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아내 치료해 주세요”… 남편 통해 하나님의 치유 역사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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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은 목사의 ‘아스팔트에 핀 부흥의 꽃’ <7>
이경은 순복음진주초대교회 목사가 지난 6월 경기도 파주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 개최된 제24회 전국초교파권사금식기도대성회에서 기도를 인도하고 있다.

열정과 사랑이 배여 있던 첫 사역지 경남 사천 두량삼오교회를 떠났다. 광야에 선 우리 부부는 다시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교회를 개척하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1991년 10월 13일 진주에 있는 한 기도원에서 일단 발족식을 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하는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기도와 말씀 보는 일에만 전념하던 남편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치유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사람들이 기도원으로 찾아왔다. 중년의 남성이었다. “제발 제 아내를 치료해 주십시오. 부적을 10개 넘게 가진 불교 신자인데, 신경쇠약으로 죽기 일보 직전입니다.” “일단 이곳으로 모시고 오세요.”

부인을 데려왔는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신경이 매우 날카로운 상태였다. “어휴, 말도 마세요. 부적이 있는 곳에서 제 머리를 잡아당깁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살아요.” 남편 전태식 목사는 그 부인에게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선포했다. 짧은 말씀을 선포했을 뿐인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부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나, 마음이 홀가분해졌어요. 어둠이 물러갔어요. 마음이 평안해요.”

예수님을 영접한 그녀는 흑암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며 치유함을 받았다. “아내를 어둠에서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아하니 교회를 개척해야 하실 것 같은데, 감사의 뜻으로 예배 공간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교회로 쓰라며 경남 진주의 상가 2층을 임차해줬다.

갑작스레 우리는 그곳에서 교회 문을 열었다. 어떤 계획도 없었기에 막막하기만 했다. 남편과 나, 세 아이 외에는 성도가 한 명도 없었다. 당장 어떤 후원이나 보조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막막함에 두려움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인도해가셨다.

일단 교회 이름부터 지었다. 기도 중 남편은 사도행전 2장의 마가 다락방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성령을 받고 변화된 사람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됐다. 초대교회 성령의 역사를 땅끝까지 전하는 교회, 우리는 그런 교회를 소망했다.

“여보, 마가 다락방에서 일어난 거대한 성령의 불길을 대한민국에 일으키자. 진주 같은 신앙으로 초대교회를 꿈꾸며 순복음진주초대교회로 하자.” “너무 좋아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거룩한 성 예루살렘도 12개의 문이 진주로 돼 있잖아요.” 92년 3월, 진주 신안동 작은 건물 2층에서 이렇게 교회가 설립됐다.

1995년 2월 전태식 순복음서울진주초대교회 목사의 순복음영산신학원 졸업식에 함께한 이경은 목사.

초대교회 개척 멤버는 중학교 3학년 학생 2명이었다. 남편과 나는 이들을 어린 학생이 아니라 성도로 받들며 열심히 섬겼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한 명, 두 명 친구들을 전도해 오기 시작했다. 학교를 마치면 교회에 와서 밥을 먹고, 저녁 기도회를 열었다. 데려온 친구들에게 성령세례를 받게 했다. 학생들의 숫자가 많아지자 다른 장소를 찾아야 할 상황이 됐다. 학생들이 언제든지 교회에 와서 밥도 먹고 기도회도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해 5월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 근처로 예배당을 이전했다. 이전한 곳에서 본격적으로 전도를 시작하자 어린 학생들이 노숙자를 교회로 데려오기 시작했다. 개척 때부터 순복음진주초대교회는 새벽기도 대신 365일 저녁기도회를 하고 있다. 기도하고 싶은 사람들이 언제든지 교회를 찾을 수 있도록 교회 문도 24시간 개방해 놓았다.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던 거리 노숙자들에게 우리 교회는 최적의 장소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사람이 몇 있다. 한 사람은, 도대체 언제부터 깎지 않은 것인지 모를 정도로 손톱이 꼬불꼬불 기다랗게 자라나 말려있었는데, 대충 재어보니 15㎝가 넘었다. 옷도 사계절 단벌이었는데, 언제부터 입은 것인지 켜켜이 쌓인 때로 빳빳하게 굳어버린 상태였다. 저만치 있어도 악취가 심했다. 한 여성은 정신질환이 있어 떠도는 노숙자였다. 자기 말로는 영어 선생이었고 대학 시절 메이퀸까지 했다고 했다.

