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다원사회의 종말을 재촉한 명장의 죽음

최영

고려인물열전

1854년 최영의 27세손 최규영의 주도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최영의 초상. 충청북도문화재자료. 1854년 최영의 27세손 최규영의 주도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최영의 초상. 충청북도문화재자료.
1854년 최영의 27세손 최규영의 주도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최영의 초상.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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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흠모의 대상이 된 최영

최영(崔瑩, 1316~1388)은 조선의 창업군주 이성계(李成桂, 재위 1392~1398)에 필적하는 고려 말 최고의 장수다. 이성계 일파에 의해 처단되었지만, 그를 기리고 그의 영력(靈力)에 기대려는 민중들의 소망은 끊이지 않았다.

최영 사당은 전국 곳곳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곳이 개성 근교 덕적산(德積山)의 최영 사당이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2)도 《택리지》(1751)에서 그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개성에서 동남쪽으로 10여 리 되는 곳에 덕적산이 있다. 산 위에 최영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흙으로 만든 조각[소상塑像]이 있다. 그 지방 사람들은 기도하면 효과가 있다고 해서 사당 옆에다 침소를 만들었다. 민간의 처녀에게 최영의 신을 모시게 했다. 처녀가 늙고 병들면 젊고 예쁜 사람으로 바꿨다. 300년 동안을 하루같이 그렇게 했다.

―이중환, 《택리지》 〈팔도총론〉 경기 편

벽초 홍명희(洪命憙, 1888~?)의 소설 《임꺽정》에는 덕적산 최영 장군 사당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덕적산은 딴 이름이 덕물산이니 진달래꽃으로 이름 높은 진봉산 남쪽에 있다. 그 흔한 진달래꽃조차 진봉산 같이 많지 못한 산이라 아무것도 보잘것이 없건마는 이름은 경향에 높이 났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고 오직 산 위에 최영 장군의 사당이 있는 까닭이었다.

최장군이 고려 말년의 영웅으로 당세에 큰 공로가 있었다고 유식한 사람들이 그 사당을 위하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또 최장군이 무덤에 풀이 나지 않도록 원통하게 죽었다고 유심(有心)한 사람들이 그 사당에 많이 오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 사당을 누가 세웠는지 세운 사람은 혹시 장군의 죽음을 불쌍히 여기고 또는 장군의 공로를 못 잊어하였는지 모르나, 그 사당은 장군당이라고 일컫는 무당들의 밥그릇이 되고, 최영 장군은 최일 장군으로 이름까지 변하여 무당들의 고주귀신이 되었다.

―홍명희 지음, 《임꺽정》 4권, 144~145쪽(사계절출판사, 2008)

홍명희는 사당이 무당들의 밥그릇 노릇이나 한다며 조금 비꼬는 듯이 장군의 사당을 소개했다. 그는 또 사당을 지킬 처녀를 장군의 신부로 맞아들이는 모습을 열두 마당놀이로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임꺽정 세력의 일원인 박유복이 장군의 신부로 사당에 바쳐진 처녀를 아내로 삼아 사당을 떠나는 과정을 소설에 담았다.

경상남도 남해시 미조면에 있는 무민사(武愍祠). 최영 장군의 사당으로, 500년 전 미조 앞바다에 떠내려 온 최영 장군 화상을 봉안한 데서 유래했다.
<출처 : ⓒ박종기>

소설에서 최영을 최일(崔一)이라 부른다고도 했는데, 구전설화에도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장군 가운데 1등’이라는 뜻인 만큼, 민간에서 최영의 신비스러운 측면이 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영 장군은 이같이 정사(正史)보다 야사나 민간의 구전설화에 더 많이 등장하여 민중에게 흠모의 대상이 된 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러나 《고려사》 등 정사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공은 죄를 덮을 수 없다

