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미루면 아예 못할 것 같아서" 아너 소사이어티 최연소 가입
프로게이머로 아너 소사이어티 1호, 중3때 최고등급 받고 게이머 결심
2017년 中 진출, 주요 대회 휩쓸어… 할아버지·부모에 이어 3代째 나눔
지난해 만우절,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 중국 프로리그에서 승승장구하던 프로게이머 강승록군은 사고로 오른팔을 심하게 다쳤다. "의사 선생님이 '다시는 오른손을 못 쓸 수도 있다'고 하는데 꼭 만우절 거짓말처럼 들렸어요." 오른손을 쓸 수 없다는 것은 프로게이머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정규 시즌이 한창이었지만, 승록이는 두 달간 입원과 수술을 반복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는 국내 300만명, 전 세계 1200만명이 즐기는, 'E스포츠'를 대표하는 게임이다.
18일 충남 아산에서 만난 승록이는 재활 훈련을 거쳐 부상에서 재기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고 했다. "인생이 언제나 잘될 수는 없다는 걸 그때 처음 절실히 느꼈어요. 나중으로 미뤄왔던 일들을 빨리해야 한다는 생각, 지금이 아니면 영영 못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기부를 결심했고요."
승록이는 지난 8월 충남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5년간 1억원 기부를 약정하며 2138번째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됐다. '프로게이머 아너 1호'다. 또 부모가 자녀 이름으로 가입한 경우를 제외하면, 만 19세에 가입한 승록이는 전체 회원 2205명 중 최연소다.
아너 소사이어티는 2008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만든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이다. 모금회 관계자는 "자기 소득을 기부한 '만 19세 가입자'는 승록이를 포함해 3명뿐"이라며 "아너 소사이어티 초기에는 50대 이상 자산가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30대 이하 가입자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더 샤이(The Shy·수줍은 아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승록이는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리그에서 세계 정상급 선수로 꼽힌다. 2017년 중국 프로팀 'IG'에 입단해 동료와 함께 각종 주요 대회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휩쓸며 단숨에 유망주로 주목받았다. 지난해 부상을 극복하고 나서는 한국·미국·유럽 등 전 세계 상위 프로팀끼리 대결해 그해 우승팀을 가리는 '롤 월드 챔피언십'에서 맹활약, 중국에 첫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평소 차분한 성격과 달리, 게임에선 호전적이고 과감한 전략을 펼쳐 중국 내 1, 2위를 다툴 정도로 인기가 많다.
프로 데뷔 3년 차에 누적 상금 5억2000여만원, 연봉은 비공개지만 최소 10억원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광고 등 부가 수익까지 합치면 연 수입이 수십억원에 이른다. 정작 그는 "돈 관리는 어머니에게 맡기고, 필요한 게 있으면 그때마다 타서 쓴다"며 "연봉은 내 위치를 가늠하는 지표일 뿐, 많고 적음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승록이는 중학교 때까지 게임을 취미로 즐기는 '우등생'이었다. 중1 때는 과학 영재반에 들어갈 정도로 학업 성적이 좋았다. 그런데 '동네에서 좀 한다' 수준이던 게임 실력이 날이 갈수록 무섭게 늘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상위 0.001%에 해당하는 최고 등급(챌린저)을 받았어요. 국내에서 중학생이 이 등급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죠. 그걸 계기로 '이 길로 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공부 머리가 아까워 반대하던 어머니도 '0.001%'라는 숫자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엄마는 언제 0.1% 안에라도 들어본 적 있느냐' 하는데, 말문이 턱 막히데요. 그날로 100만원짜리 컴퓨터 사 주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했죠, 뭐." 어머니 조인순(48)씨의 말에 승록이는 "그때 한창 사춘기였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이후 고등학교를 한 달 만에 자퇴하고, 하루 평균 13~14시간가량 게임에 매진하며 실력을 쌓다가 중국 측 제의를 받고 프로에 데뷔했다.
그는 "기부를 결심한 데는 부모님의 영향도 컸다"고 했다. 아산에서 함께 광고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는 부모님은 봉사와 기부에 적극적이다. 아버지 강연식(53)씨는 아산 지역 봉사단에서 5년째 독거노인이나 저소득층을 찾아가 돕는 봉사를 하고 있다. 어머니도 20년 가까이 매달 복지관, 난민 단체 등에 꾸준히 10만~15만원씩 기부금을 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라서인지, 자연스레 '언젠가 돈을 벌면 꼭 기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혔다고 했다. 강연식씨는 "나 역시 고향인 경남 남해에서 어려운 사람들 집에 불러다 자주 밥 먹이곤 했던 아버지를 본받아 봉사를 시작하게 됐다"며 "아들까지 3대째 좋은 일을 대물림하는 것 같아 뿌듯하다"고 했다.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지만, 아직도 게임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잖아요. 말 그대로 매일 게임하는 것이 직업인 저도, 이렇게 좋은 일도 할 수 있다는 걸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요."
아너 소사이어티 가입 문의·상담 080-890-1212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협찬
[양승주 기자 zo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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