그 외에도 많은 노숙자가 교회를 찾았고 기꺼이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를 향해 더럽다며 싸우곤 했다. 더럽고 냄새가 나서 같이 잘 수 없다고 삿대질을 하며 싸웠다. 같은 죄인이면서 서로 죄가 무겁다며 삿대질하는 인간의 모습과 똑같았다. 그럴 때면 나는 말 없이 그들 사이에 들어가 누워 잠을 청했다. 한창 싸우다가도 내가 중간에 들어가 잠을 자면 싸움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그런 날이 수없이 반복됐다.

당시 나는 무슨 일이든 순교한다는 각오로 사역에 임했다. ‘오늘 이 일도 감당 못 하면서 내일 순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일본 부흥 집회 중 야쿠자를 만난 적이 있다. 작은 키에 왜소한 체구였다.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보스가 될 수 있습니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목을 내놓으면 됩니다.” 죽기를 각오한 사람은 누구도 이길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랬다. 나 역시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기 위해서는 그저 그런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 수 없었다. 교회를 위해서라면, 주의 일을 위해서라면 죽을 각오로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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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순종하려면 자기 생각·경험 버려야


신앙은 순종과 불순종의 싸움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이 싸움에서 순종함으로 이 땅에서 복 받을 뿐 아니라, 저 맹세한 땅에 들어가 영생의 복을 얻는 것이다. 이를 잘 알면서도 순종하기 어려운 이유는 앞서 두려움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 순종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자존심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아람 군대 장관 나아만은 큰 용사였으나 병이 있었다. 아람 왕은 나아만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이스라엘 왕에게 전갈을 보낸다. 그리고 말과 병거를 거느리고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간다. 그런데 엘리사는 어떻게 했는가.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왕하 5:10) 직접 나와 나아만 장군을 맞이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사자(使者)를 보내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말만 전한다. 당시 아람은 강대국이었고 나아만은 그 나라의 군대 장관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람 왕에게도 존귀한 자로 여김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이름 없는 예언자가 홀대하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나아만은 엘리사의 행동에 분하여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려 한다.(왕하 5:11~12) 그러자 그 종들은 나아만에게 나아와 엘리사의 말대로 할 것을 간곡히 권한다. 이때 나아만 장군은 자존심을 버리고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근다. 그러자 살이 어린아이의 살같이 깨끗하게 됐다.(왕하 5:13~14) 나아만은 순종과 불순종의 싸움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순종함으로 병을 치료받는 복을 받은 것이다.

순종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자기 생각과 경험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과 뜻을 내세워 힘든 세월을 산 인물이 바로 야곱이다. 하나님은 어머니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큰 자’ 즉 에서가 ‘어린 자’ 야곱을 섬길 것이라고 예언하셨다.(창 25:23) 그럼에도 야곱은 어떻게 했는가. 사냥에서 돌아와 심히 곤비한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산다.(창 25:29~34)

그뿐만이 아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말을 듣고, 죽기 전 장자 에서를 축복하려는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의 축복까지 빼앗는다.(창 27장) 야곱은 자기 생각을 내세워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순종하며 기다리지 않았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사랑하는 부모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형과는 원수가 돼 그를 피해 외삼촌 집으로 도망해야 했고 그곳에서 양을 치며 20년 동안을 섬겨야 했다.

그의 나이 130세에 이방 나라 왕 바로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한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손을 어긋나게 얹는다. 이에 장자 므낫세에게 오른손을 얹으라는 요셉에게 야곱은 말한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창 48:19)

그의 고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기다렸다면 그 역시 하나님께서 손을 어긋나게 얹게 하심으로 축복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생각대로 앞서 행했다가 기나긴 세월을 험악하게 보냈다는 깊은 회한과 깨달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반면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내세우지 않고 순종함으로 기적을 본 사람이 있다. 바로 베드로이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올라 말씀을 가르치신 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고 명하신다. 베드로는 어부다. 물고기 잡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 그가 밤이 맞도록 수고했어도 얻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같은 말씀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며 순종한다. 그렇게 했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는가. 고기가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고 두 배에 채우매 배가 잠기기까지 했다. 만약 베드로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내세웠다면 이런 역사를 볼 수 있었을까.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자기 생각을 버리고 순종했다.

이처럼 자기 생각과 경험을 버릴 때 우리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지식 경험 생각을 내세우면 말씀에 순종하기 어렵다. 우리는 혹여 내 생각과 경험에 맞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인내하며 순종함으로 그 열매를 거둬야 한다.

이경은 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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