1388년 6월 위화도에서 회군해 개경 근교에 주둔한 군사들은 국왕에게 다음과 같이 최영의 처단을 요구한다.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께서 지성으로 명나라에 사대하셨고, 명나라 천자는 우리나라를 공격할 뜻도 없었습니다. 최영이 총재[冢宰]가 되어, 건국[祖宗] 이후 행해온 사대의 뜻을 잊고 대군을 일으켜 명나라를 쳐들어가려 했습니다. 한 여름에 백성을 동원해 농사를 짓지 못했고, 왜구가 빈틈을 타서 쳐들어와 백성을 죽이고, 창고를 불태웠습니다. 한양으로 천도까지 하려 해 온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최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종묘와 사직이 전복될 것입니다.

―《고려사》 권137, 우왕 14년 6월

우왕(禑王, 재위 1374~1388)은 회군 군사들을 회유하고 달래어 최영의 처형을 막으려 했다. 한 달 가량 실랑이를 벌였다. 참지 못한 회군 장수 유만수(柳曼殊)가 최영 진영을 공격했으나 최영에게 반격 당했다. 마침내 이성계가 직접 공격해 최영을 사로잡았다.

최영은 처음에는 고봉(高峯, 지금의 고양시)으로 유배되었다가 이후 충주와 합포(合浦)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그러나 우왕이 폐위되고 아들 창왕이 즉위하자 개경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 결과 창왕에게 보고된 내용에 따르면 최영의 처단을 요구한 죄목은 다음과 같다.

최영은 공민왕을 섬겨 흥왕사 난을 평정하고 원이 고려왕으로 임명한 덕흥군을 북쪽 변방에서 쫓아버렸습니다. 상왕[우왕]을 섬겨 개경 입구까지 들어온 왜구를 물리쳐 사직을 보존했고, 금년 봄에는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 등) 흉악한 무리들을 제거해 백성의 삶을 되살린 공은 실로 컸습니다.

그러나 (천하) 대세에 어두워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정해 명나라 천자에게 죄를 지어, 나라를 거의 멸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공이 죄를 덮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큰 나라를 섬기고 천자를 두려워해야 하는 뜻을 생각하여, 그의 죄를 바로잡아 조상들에게 알리고 명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풀어 우리나라가 만세 태평의 길로 나아가게 하소서.

―《고려사》 권113, 최영 열전

흥왕사 난과 덕흥군 옹립을 저지하고, 임견미 일당을 제거하고 왜구 침입을 막아 고려의 왕통과 사직을 바로잡은 공이 아무리 크더라도 명나라 요동을 정벌하려 한 죄를 덮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요동 정벌의 한 가지 죄는 내란, 외란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해낸 수많은 공을 뒤엎을 정도로 크다는 것이다. 최영의 처단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논리는 최영 처형 이전 우왕의 폐위(1388년 6월)에 이미 적용되었다. 우왕이 폐위되고 한 달이 지난 7월에 고려는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우왕은 명나라 황제에게 왕위를 아들(창왕)에게 양위했음을 알리고 책봉을 요청하는 글을 올린다.

근래 최영이 권세가 임견미 등의 목을 베고 마침내 문하시중이 되자, 제멋대로 군국(軍國) 의 권한을 잡고 사람들을 마구 죽였습니다. 또한 멋대로 군사를 일으켜 요동 정벌에 나섰으나, 여러 장수가 모두 반대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최영이 이렇게 된 것은 실로 제 잘못 때문입니다. 부끄럽고 두려워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병을 앓았고 국사가 번잡하여 물러나 요양하려 합니다. …… 폐하께서 제 망령된 행위를 용서하시고 제 충정을 믿으셔서, 제 아들 창이 황제의 은택을 입어 왕위에 오르게 해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고려사》 권137, 창왕 즉위년(1388) 7월

당시 우왕은 회군 공신들의 압박으로 왕위를 양위하는 모양새를 취할 정도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양위와 책봉은 회군파들이 위화도 회군과 국왕 폐위의 정당성을 얻는 데 필요한 절차였다.

