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억

南宮檍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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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말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며 언론인. 궁내부 별군직(別軍職), 칠곡부사(漆谷府使), 내부 토목국장(土木局長) 등을 역임하였고 독립협회에서 활약하였다. 양양군수(襄陽郡守), 대한협회장, 관동학회(關東學會) 회장 등을 지내고 배화학당 교사로 있으며 교과서를 편찬하고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한서 남궁억 기념관, 남궁억 모곡예배당
출생-사망 1863.12.27 ~ 1939.4.5
본관 함열
치만
한서
활동분야 독립운동, 교육, 언론
출생지 서울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77)
주요저서 《동사략》,《조선이야기》,《무궁화 동산》

1863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본관 함열(咸悅). 자 치만(致萬). 호 한서(翰西)이다. 부친은 중추부도사를 지낸 무관이었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3년에는 친구 아버지의 도움으로 영어학교인 동문학(同文學)에 1년간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1886년 내아문 부주사(內衙門 副主事)가 되어, 조선말 최초의 영어통역관이 되었으며 고종의 통역을 맡았다. 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趙民熙)를 수행하여 유럽으로 파견되었으나 청나라의 반대에 부딫혀 홍콩에 2년간 머물게 되었다. 홍콩에서 돌아와 1889년 궁내부 별군직(別軍職)에 임명되어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1893년 칠곡부사(漆谷府使)에 부임되어 동학군을 막아내어 조정의 신임을 받았다. 1895년 궁내부 토목국장(土木局長)이 되어 탑골공원을 축조하였다. 그 후 흥화학교(興化學校) 교사로 영어와 국사를 가르치고,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수석총무와 사법위원을 겸임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 관계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와 《황성신문(皇城新聞)》 사장이 되어 러시아일본의 한국분할설과 러·일협정을 공박하였다. 1905년 성주목사(星州牧使), 이듬해 양양군수(襄陽郡守)로 있으면서 양양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1907년 대한협회장이 되었다. 1908년 《교육월보》를 간행하고 관동학회(關東學會) 회장이 되었다. 10년부터 9년간 배화학당(培花學堂)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가정교육》 《신편언문체법(新編諺文體法)》 등 교과서를 지었으며, 1918년 강원 홍천(洪川)의 보리울[牟谷]에 교회와 학교를 건립, 무궁화 묘포(苗圃)를 조성하였다. 1933년 ‘무궁화와 한국역사사건’으로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1935년 병으로 석방된 후 고향에서 별세하였다. 저서로 《동사략(東史略)》, 《조선(朝鮮)이야기》, 《무궁화 동산》, 《기러기》, 《조선의 노래》 등이 있다.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남궁억 본문 이미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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