, 집 수를 헤아려서 승패를 가린다.

바둑을 즐기는 노인들

의자왕이 선물한 일본 정창원(正倉院)의 목화자단기국은 판 양쪽에 돌을 넣는 서랍이 달렸으며, 한 쪽을 빼면 건너 쪽도 열린다(목화자단기국 이미지 참조). 정창원에는 의자왕이 보낸 홍아(紅牙) 및 감아(紺牙)의 바둑돌 한 벌과 흑 백 바둑돌 한 벌 등 모두 600개의 알도 있다. 특히 새 그림을 상감하고(홍아 및 감아 바둑돌 이미지 참조) 바둑판에 화점을 찍은 것으로 미루어, 돌과 판이 함께 건너간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에서 건너간 바둑판으로 꽃무늬를 그렸다.
목화자단기국의 표면으로 돌자리가 바둑판과 돌그릇하고 같다.
목화자단기국의 모서리에 놓아 꾸민 아름다운 무늬들
백제에서 건너간 홍아와 감아 바둑돌
백제에서 보낸 바둑돌

이 바둑알에 대한 『조선미술사』의 설명이다.

고구려와 신라의 뼈 피리와 백제 장기 쪽은 당시 뼈 공예 발전 수준을 보여준다. 백제 바둑 알은 지금 일본에 남아 있다. 크기는 직경 1.5센티미터, 두께 0.7센티미터쯤으로, 상아에 빨간색과 곤색 물을 들여 만들었는데 무늬를 파내어 그 바탕의 흰색이 살아나게 하는 기법(발루법)을 씀으로써 그 색채적 효과를 살렸다. 그리고 빨간색 바탕의 알에는 흰색과 녹색으로, 곤색 바탕 장기 쪽에는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꽃을 입에 물고 날아가는 새 무늬를 놓아 장식하였다.

이 가운데 ‘장기 쪽’은 ‘바둑돌’의 잘못이다.

현재의 일본 바둑돌은 361개로, 의자왕이 보냈다는 300개를 쓰려면 17줄의 바둑판이라야 한다. 순장바둑은 17점을 미리 깔고 두는 까닭에, 250~260개로 충분히 한 판을 둘 수 있다. 더구나 17개의 화점은 순장바둑에만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 순장 바둑이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셈이다.

오늘날의 바둑은 20세기초에 일본인이 퍼뜨렸다. 이 때문에 흑백 8점씩, 16점을 차례대로 빙 둘러서 놓고 두는 전통이 사라지고, 처음부터 자유롭게 두는 쪽으로 바뀌었으며, 순장바둑 또한 한국전쟁 이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중국 바둑은 하대 말(서기전 18세기쯤)에 나왔다고 한다. 가장 오랜 바둑돌은 1972년 북경 후영방(後英房)의 원대(元代) 유적에서 나왔다. 지름 1.45~1.8센티미터, 두께 0.32~0.35센티미터로, 모두 222개이다. 양면이 약간의 곡선을 이룬 평평한 형태이며, 이 중 붉은 것 121개는 홍색 마노(紅瑪瑙), 흰 것은 백색 마노(瑪瑙)로 만들었다(원대의 바둑돌 이미지 참조).

마노를 깎아 만든 원대의 바둑돌

가장 오랜 바둑판은 1953년 하북성 망도(望都)의 한대 무덤에서 나왔다. 서기 182년의 것으로, 한 변 길이 69센티미터, 높이 14센티미터이며, 특이하게도 가로 세로 17줄이다(17줄의 돌 바둑판 이미지 참조). 위의 감단순(邯鄲淳)이 『예경(藝經)』에 “종횡 각 17줄(道)에, 밭은 모두 289개이고, 흑백 돌이 각 150개라”고 쓴 것과 일치한다. 송대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에도 같은 내용이 있어, 옛적 바둑판이 오늘날과 달랐음을 알려준다.

17줄의 돌 바둑판

오늘날처럼 가로 세로 19줄에, 밭이 361개인 바둑판은 594년의 무덤에서 나온 청자 바둑판이다. 12세기 초의 『망우청락집(忘憂淸樂集)』에 19줄로 적힌 것으로 미루어, 이러한 변화는 7세기 이전에 일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수대의 백자 바둑판
앞의 것과 달리 가로 세로 19줄이다.

바둑은 당대 이후에 널리 퍼졌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기사이다.

바둑은 놀이 가운데 왕이다. …(중략)… 깊이 깊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 진(晉) 문공(文公)은 수담(手談), 왕단지(王担之)는 좌은(坐隱)이라 불렀다. 즐겨두는 사람 가운데 유아(幽雅)한 이가 많으며, 능숙한 사람을 국수(國手)라 한다(「거기부정(擧棋不定)」).

