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이냐 오미크론이냐, 딜레마에 빠진 세계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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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1.12.30. 오후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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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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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Cover Story] 오미크론 확산에 소비심리 위축
2년간 돈 풀어 재정 여력도 바닥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사상 초유의 코로나 팬데믹(전염병 대유행) 시대가 3년 차에 접어들면서 각국 정부 경제팀과 중앙은행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좀처럼 보기 드문 ‘공급 측 요인’에 의한 인플레이션이 들불처럼 번지는 와중에 오미크론이라는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가 등장해 세계 경제에 찬물을 끼얹는 진퇴양난의 형국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자니 최근 급속도로 퍼진 오미크론 변이에 신음하는 경제가 눈에 밟히고, 오미크론발 경기 침체에 대응하려니 치솟는 물가가 마음에 걸리는 ‘딜레마’에 빠진 상황이다. 지난 2년간 팬데믹에 대응하느라 마땅한 정책 수단도 거의 고갈돼 버렸다.

작년 초 팬데믹 발생 직후 각국 중앙은행과 정부는 금리 인하를 단행하고, 생계 보조금 등 현금성 지원을 크게 늘리면서 급한 불을 껐다. 재정 부담이 커지고, 저금리로 인한 과잉 유동성이 우려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백신이 나올 때까지 막대한 돈을 풀어 버틴 후 일상으로 회복해 올해나 내년쯤에는 경제를 코로나 이전 상태로 되돌린다는 계획이었다. 올 상반기까지만 해도 이런 계획이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주요국들이 견실하게 성장했고, 백신도 착착 보급됐다. 하지만 수요 급증에 더해 코로나 확산에 따른 공급망 붕괴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인플레이션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며 이 계획에 한 번 차질이 생겼다. 여기에 오미크론 출현이라는 펀치가 더해지면서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졌다. 막대한 돈 풀기 성과도 없이 인플레이션이라는 부작용만 남긴 채 경제가 더블딥(double dip·경기 이중 침체)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이 난국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진정한 시험대에 올랐다.


망가진 포스트 코로나 계획

올 상반기만 해도 시장에는 낙관론이 팽배했다. 작년 미국과 유럽을 비롯해 세계 주요국이 빠른 속도로 금리를 내리고, 국고(國庫)를 열어젖혀 시중에 돈을 풀면서 작년 하반기부터 ‘V자’ 반등에 시동을 걸었다. 올해도 상반기까지 이런 분위기가 이어졌다.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작년 팬데믹 직후 2개월 만에 금리를 1.5%포인트 넘게 낮췄고(1.58%→0.05%), 영국도 작년 3월에만 두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연 0.75%에서 연 0.1%까지 인하했다. 다른 유럽 주요국들도 일제히 금리를 대폭 낮추며 전투 태세를 갖췄다. 여기에 각국 정부가 과감하게 재정을 살포하면서 작년 1~3분기 전 세계 총부채(기업 포함)는 15조달러(약 1경8000조원) 늘었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작년 말 현재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은 365%로 2019년 말(320%) 대비 45%포인트 급증했다.

강력한 재정·통화 정책이 쌍끌이로 경기 부양을 이끈 덕분에 세계 경제는 급속도로 회복세를 보였다. 4~8개월 뒤 경기 흐름을 예측하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경기선행지수는 작년 초 98.9에서 작년 4월 91.4까지 추락했다가 작년 말(99.1)에는 연초 수준을 넘어섰고, 올해 들어서도 상승세를 이어가며 7월에는 100.9를 기록했다. 올 상반기 델타 변이가 전 세계에 확산되는 상황에서도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은 지난 7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이후 “델타 변이가 경기 회복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며 내년도 긴축 스케줄을 그대로 진행하겠다고 밝힐 정도였다.

하지만 상반기부터 조금씩 꿈틀대던 물가가 하반기 들어 급등세를 보이면서 인플레이션은 세계 경제가 맞닥뜨린 최대의 난제가 됐다. 미국은 11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전년 대비)이 6.8%를 기록하며 40여 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같은 달 유로존 역시 1991년 7월(5.0%) 이후 30여 년 만에 처음 보는 상승률(4.9%)이 나왔다.

