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제목 영화 ‘기생충’으로 철학하기

반지하의 공간학

글 :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발행일 : 2020. 02. 25.

글자 크기 설정하기
대표 이미지

영화 「기생충」이 프랑스 칸 국제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4관왕 수상을 석권하면서 전 세계인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거장의 반열에 오른 봉준호 감독의 쾌거이자 이미 세계 곳곳으로 흐르고 있는 한류가 새로운 차원을 획득한 사건이다. 국내외 언론은 이 작품의 성공 요인을 분석하는 기사로 넘친 바 있다. 나는 철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동안 있었던 다양한 해설에 새로운 관점을 더하고 싶다.

제3의 장소, 거기서 교차하는 것들

이를 위해서 먼저 반지하에 주목해보자. 「기생충」에서 외국인의 시선을 끄는 것 중에는 반지하가 단연 으뜸인 것 같다.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거주 공간인 데다가 냉전 시대의 벙커에서 유래한다는 그럴듯한 이야기에 실려 한국의 독특한 현실을 상징하는 위치에 올랐다. 양극화라는 세계 공통의 문제를 풀어가는 데 안성맞춤인 그 특이한 거주 형태가 알고 보니 한국이 세계 유일 분단 국가로서 통과해야 했던 역사적 질곡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수상 무대에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영예를 돌리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란 말을 던져 박수를 받았다. 아마 이 말을 뒷받침할 만한 가장 좋은 사례가 반지하일 것이다. 반지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통해 한국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반지하에서 교차하는 것은 훨씬 더 많다. 가령 반지하가 지상의 삶과 지하의 삶이 만나는 제3의 장소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직관할 수 있는 점이다.

「기생충」이 길고 긴 철학적 토론의 중심에 놓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지하라는 제3의 장소, 거기서 펼쳐지는 제3의 거주 방식은 현대적 사유 일반이 전제하는 어떤 공통된 위상학(topology)의 입구가 될 수 있다. 가령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인간의 심리 세계는 이드, 자아, 초자아라는 세 가지 구심점을 지닌다. 이드는 본능과 충동이 이글거리는 어두운 심층이고 초자아는 법과 이상이 밝게 빛나는 상층이다. 자아는 심층과 상층의 중간에 있으면서 두 세계의 상반된 요구가 충돌하는 곳이다.

기태네 집, 실재계와 상징계의 접점

이런 관점에서 「기생충」으로 돌아가면 기태네 가족은 한편으로는 초자아의 입지를 대변하는 박 사장 식구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원초적인 욕망을 대변하는 지하 인간 사이에서 희비극을 겪어가는 자아에 해당한다. 프로이트 정신분석에서 자아는 이드와 초자아의 모순된 요구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잡으려 한다. 그러나 그런 조율은 항상 실패로 돌아가고, 그 결과 정상인은 누구나 초자아의 공격에 노출된 신경증 주체이거나 이드의 침범에 의해 정체성이 흔들리는 도착증 주체다. 「기생충」의 냄새 나는 반지하 방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벗어나기 어려운 심리적 질곡을 상징한다. 근대적 주체의 무의식이 거주하는 어두운 장소를 대변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영화 비평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으로 가서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라캉은 무의식의 세계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나눈다. 상상계는 비현실적 관념의 세계이고 실재계는 죽음 충동이 넘실대는 원초적 욕망의 세계다. 그리고 그 중간에 낀 상징계는 보통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의 세계, 규칙의 세계다. 이런 라캉의 위상학을 통해서 보면 「기생충」의 여러 장면이 더욱 심오한 의미를 띠고 다가온다.

반지하부터가 그렇다. 영화 전반부에는 행인들이 기태네 집 창 앞에서 소변을 보거나 구토하는 장면, 쓰레기를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대소변과 쓰레기는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상징계(현실)로 침투하는 실재의 파편을 대변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태네 집은 실재계와 상징계가 만나는 접경에 해당한다. 영화 후반부에서는 대반전의 신호탄이 되는 장맛비가 실재의 범람을 표현한다. 반지하 공간을 삼키는 빗물, 변기를 통해 분출되는 시커먼 오물은 상징계를 무너뜨리면서 밀려드는 무시무시한 실재의 폭력을 형상화하면서 다가올 비극적 종말을 암시한다.