수담(手談)은 당의 왕적신(王積薪) 고사에서 나왔다. 당 설요약(薛用弱)이 쓴 『집이기(集異記)』 내용이다.

현종의 몽진을 따라 사천에 간 그는 어떤 집에서 자다가, 어둠 속에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수담을 두자고 권하는 소리를 들었다. 두 사람은 말로 삼(三)의 4, 또는 오(五)의 7 하면서 각기 머리 속의 바둑판에 두었다. 자신의 수가 훨씬 모자라는 것을 안 그는, 바둑을 가르쳐 달라고 애걸한 끝에 비전(秘傳)을 받았다. 이튿날 아침 인사를 하고 수 십 걸음 떼자마자, 그 집이 보이지 않았다. 이때부터 아무도 적신의 수를 못 이겼다.

바둑의 기쁨을 귤 ‘가운데의 즐거움’이라 이르는 것은, 어떤 이가 귤을 반으로 자르자 그 안에서 두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더라는 데에서 나왔다. 속담 ‘란가(爛柯)’는 바둑의 신비성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깊은 산속에서 한 나무꾼이 바둑두는 동자를 만나 구경하는 중에, 하나가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그만 돌아가십시오.” 하였다. 정신이 들어 도끼를 들자 자루(柯)가 완전히 썩어(爛) 있었다. 놀라 집에 돌아왔더니, 수 백 년이 지난 뒤였다는 것이다.

『유양잡조(酉陽雜俎)』에도 닮은 이야기가 전한다.

진 태시(太始) 연간(265~274),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간 봉구(蓬球)가 향기를 따라 깊이 들어가자, 큰 궁전과 고루(高樓)가 가득 솟은 가운데, 아름다운 네 여인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봉구를 본 그네들은 놀라면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물었다. 향기를 따라 왔다고 하자, 다시 바둑을 두었다. …(중략)… 갑자기 한 여자가 학을 타고 와 “어째서 속인을 불렀느냐? 왕모님이 오랍신다” 소리쳤다. 놀란 봉구가 문을 나오자마자 궁전이 사라졌다. 집에 돌아온 것이 건평(建平) 연간(399~405)으로, 집도 마을도 보이지 않았다(권2).

바둑으로 패가망신한 사람도 있다.

관직에서 물러난 독동장군(督同將軍) 양공(梁公)은 …(중략)… 중양절 산에 올라 한 서생과 바둑을 두었다. 판세가 기울자 안절부절 못하던 서생은, 양공에게 절을 하며 “제발 저를 살려 주십시오.” 빌었다. 양공의 마부 마성(馬成)은 저승사자 구실로 열 댓새에 한 번씩 지옥에 드나들었다. 마성을 불렀으나 죽어 사흘이 지난 뒤였다. 이 사이에 서생이 갑자기 땅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귀신이었던 것이다. 다시 깨어난 마성은 “서생이 바둑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재산을 들어 먹었고, 부친도 화병으로 죽었습니다. 괘씸히 여긴 염라대왕이 수명을 줄여서 지옥에 넣은지 17년째입니다. 마침 동악신(東嶽神)이 태산봉루(泰山鳳樓) 낙성을 위한 비기(碑記)를 지을 선비들을 모으자, 염라대왕이 속죄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중도에 바둑을 오래 둔 까닭에, 시간이 지나 다시 가두었습니다. 이제는 환생할 가망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양공은 “취미가 사람을 죽였구나.” 깊이 탄식하였다(『료재지이(聊齋志異)』 「기귀(棋鬼)」).

황제도 바둑에 지는 것을 싫어하였다. 『유양잡조』의 내용이다.

현종(玄宗)이 친왕과 바국을 둘 때 …(중략)… 귀비가 앞에서 구경하였다. 황제가 밀리자, 귀비는 강국(康國, 사마르칸트)의 작은 개를 풀어 놓았다. 개가 바둑판 위로 올라가 돌을 흐트러트리자 황제는 기뻐하였다. (하략)…

바둑 수에 관한 고사이다.

당 선종(宣宗)은 바둑 잘 두는 일본 왕자와 고사언(顧師言)을 맞붙였다. 33수에 이르러도 팽팽하자, 언사는 깊은 생각 끝에 돌을 놓았다. 이것이 한 수로, 두 세 수를 꺾는 진신두(鎭神頭)였다. 눈을 크게 뜬 왕자는 팔을 옴추리고 말았다(『태평광기(太平廣記)』 권228).

바둑의 수는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사조제도 『오잡조』에 “지금의 기보는 대소철망(大小鐵網) · 권렴변(捲簾邊) · 금정란(金井欄) 등 모두 백을 헤아린다.”고 적었다(권 6 「인부」 2).

