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개신교 집안서 맏딸로 태어나
YWCA서 남녀차별 철폐 앞장
김대중과 결혼하며 고난의 길
사회적 약자 향한 따뜻한 시선
마지막 10년, 평화 운동가의 삶
고인은 1922년 9월 서울에서 6남2녀의 넷째이자 맏딸로 태어났다. 일찍 개화한 부모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여서 고인은 모태에서부터 기독교 신앙 속에 자랐다. 기독교는 고인의 삶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고인을 든든하게 지켜준 정신적 지주가 됐다. 고인은 세브란스의학교를 나와 의사가 된 아버지를 따라 일곱살 무렵 충남 서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배움의 뜻을 이루지 못한 어머니의 지원 아래 고인은 어려서부터 향학열을 불태웠다.
서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고인은 1936년 서울로 올라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이화여고 전신)에 입학했다. 그 시절 고인은 반장을 도맡아 하며 솔선수범형 리더십을 보이기 시작했다. 해야 할 일이라는 판단이 서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자기 일처럼 알아서 함으로써 급우들의 신망을 받았다. 맡은 일을 다 하면서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고인의 성격은 이 시기에 뚜렷하게 나타났다. 1942년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 전신) 문과에 입학한 고인은 일제 강점 말기의 혼란 속에서 2년 만에 강제로 졸업한 뒤 충남 예산에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으로 일했다.
해방의 감격 속에 서울로 올라온 고인은 다시 배움의 길을 찾아 1946년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내내 고인은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와 함께 기독교청년학생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남녀평등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고인은 여학생들의 리더로서 여성의 권리를 찾는 일에 앞장섰고, 사범대 학도호국단 부단장을 맡기도 했다. 그 시절 고인은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난 독립적이고 활달한 행동 때문에 ‘다스’(das, 독일어 중성관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사회참여운동의 일환으로 연극 활동에 전념하기도 했다. 당시 고인은 민족주의 운동에 관심이 많았고 백범 김구를 존경했다고 훗날 밝혔다.
1950년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한 고인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아 피란길에 올랐다. 부산에서 피란 생활을 하면서 친구 김정례와 함께 대한여자청년단을 만들어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여성의 권익을 찾아주자는 취지의 운동이었다. 당시 여성들은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였지만 가부장제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하지만 이 단체가 전쟁 중의 군경원호 활동에 치중하는 것에 불만을 느끼고, 1952년 당시 여성계 지도자였던 황신덕·박순천·이태영과 함께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했다. 고인은 이 연구원의 상임간사를 맡아 여성들의 인권을 지키고 지위를 높이는 일에 몰두했다. 여성문제연구원은 뒤에 여성문제연구회로 이름을 바꾸어 꾸준히 활동을 계속했고, 고인은 초대 회장 황신덕에 이어 1964년부터 1971년까지 2대 회장을 맡았다. 여성문제연구원이 시작한 남녀차별 철폐운동은 1989년 가족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가족법 개정으로 여성은 남편이나 아들에 종속된 상태에서 벗어나 마침내 남성과 동등한 권리 주체가 됐다.
전쟁이 끝난 뒤 고인은 오래 꿈꾸었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54년부터 4년 동안 미국 테네시주 램버스대학과 스캐릿대학에서 사회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미국 감리교회의 장학금을 받았지만 생활비가 부족했던 고인은 방학 때면 공장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1958년 차별받는 흑인공동체 문제에 관한 현장연구로 석사학위를 받고 서른여섯에 귀국했다. 모교인 이화여대에서 사회학 강사 생활을 시작한 고인은 1958년 겨울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연합회 총무로 발탁됐다. 이 단체의 총무로 있던 4년 동안 고인은 전국의 와이더블유시에이 조직을 돌면서 여성 권리 쟁취를 위한 운동의 선봉에 섰다.
결혼과 동시에 고인에게는 길고 긴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 닥쳤다. 박정희 독재의 서슬 퍼런 탄압의 칼날은 유력 야당 정치인 김대중에게 집중됐고, 고인과 고인의 가족, 주변 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고인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혹독한 시련을 이겨냈고, 그 시련의 시간을 견디며 정치인의 아내를 넘어 남편과 함께 민주주의 투사로, 민주화운동의 ‘동역자’로 거듭났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뒤 국외 망명을 택한 김대중에게 몰래 쓴 편지에서 고인은 “한국을 대표해 더 강한 투쟁을 하라”고 독려했다. 고인은 남편에게 민주화 투쟁을 중단하고 안전한 길을 찾으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 있던 김대중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당하자 고인은 남편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백방으로 찾아다녔다. 남편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집에 돌아오기까지 6일의 시간은 죽음의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일생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다고 고인은 훗날 회고했다. 그 지옥의 시간을 거치며 민주주의에 대한 고인의 신념은 한층 더 단단해졌다.
유신체제의 종말 이후에도 고인과 고인의 가족이 지나야 할 환란의 터널은 끝이 나지 않았다.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는 한편에서는 광주 학살을 저지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고인의 남편과 가족, 민주화 인사들을 잡아들여 모진 고문 끝에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했다. 그때 큰아들 홍일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시멘트 바닥에 몸을 던졌다가 영구장애를 얻었고 끝내 파킨슨병의 악화로 고인보다 앞서 생을 마쳤다. 남편과 자식을 신군부의 마수에 빼앗긴 고인은 가택연금이 풀리기까지 1년 동안 몸이 말라 비틀어지는 것 같은 감시와 고립의 시간을 보냈다. 죽음보다 더한 괴로움 속에 자고 나면 머리카락이 한움큼씩 빠지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런 연옥의 시련 속에서 고인의 민주주의 신념은 오히려 커졌다. 남편이 사형선고를 받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고인은 남편에게 군부세력과 타협하라는 말을 끝내 하지 않았다. 1981년 대법원 확정판결을 앞두고 고인은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면회한 남편을 앞에 두고 이렇게 기도했다. “하느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어느 누구도 정치적인 이유로 억울하게 생명을 잃는 일이 없게 하시고 고난받는 우리 형제들의 그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이 땅에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도록 허락해주시옵소서.” 뒤에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나는 그때만큼 아내를 존경하는 눈으로 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2009년 8월 남편이 서거했을 때 고인은 서울시청 앞 노제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남편은 일생을 통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 남편이 추구해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 말은 고인의 지난 삶을 요약하는 말이기도 했다. 2009년 9월 고인은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동역자이자 동지로서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위해 남편이 해오던 일을 이어가는 데 남은 삶을 바치겠다는 각오였다. 고인은 이후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마지막 기력을 쏟아부었다. 2011년 12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때 방북해 조문했고, 2015년 8월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각계 인사들과 함께 다시 평양을 방문했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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