우왕은 요동 정벌을 단행한 최영을 막지 못한 잘못 때문에 양위한다고 했다. 그 어떠한 공도 천자국 명나라에 지은 죄는 덮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공죄론(功罪論)이다. 최영은 공죄론의 덫에 걸려 처형되었다.

‘공이 죄를 덮을 수 없다(功不掩罪者)’는 말은 고려시대에 정적을 제거할 때 주로 내세우는 논리였다. 이보다 250년 전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12세기 전반 이자겸(李資謙, ?~1127)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 국왕 인종(仁宗, 재위 1122∼1146)은 왕위를 보존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자겸은 둘째 딸을 예종(睿宗, 재위 1105∼1122)에게 출가시켜 왕실의 외척이 되었는데, 외손인 인종이 즉위하자 셋째 딸과 넷째 딸을 다시 인종의 비로 들인다. 그러니까 인종의 외조부이자 장인이 된 것이다.

외척이 왕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기도 하지만, 이 경우엔 국왕의 숨통을 조이는 칼날이 된다.

1126년(인종 4)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하기 위한 친위정변을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이자겸과 사돈 관계에 있던 무신 척준경(拓俊京, ?~1144)의 동생 척준신(拓俊臣, ?~1126)과 아들 척순(拓純)이 살해되었다. 이에 격노한 척준경이 군사를 이끌고 궁을 공격하면서 친위정변은 실패로 끝난다. 이해 2월의 일이다. 정변의 실패로 국왕은 허수아비와 다름없을 정도로 권위를 잃었다.

이자겸 가계도.
<출처 : ⓒ휴머니스트>

하지만 인종과 측근들은 척준경을 꼬드겨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작전으로 마침내 이자겸을 제거한다. 이해 5월의 일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척준경은 국왕의 총애를 받아 득세한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서경 출신의 천재 시인이자 정치가 정지상(鄭知常, ?~1135)은 척준경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자겸을 제거한) 5월의 거사는 한때의 공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궁궐을 불태우고 반란을 일으킨) 2월의 거사는 만세의 죄입니다. 어진 폐하께서 어찌 한때의 공으로 만세의 죄를 덮으려 하십니까?[五月之事 一時之功也 二月之事 萬世之罪也 陛下雖有不忍人之心 豈以一時之功 掩萬世之罪乎?] 척준경을 처벌하라는 명을 내려주십시오.

―《고려사》 권127, 척준경 열전

이자겸을 제거한 5월의 공으로는 궁궐을 공격해 불태운 2월의 죄를 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정지상의 촌철살인 같은 이 한 마디에 척준경은 낙마해 전라도 암태도로 유배된다. 인종의 배려로 겨우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곡주로 낙향해 일생을 마친다. 이같이 최영 처형의 논리인 공죄론은 250년 전에도 사용되었다.

민심은 최영의 죽음을 다르게 생각했다

최영 처형에 소극적인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昌王, 재위 1388~1389)이 즉위했다. 정국은 회군파의 뜻대로 움직여 마침내 최영은 처형되었다. 이성계 일파의 친위대격인 윤소종(尹紹宗, 1345~1393) 또한 최영의 죽음에 대해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던진다.

윤소종은 최영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공은 한 나라를 뒤덮지만 죄는 천하를 가득 채운다. ’ 세상 사람들은 이 말을 명언이라고 했다[諫大夫尹紹宗論瑩曰 ‘功盖一國 罪滿天下’ 世以爲名言].

―《고려사》 권113, 최영 열전

최영에게 적용된 공죄론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명나라를 천자국으로 고려를 제후국으로 간주해, 제후는 천자를 넘볼 수 없다는 이른바 ‘사대 명분론’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공죄론은 천자-제후의 엄격한 상하질서를 강조하는 사대 명분론이 자리를 잡은 후에야 나올 수 있다.