인간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던 코로나와의 전쟁 역시 오미크론 변이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영국 옥스퍼드대가 운영하는 국제 통계사이트 ‘아워월드인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28일 기준 전 세계 일주일 평균 신규 확진자 수는 92만8136명으로 팬데믹 사태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치솟았다. 델타 변이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4월 말 기록한 종전 최고치(약 83만명)를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최근 미국은 하루 평균 신규 확진자 수가 30만명에 육박하면서 각종 운동 경기와 문화 행사를 중단했고, 영국과 네덜란드 등 유럽 주요국은 수퍼마켓과 약국 등 생활 필수 업종을 제외한 음식점·술집·영화관 문을 다시 닫았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 정부는 부스터샷 접종을 호소하며 “경제 봉쇄는 하지 않겠다”고 천명했지만, 소비 심리는 얼어붙고 있다. 지난 7월까지만 해도 80 위에서 움직이던 미국 미시간대 소비자심리지수(CSI)는 지난달 67.4까지 떨어졌다. 올해 8월까지 줄곧 상승했던 OECD 경기선행지수 역시 11월 하락세로 전환했다. 독일 투자은행 베렌베르크의 홀거 슈미딩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오미크론의 빠른 확산으로 의료 시스템이 과부하 상태에 빠져 각국이 네덜란드처럼 경제에 타격을 주는 봉쇄를 실시하고 있다”며 “유로존의 내년 1분기 성장률은 1%포인트 하락할 것”이라고 했다.


쓸 수 있는 카드도 바닥나

인플레이션이 치솟는 가운데 오미크론 확산에 따른 경기 침체 우려까지 커지고 있지만 세계 경제는 마땅한 대응책이 없어 머리를 싸매고 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는 두 마리의 토끼(인플레이션·성장률)를 잡아야 하는 모순적 상황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을 잡으려면 금리를 올리고 재정을 줄이는 긴축 카드를 꺼내야 하지만, 이렇게 되면 오미크론에 위협받는 경제가 더 위축될 수 있다.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거의 다 회복됐던 경기를 다시 궤도에 올려놓으려면 낮은 금리를 유지하거나 재정을 풀어야 하지만 인플레이션이 더 심각해질 수 있는 데다 이미 너무 많은 돈을 푼 탓에 추가 재정 여력도 바닥난 상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의 2021 회계연도 전반기(작년 10월부터 올해 3월까지) 재정 적자는 사상 최대인 1조7000억달러(약 1900조원)를 기록했다. 특히 3월엔 재정 적자 규모가 6600억달러에 달했다. 1년 전보다 454%나 커진 것이다. 국가 부채 문제가 심각해지자 미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 중인 대규모 부양책도 좌초될 위기다. 바이든 대통령의 핵심 공약인 ‘더 나은 재건’ 정책 예산을 3조5000억달러에서 1조7500억달러로 대폭 줄였으나 인플레이션과 국가 부채 급증 등을 우려한 민주당 내부 반발에 부딪힌 것이다.

유럽에서도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의 주요국을 비롯해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재정 여건이 열악한 남유럽 국가들도 코로나 이후 사상 최대 수준의 부양책을 추진한 터라 추가적인 경기 부양에 나설 여력이 바닥났다. 이탈리아는 막대한 재정 투입 결과 올해 국가 부채 비율이 100년 만에 최고 수준인 GDP 대비 160%에 육박할 전망이고, 그리스는 이미 GDP 대비 부채 비율이 206%로 OECD 국가 중 일본 다음으로 높다. 신동준 KB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주요국 정부도 (경기 둔화를 막기 위해) 부스터샷을 독려할 뿐 더는 재정을 풀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대세는 “인플레 먼저”

경기 둔화 리스크가 도사리고 있지만 각국 중앙은행은 우선 인플레이션을 잡는 쪽에 무게를 두는 모습이다. 인플레이션 추세를 매번 “일시적(transitory)”이라고 과소평가하며 비둘기파(완화적 통화정책 선호)적 모습을 보였던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은 지난달 재신임을 받은 후 열린 12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직후 단번에 매파(긴축적 통화정책 선호)로 변신했다. 파월 의장은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으로 인플레이션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며 “테이퍼링(양적 완화 축소) 속도를 현재의 2배로 높이고, 금리 인상도 테이퍼링을 마치고 멀지 않은 시점에 할 것”이라고 했다. 미 월가에서는 연준이 내년 3월 테이퍼링을 끝내면서 금리도 바로 올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월가의 지배적 의견은 ‘내년 3월 테이퍼링 종료, 3회 금리 인상’이다.

