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의 사회심리학]어른이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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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모한 괴롭힘은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호소하는 것조차 어려울 때가 많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직장 내 괴롭힘을 연구하는 연구자로부터 “어른이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악의적으로 타인을 괴롭히는 일에 에너지를 쓰지 않을 정도의 성숙함은 자동으로 갖추게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도 사람이 크면 전반적으로 더 좋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던터라 내심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생각해보면 진짜 나쁜 짓은 아이보다 어른이 많이 저지른다. 나쁜 짓인 줄 뻔히 알면서, 누군가를 못 살게 만들겠다는 악의를 가지고, 하지만 겉으로는 티나지 않게 뒤에서 교묘하게 저지르는 나쁜 일들 말이다. 캐나다 오타와대 트레이시 베일런코트 교수에 다르면 실제로 나이가 들면서 눈에 띄는 나쁜 행동, 예컨대 다들 보는 앞에서 주먹을 휘두르거나 꼬집는 등의 행동은 줄어들지만 뒤에서 교묘하게 괴롭히는 행동은 늘어난다.

예컨대 여럿이 하는 활동에서 그 사람만 쏙 빼놓는다든가, 뒤에서 안 좋은 소문을 늘어놓거나 놀림거리로 삼는 등의 행동이 한 예다. 많은 경우 겉으로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서 대놓고 괴롭힌다는 느낌은 주지 않고 티가 나더라도 실수였다는 말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든다.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일 수 있다.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조차 이게 정말 괴롭힘인지 아니면 그냥 자신이 예민한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이렇게 어른들이 저지르는 괴롭힘은 교묘해서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호소하는 것 조차 어려울 때가 많다. 피해자 본인도 괴롭힘 사실을 인지하는 데 비교적 오랜 시간이 걸리고 인지 하더라도 뚜렷한 증거가 없다보니 도움을 받기 어려운 편이다. 따라서 피해자들은 우울, 불안, 외로움, 섭식 장애, 심한 스트레스로 신체적 증상을 겪는 등 아이들이 힘으로 싸우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심각한 피해를 겪게 된다.

또 피해자는 이런 종류의 간접적인 폭력에 오래 노출될수록 무기력해지기 쉽다. 처음에는 반박도 해보고 괴롭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다가 괴롭힘이 지속됨에 따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경향을 보이곤 한다. 지속적인 괴롭힘 앞에 장사 없다는 얘기다.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도 괴롭힘은 일어난다. 연구실에서 다 같이 모여 파티를 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몇 주 전에 앞서 미리 날짜를 얘기하고 자신들이 괴롭힐 대상으로 찍은 사람에게만 바로 전날 내일 모임에 올 수 있냐고 물어보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또 그 사람이 발표를 할 때에만 유독 비판적이고 차가운 반응을 보이는 등 저급한 행동들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개인적인 수준에서 사람에 대해 '호불호'가 갈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컨대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오이와 당근을 싫어하고 비슷하게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이 불편하듯, 다른 누군가도 아무 이유 없이 나나 또 다른 사람이 껄끄러울 수 있는 것이 인간관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때에도 그냥 어떤 이와는 잘 맞지 않음을 속으로 인정하고 적당히 인간적인 관계를 유지하면 될 일이지 굳이 괴롭히는 행동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이와 당근이 싫으면 내가 먹는 김밥에서 조용히 빼면 되지 다른 사람이 먹는 김밥에서도 굳이 빼거나 밭에서 잘 자라고 있는 오이와 당근에게 해코지를 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또 만약 다른 사람도 나만큼이나 오이를 혐오하도록 만들었을 때 구체적으로 어떤 이점이 있는 지 잘 모르겠다. 나의 오이 혐오가 이해 받고 있고 정당화 된다는 느낌은 있겠지만 그 이상의 이점이 있을까?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서 특정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갖기 위함이라고 해도 오이 혐오파라는 정체성 보다 장기적으로 더 바람직한 집단 정체성을 찾아볼수 있지 않을까? 성장할수록 점점 더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일에 많은 에너지를 쓰는 어른이 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참고자료
Farrell, A. H., & Vaillancourt, T. (2021). Examining the joint development of antisocial behavior and personality: Predictors and trajectories of adolescent indirect aggression and Machiavellianism. Developmental Psychology.

※필자소개
박진영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썼다.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게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들과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지뇽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에서 자기 자신에게 친절해지는 법과 겸손, 마음 챙김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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