이성계에 필적하는 고려 말 최고의 장수 최영을 처형하고 우왕을 폐위할 정도로 당시 사대 명분론이 엄격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을까? 그러한 명분론이 당시의 보편적 기준이었을까? 최영이 처단된 직후 다음의 기록에 담긴 백성들의 여론 속에서는 공죄론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최영이) 죽은 날 개경 사람들은 장사를 쉬었다.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최영의 처형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길거리의 어린 아이들과 부녀들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시신이 길에 버려지자 행인들은 말에서 내려 조의를 표했다. 조정은 부의로 쌀, 콩, 베, 종이를 보냈다.

―《고려사》 권113, 최영 열전

매우 짧은 글이지만, 그의 죽음이 요동 정벌 때문이라는 소리는 들을 수 없다. 죽음을 애도하는 백성들의 모습에서 그가 당대의 존경받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성들이 최영에게 바랐던 것은 무엇일까? 최영이 그들에게 던진 메시지는 무엇일까? 고려 말 조선 초 관료를 지낸 변계량(卞季良, 1369~1430)도 최영에 대한 시를 남겼다.

위엄을 떨쳐 나라를 구하노라 살쩍이 하얗고 (奮威匡國鬢星星)
말 배우는 거리의 아이도 그 이름을 다 안다 (學語街童盡識名)
한 조각 장한 마음만은 응당 죽지 않았으리 (一片壯心應不死)
천추에 길이 대자산과 함께 우뚝하다 (千秋永與太山橫)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고양군 능묘조 최영 묘

말 배우는 아이조차 그의 이름을 알 정도로 최영은 백성들에게 친근했다. 죽었지만 ‘한 조각 장한 마음’은 죽지 않아 나라를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 요동 정벌도 장군이 품은 장한 마음으로 백성들은 생각한 것은 아닐까? 문인 원천석(元天錫, 1330~?)도 최영을 기렸다.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거울이 빛을 잃고 주석이 무너지니 (水鏡埋光柱石頹)
사방의 백성이 모두 슬퍼하네 (四方民俗盡悲哀)
빛나는 공업은 끝내 썩는다 하더라도 (赫然功業終歸朽)
꿋꿋한 충성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으리 (確爾忠誠死不灰)

―《성호사설》 권20, 경사문 〈崔瑩攻遼〉

나라를 바로 세울 기둥과 주춧돌(柱石)인 최영은 죽었어도 고려를 구하려 한 그의 충성심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왕조를 구할 인물은 최영이라는 백성들의 믿음이 시 속에 담겨 있다.

최영 장군 묘.
<출처 : 문화재청>

앞의 여러 시들은 백성들이 최영이 요동을 정벌한 죄로 처형된 사실을 불신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최영을 단죄한 공죄론을 알고 있었을까? 공죄론은 뒷날 조선 초기 역사가들이 《고려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집어넣은 것은 아닐까?

다원적 실리외교의 종언

위화도 회군 후 우왕을 폐위시킨 것은 요즘 말로 헌정질서를 유린한 것이다. 국왕을 정점으로 그가 임명한 관료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왕정체제가 당시의 헌정질서였다. 요동 정벌을 시도한 것과 헌정질서를 유린한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무거운 죄일까?

선택은 언제나 권력을 장악한 승자의 몫이다. 이성계 등 회군 주역들은 왕정체제를 부정한 대역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요동 정벌의 공죄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공죄론을 뒷받침한 천자-제후의 엄격한 관계를 강조한 사대 명분질서가 당시 고려의 보편적인 외교질서는 아니었다.

공민왕 피살 후 즉위한 우왕은 명나라에 자신의 책봉과 공민왕의 시호를 요청한다. 공민왕 시해의 어수선한 정국을 조기에 수습하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명나라 사신이 귀국 중에 피살되는 등 일들이 꼬여 쉽게 결말이 나지 않았다.