유럽 내에서 오미크론 확산 피해가 가장 심각한 영국도 경기 침체 가능성을 무릅쓰고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최근 3년 4개월 만에 기준금리를 0.1%에서 0.25%로 올리는 강수를 뒀다. 영국의 물가 상승률은 연초 0.7%에서 지난달 5.1%까지 치솟았다. 올해 10~11월 물가 상승률이 8%대를 기록한 러시아도 이달 기준금리를 7.5%에서 8.5%로 올렸고, 지난달 물가상승률이 5%를 넘어선 노르웨이는 금리를 0.25%에서 0.5%로 올렸다. 멕시코, 브라질, 칠레 등 주요 신흥국도 인플레이션 방어를 위해 최근 일제히 기준금리를 올리고 있다. 한국 역시 인플레이션에 선제 대응하고, 급증하는 가계부채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해 두 차례에 걸쳐 0.5%포인트 인상했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과 비슷...“각국 실력 판가름날 것”

경기 회복까지 고려하면서 물가를 잡아야 한다는 점에서, 현 상황을 1970년대 미국의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과 비교하는 전문가들이 점차 늘고 있다. 당시에는 폴 볼커(Paul Volcker) 전 연준 의장이 난세의 영웅으로 등장해 경기 침체의 고통을 최소화하면서 인플레이션을 때려 잡는 통화정책의 묘(妙)를 십분 발휘했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명성을 떨친 볼커 의장은 취임 후 1년 3개월 사이(1979년 9월~1980년 12월) 연방 기금금리를 12.2%에서 22%로 10%포인트 가까이 올리는 극약 처방을 통해 1980년 초 14%가 넘었던 물가 상승률을 3년여 만에 3%대까지 낮췄다. 시대를 막론하고 인기 없는 정책인 긴축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건 볼커 의장의 뚝심과 카리스마 덕분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통화 긴축이 침체를 심화시켜 정권 지지율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백악관 관료들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실제로 강력한 긴축으로 실업률이 10%를 넘고, 기업이 줄도산하는 등 극심한 경기 침체를 견뎌야 했다.

근래의 인플레이션은 팬데믹에 따른 공급망 충격으로 발생한 예외적 상황이기 때문에 백신 접종률이 올라가고, 치료제가 개발되면 큰 어려움 없이 잡힐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인플레보다는 경기 둔화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중앙은행들이 인플레이션 방어에 나선 것은 1970년대 인플레이션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가 스태그플레이션 늪에 빠졌던 ‘트라우마’ 때문이다. 나랴아나 코처라코타 전 미니애폴리스 연방은행 총재는 최근 블룸버그에 “1960년대 베트남전 이후 수요가 급증하면서 인플레이션 기대가 계속 높아졌지만 연준이 이에 충분히 대응하지 않으면서 1970년대 말 물가상승률이 두 자릿수까지 치솟았다”며 “연준이 이번 인플레이션 국면에서도 (경기 침체를 우려해) 소극적 모습을 보였다가는 당시와 같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뉴욕타임스는 “2021년 파월 의장이 통화 긴축을 단행한 것은 볼커 전 의장의 1981년 행보와 같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세계 경제를 딜레마에 빠뜨린 양대(兩大) 리스크, 즉 인플레이션과 오미크론발 경기 침체 중 어느 쪽을 먼저 잡는 게 좋을지 모범 답안은 있을까. 정해진 답은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각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위상, 각국이 처한 경제 상황 등에 따라 융통성 있게 대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딜레마에 대처하는 각국 정부 경제팀과 중앙은행의 실력 차가 여실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며 “중앙은행은 긴축 신호를 보내는데 정부는 소비 진작 쿠폰을 뿌리는 것과 같은 엇박자를 내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더블딥

경기가 불황에서 반짝 회복한 뒤 다시 불황에 빠지는 현상. 경제 성장률 그래프상 알파벳 W를 닮아 ‘W자형 회복’이라고도 불린다. 1980년 초 오일 쇼크로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이 불황에 빠졌다가 잠시 회복한 뒤 연준의 가파른 금리 인상으로 81년 하반기부터 82년 말까지 불황을 겪은 것이 전형적인 더블딥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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