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장기연체자에게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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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금융회사에 대출을 받으러 가면 가장 먼저 듣는 말이다. 이렇게 금융회사는 고객과의 관계를 형성한 후 고객이 일정 기간 성실하게 대출 이자를 상환하면 금리를 내리는 혜택도 준다. 이런 소중한 고객이 실직하거나 사업이 어려워져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금융회사는 채무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연체가 발생하면 콜센터를 통해 회수 노력을 하고 잘되지 않으면 채권추심회사에 추심업무를 위탁한다.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채권을 저축은행이나 대부업체 등에 팔아버리면서 고객 관계는 절연된다. 채무자는 더 이상 고객이 아닌 연체자가 되어 일종의 투자상품화돼 버린다.

이 과정에서 채무자의 어려운 사정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6개월 내로 새로운 직업을 가지면 반드시 갚을 건데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부탁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지금은 금융회사가 채권을 매각하더라도 채무자는 최소한의 보호를 받는다.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권의 경우 매각과 추심이 금지되고 있으며, 채무자의 채권이 어떤 경로로 매각됐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채권자변동조회시스템도 도입됐다. 금융회사 채권은 금융감독원의 감독을 받는 등록 대부업자까지만 매각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다. 이런 소비자 보호장치는 최근에야 마련됐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2000년대 초반으로 돌아가 보자. 그 당시 채권은 반드시 돌려받아야 한다는 원칙만 있을 뿐 채무자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장치도 없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가혹한 현실을 채무자가 감내해야 했다. 연체하면 금융회사가 고객님이라고 부르던 바로 그 사람은 채권가액의 1~5% 수준의 수익을 주는 투자상품으로 전락해 몇 번에 걸쳐 매각되고 최종적으로는 불법 추심업체 손으로 채권이 흘러갔다. 은행에서 돈을 빌렸는데 1년 뒤 영문도 모른 채 불법 추심업체로부터 상환 독촉을 받는다. 내 채권의 소멸시효가 완성됐는지 알 수 없고, 불법 추심업체가 왜 내 채권을 갖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이처럼 소비자 보호장치가 갖춰지기 전에 발생한 채권들은 아직도 시중에 투자상품으로 떠돌고 있다. 채권을 매각하는 금융회사는 비싼 가격에 팔려고 하고, 채권을 매입하는 곳은 비싸게 사왔으니 매입 원가보다 더 많이 회수하려 한다. 소멸시효가 다가오면 다시 시효를 연장한다. 이들에게 채권의 소멸이란 있을 수 없다. 연체자는 고객이 아닌 투자상품이기 때문에 고객의 힘든 처지를 봐주지 않는다. 추심업자에게는 수익 극대화라는 목표가 최상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번에 정리하려는 장기소액연체채권은 소비자 보호가 되지 않던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발생한 것들이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정리되고 없을 채권이 예전 소비자 보호장치가 없던 때 발생했다는 이유로 아직 정리되지 못하고 사회에 떠돌고 있는 것이다. 갚을 능력이 안 되는데 평균 450만원의 소액을 못 갚았다는 이유로 15년간 연체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도덕적 해이라는 이름으로 가혹한 추심행위를 용인해 왔다.

이러한 채무를 조건 없이 소각하자는 것이 아니다. 상환능력이 있다면 이는 반드시 상환돼야 한다. 이를 위해 국세청, 국토부 등이 보유하는 소득정보와 재산정보 등을 최대한 활용해 상환능력을 심사할 예정이다. 상환능력 여부를 철저히 따져 상환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가려낼 것이다.

과거 소액을 빌린 후 실직하거나 사고를 당해 최소한의 소비자 보호장치도 없던 가혹한 채권추심 생태계에 던져진 연체자를 생각해 보자. 채무자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을 때와 비슷한 우울, 고통, 좌절감 등을 느꼈을 테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재활할 수 있다는 희망, 사회 시스템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필요하다. 판도라가 상자에서 마지막으로 꺼낸 바로 그 희망 말이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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