당 여인이 바둑을 두는 그림(높이 63, 너비 54.3센티미터)

일본 바둑은 한국에서 들어갔다. 마스가와 고우이치(增川宏一)의 설명이다.

쇼무천황(聖武天皇, 724~749)이 애용한 바둑판과 조선 바둑판은 같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정창원의 바둑판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8세기 초에서 중반기에 고대 일본에서 고대 조선과 같은 형식의 바둑판을 썼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둑판도 조선으로부터 들어온 것인지, 또는 조선에서 온 도래인(渡來人)이 전한 것인지를 추정하는 데에 큰 근거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바둑은 일본에 매우 오래 전에 퍼졌으리라 생각된다. 조선에서는 이미 5세기 중반기에 성행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바둑판[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은 옆면에 낙타 따위의 동물과 인물 그리고 문양이 상감되었으며, 바둑알을 넣는 설합의 한 쪽을 빼면 상대 쪽도 열리도록 꾸민 당시 최고의 미술 공예품의 하나로서 오랫동안 관상(觀賞)의 대상이 되었다(목화자단기국 이미지 참조). 정창원에 소장된 바둑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흑백이 아닌 홍(紅)과 감(紺)의 상아제로, 양쪽 모두 표면에 봉황이나 학이 솔가지를 물고 있는 모습을 새긴 것이다(홍아 및 감아 바둑돌 이미지 참조).

또 이 돌들이 모두 300개인 사실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앞에서 든 것과 또 다른 정창원 소장품[상목목화기국(桑木木畵碁局)]처럼 바둑판이 가로 세로 19줄로 구성되었다면 61개나 모자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마스가와 고우이치는 “정창원 소장의 바둑판은 실질적으로 가로 세로 17줄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돌의 수는 시대가 내려올수록 점점 늘어났다.”고 하였다. 또 그는 목화자단기국에 놓인 17개의 꽃점에 대해 와타나베 에이오(渡辺英夫)의 『중국고기보산보(中國古棋譜散步)』를 들며 “조선에서는 처음부터 돌을 놓고 둔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종래 일본에서는 이 점에 대해 복점설(卜占說), 점성설(占星說) 등 여러 가지 견해가 떠돌았던 것이다.

한편, 그는 스튜어트 컬린이 소개한 우리 바둑판의 꽃점의 위치와 숫자가 일치하는 점을 들고 나서 정창원 소장품에 대해

1) 가로 세로 19줄이지만 실제로 쓴 것은 17줄이 아니었을까?
2) 처음에 서로 17개씩 놓고 그 뒤부터 시작하지 않았을까?
3) 조선의 규칙을 따른 것일까?

하는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하야시 유타카(林裕)도 “바둑을 735년에 견당사(遣唐使) 기비노 마끼비吉(備眞備)가 들여왔다는 설은 명백한 잘못이다. 그 이전, 아마도 6세기 중반 조선을 거쳐 불교가 들어올 때 여러 가지 문물과 함께 들어왔다고 생각된다.”며 『만엽집(萬葉集)』에 실린 기사(碁師)의 노래 두 수를 그 증거로 들었다.

바둑을 즐기는 모습

일본 바둑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은 7세기 초에 나온 『수서』에 있다. “왜인은 기박(棊博) · 악삭(握槊) · 저포(樗蒲)를 즐긴다.”는 내용이다(「왜국전」). 일본의 한문시집 『회풍조(懷風藻)』에도 “속성(俗姓)이 진씨(秦氏)인 변정법사(弁正法師)는 성격이 쾌활하고 말도 잘 하였다. 어린 적에 출가하여 노자와 장자를 잘 알았다. 대보(大寶) 연간(701~703)에 당으로 유학을 가서 왕자 이융기(李隆基)와 바둑을 잘 두어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쓰였다.

진씨가 4세기말에서 5세기 초, 가야에서 건너간 사람인 점에 대해서는 일본에도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길게 설명할 것이 없다. 당시 일본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진씨의 연구(秦氏の硏究)』 저자가 한 단원의 이름을 ‘일본 안의 조선인 왕국 「진왕국」’이라고 붙인 것만 보더라도 이 사실이 충분히 짐작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12개소의 신사에서 진씨네 지도자였던 진하승(秦河勝)을 신으로 받들고 있는 점도 기억해둘 일이다.