고려는 시호와 책봉을 받기 위해 북원과 외교관계를 재개하며 명나라를 압박한다. 우여곡절 끝에 즉위 10여 년이 지난 1385년(우왕 11)에야 명나라로부터 ‘공민왕’ 시호와 함께 책봉을 받는다.

이때까지도 사대 명분질서는 확립되지 않았다. 책봉 받은 지 3년이 지난 1388년(우왕 14) 명나라는 과거 원나라 영토라는 이유로 철령 이북 영토의 반환을 요구하고, 고려는 명나라의 요구에 반발해 요동 정벌에 나선다. 이것은 당시 사대 명분질서가 확립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시호와 책봉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을 시혜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북원과의 관계도 그러했다. 공민왕은 1363년(공민왕 12) 자신을 폐위하기 위해 고려로 침입한 북원의 군사를 물리쳐 북원의 공민왕 폐위 기도를 좌절시켰다.

또한 6년 후 북원과 단교하고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었다. 한편 우왕은 1377년(우왕 4) 북원과의 외교관계 재개를 지렛대로 삼아 명나라를 압박해 공민왕의 시호와 함께 책봉을 받아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고려는 이같이 철저하게 국익을 기준으로 명나라와 북원을 상대로 관계를 단절하거나 재개하는 등 실리외교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외교 전통은 500년 내내 고려-송-요, 고려-송-금, 고려-송-원, 고려-원(북원)-명 등 다원적인 외교질서 환경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는 외교가의 금언을 고려는 일찍부터 실천해왔다.

실리외교의 전통은 국가체제에도 반영되었다. 고려는 대외적으로 송, 요, 금의 천자에게 국왕이 책봉을 받는 제후국의 형식을 갖추었으나, 대내적으로는 황제(천자)국의 위상에 걸맞은 제도와 격식을 갖추었다.

대표적인 예로 고려의 중앙 관제인 3성(省) 6부(部)를 들 수 있다. ‘성’과 ‘부’는 천자국에서 사용한 관청 용어였다. 고려에 비해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은 중앙 관제를 ‘성’과 ‘부’에서 ‘의정부(議政府)’와 ‘6조(曹)’로 바꾸었다. ‘부(府)’와 ‘조(曹)’는 제후국에서 사용한 관청 용어다.

고려인들은 중국 대륙에 천자가 존재하지만 해동(海東)에도 해동천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 다원적 천하관을 지니고 있었다. 고려가 황제국 체제를 유지한 이념적 바탕에는 후삼국을 통일해 천하국가를 건설했다는 자부심을 표현한 일통(一統) 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왕 폐위와 최영 처벌의 명분으로 제기된 공죄론은 우왕이 명나라의 책봉을 받은 지 3년이 지난 위화도 회군 직후 제기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천자-제후 사이의 엄격한 상하관계를 강조한 사대 명분질서가 보편화된 외교질서로 정착되지 않은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계 등 회군의 주역들은 사대 명분질서를 내세워 정적 최영을 제거한 것이다.

최영의 처단과 죽음은 고려 말 이후 천자-제후의 사대 명분질서를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는 출발점이었다. 조선시대 이후 중국 대륙의 천자는 불변의 존재이며, 해동의 왕조는 제후로만 존재한다는 사대 명분질서가 정치, 사회, 사상 및 문화 전반을 규정하는 이념으로 굳게 자리 잡는다.

중국 대륙의 천자와 구분되는, 해동천자가 존재한다는 다원주의 이념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고려 다원사회는 설 땅을 잃게 되었다. 최영의 죽음은 해동천자의 자존의식을 강조한 고려 특유의 다원적 천하관의 종말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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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
    박종기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고려시대 부곡인과 부곡 집단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교수,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및 한국중세사학회 회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고려사의 재발견》, 《동사강목의 탄생》, 《새로 쓴 5백년 고려사》, 《안정복, 고려사를 공부하다》, 《왕은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는가》(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고려사 지리지 역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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