사모님, 각별한 위치의 인물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각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은 상징계의 법을 대변하는 사장도, 지하에서 튀어나와 분노의 살인극을 벌이는 지하 인간도, 그 사이에서 희비극을 겪는 기태네 식구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상상계의 주체에 해당하는 사모님이다. 왜냐하면 라캉 정신분석에서 상상계란 실재계(원초적 욕망, 죽음 충동)로부터 상징계(현실의 질서)를 지켜주는 보호막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비현실적인 상상에 의해 중화되지 않는다면 상징계의 법은 실재계의 죽음 충동이 분출하는 입구가 된다. 공포와 테러를 가져오는 극단적 원리주의가 그런 결합의 사례에 해당한다. 영화에서 선(법)을 중시하는 사장님이 자애로운 가장으로, 너그러운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현실 감각이 없는 사모님과 자녀들 덕분이다.

라캉의 무의식 이론에서는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가 서로 얽혀 꼬리를 무는 의존 관계에 놓일 때 어떤 활력적인 일상이 보장된다. 가령 상징계(규칙)의 매개 없이 상상계와 실재계가 직접 만나면 분열증이나 편집증 같은 정신병 상황이 일어난다. 영화에서 이런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 사장님 댁 아들이다. 반면 실재계(원초적 욕망)의 개입 없이 상상계와 상징계가 결합하면 현실은 모든 야성을 잃어버려서 마치 김빠진 듯한 상태에 머문다. 영화에서 이런 상황을 대변하는 것은 마냥 착하게 혹은 무기력하게 보이는 사모님이다.

마지막으로 상상계(비현실적 관념)의 중재 없이 상징계와 실재계가 조우하면 혁명적 상황에서처럼 정의를 앞세운 잔혹극이 도래하게 된다. 영화에서 이런 상황을 대변하는 것은 기태네 식구에게 복수의 칼부림을 벌이는 지하 인간과 자신에게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준 사장님에게 보복의 칼을 꽂는 기태다.

정신분석 관점을 넘어

이렇게 놓고 보면 박 사장 집에 숨어든 기태네 식구와 지하 인간만이 기생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화롭고 생기 넘치는 현실에서일수록 누구나 다 알게 모르게 다른 종류의 인간, 다른 세계의 주체에 의존하면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정상인을 자처할수록 누구나 다 기생충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영화 「기생충」에 대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그런데 기생충은 이번 영화를 정신분석과는 다른 관점에서, 가령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미셸 푸코 같은 현대 프랑스 철학의 관점에서 풀어낼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들의 철학에서도 우리가 이제까지 반지하를 중심으로 끌어들인 3분적 공간학이 근간이 되고 있음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그들의 철학적 공간학은 영화 「기생충」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이야기만으로도 일반 독자를 위한 에세이로서는 지나칠 정도로 추상적이고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본격적인 철학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다만 독자들이 이런 난해한 글을 힘들게 읽은 대가로 얻는 것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마디 덧붙이자면, 「기생충」이 단지 양극화라는 세계 보편의 문제를 한국식 블랙코미디에 실어 쉽게 풀어낸 영화 정도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이 작품에는 현대 철학이나 문예 이론에 정통한 영화인일수록 매혹될 만한 여러 가지 사변적인 요소들이 숨어 있다. 「기생충」은 한국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이 겹칠 뿐만 아니라 대중성과 예술성, 통속성과 정신성, 오락다움과 철학다움이 한데 어우러지는, 그래서 세계 영화사에서 두고두고 거론될 만한 걸작임이 틀림없다.

 

필자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이력 정보
  • 한국연구재단 책임전문위원
  • 고등과학원 초학제독립연구단 연구책임자
  • 한국프랑스철학회 회장
  • 철학과 현실 편집위원
  •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외부 저작권자가 제공한 콘텐츠는 네이버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