또 『일본서기』 22권에 “백제에서 낙타 등의 동물을 보내 왔다.”는 기록이 있다. 낙타는 본디 일본에 없는 것으로, 티베트에서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간 바둑의 전파 경로를 알리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초기 바둑판의 화점은 모두 아홉 개로 처음에는 백제식의 순장바둑을 두다가 당과의 교류에 따라 16점 배석에서 8점으로 바뀌고, 이것이 16세기에 이르러 현대 일본 바둑의 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나라시대에는 궁정에서도 바둑을 즐겨 두었다. 『속일본기』 738년조에 궁에서 바둑을 두던 사람이 말다툼 끝에 상대를 칼로 찔렀다는 기사가 있다. 8세기 후반부터 바둑에 관한 기록이 점차 나오고, 9세기 중반에는 천황이 대신들을 모아 바둑대회를 열기도 하였다. 701년에 나온 『대보령(大寶令)』 「승니령(僧尼令)」에서도 “승니가 음악과 박희를 즐기면 백 일의 고역(苦役)에 처한다. 그러나 기금(碁琴)은 예외”라 하여, 바둑을 우대하였다. 이어 11세기에는 귀족뿐 아니라, 여유를 누리는 계층 사람들도 큰 관심을 가졌다.

중세에는 무사들 사이에 퍼졌으며, 궁정에 딸린 여관(女官)이나 여승(僧尼) 그리고 공가의 여성들도 즐겨 두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혼인보(本因坊)의 주승인 일해(日海)에 사사하며, 그를 명인이라 불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그에게 녹을 주는 한편, 기소(棋所)를 설치하고 책임을 맡겼다. 이로써 그는 종가본인방(宗家本因坊)의 시조가 되었다. 이밖에 이노우에(井上) · 안떼이(安井) · 하야시(林) 등의 가원(家院)이 생겨나 막부의 보호 아래 번영을 누렸다. 이들 네 집은 한 해 한 번, 대회를 열어 전국 바둑 팬에게 소정의 면장을 주었으며, 1758년의 전국 유단자는 990명이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중엽 사이에 중국이나 한국의 호선치석제(互先置石制)에서, 첫 수부터 마음대로 놓는 자유기법으로 바뀌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흑백 두 개씩 대각선의 별 자리에 놓는 중국이나, 여덟 개씩 열 여섯 개를 놓는 한국 방식을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정석과 포석이 생기고, 묘미 또한 더욱 깊어졌다. 오늘날에는 중국과 한국에서도 이를 따른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바둑은 상인이나 일반인도 즐겼으며, 무사 · 호상 · 부농도 대회를 여는 한편, 후원자 구실도 하였다. 바둑으로 생계를 잇는 직업적인 바둑꾼이 등장한 것도 특징의 하나이다. 19세기 후반에 바둑 가계가 쇠퇴하면서, 고단자들이 재계의 도움을 얻어 방원사(方圓社)를 조직, 새로운 급위제(級位制)를 실시하였고, 1924년에 일본 기원이 창립되었다.

1979년부터 바둑 올림픽이라고 할 아마추어 선수권대회가 열린다. 바둑이 동양뿐 아니라, 세계적인 오락으로 등장한 것이다. 1982년의 전 세계의 바둑 인구는 2천만 명으로, 일본 천만, 중국 5백만, 한국 3백 5십만, 대만 60만, 미국 8만, 서부 독일 3만, 브라질 2만, 유고슬라비아 · 영국 · 네덜란드 · 프랑스 · 러시아 · 홍콩 등이 각 1만 명이었다.

중국에서 시작된 바둑의 한 줄기는 인도 문화권으로, 다른 줄기는 우리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갔다. 중국의 초기 바둑에는 배석이 없었으나, 한국과 일본에서 생겨나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다. 한편, 중국에서는 6세기 말 이전에 19줄 바둑이 나왔음에도, 우리는 근래까지 거의 가로 세로가 각 17줄인 이른바, 순장바둑을 즐겨왔다.

한편, 바둑이 인도에서 시작되어 티베트로 들어가 신장(神將)바둑으로 바뀌었고, 이것이 불교와 함께 백제에 들어와 순장바둑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우리가 일본에 전한 것도 순장바둑이었으며, 오늘날에도 티베트 · 네팔 · 부탄 등지에서 둔다.

우리 바둑을 받아들인 일본은 일찍부터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보호 육성 하였다. 특히 막부에서 명인 제도를 설립하고, 네 집안을 뽑아 재정을 돕는 동시에 특권을 주어서 발전을 도왔다. 그 결과 새로운 바둑이 창안되었으며, 오늘날에는 한 · 중 두 나라도 이를 따른다. 종주국의 바둑을 새롭게 재창조 하여, 세계를 제패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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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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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철, 1990년, 「순장(順丈)바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신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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增川宏一, 1978년, 『盤上遊戱』, 法政大學出版局
增川宏一, 1987년, 『碁』, 法政大學出版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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