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기적의 쌀 '통일벼' 왜 농촌은 더 힘들어졌나? + 70년대 '쌀 덜 먹기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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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23.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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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쌀, 통일벼


● 기적의 볍씨, 희농1호


"나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를 입에 달고 살던 박정희는


집권 초기부터 

식량 증산에 고심했다.


당시에는 쌀밥을 배불리 먹는 것이

체제 우위의 상징이었다.


특히 김일성은 

이렇게 말했다.

(경향신문, 경향신문 50년사 p.294~295)


 김일성

"쌀이 곧 공산주의입메다."


 김일성

"모든 인민이 이밥에 

고깃국을 먹는 날을 만들갔습메다."


그런 김일성이 1963년 10월 

남한에 식량을 원조해 주겠다고 제의했었다.


당시 북한은 증산 정책을 통해 

쌀 생산량을 급격히 늘리던 시점이었다.


반면에 남한은 

'쌀 아껴먹기 운동'을 하며


빈 땅·자투리땅·논둑에까지

'콩 심기 운동'을 해야 했던 상황이었으니, ☞ 


정부가 느꼈던 

굴욕감이란 엄청났다.


때문에 박정희는 무엇보다 

(多) 수확 쌀 품종에 총력을 기울였다. 


1965년 대통령 접견실에서

박정희는 각료에게 이렇게 자랑했다.


 박정희

"우리 이제 보릿고개 넘길 

효자 하나 생겼어."


그러더니 한쪽에 세워둔 

유리상자 속의 볍씨를 가리켰다.


 박정희

"이게 바로 그거야.

알도 많고 병충해에도 강해."


그것은 중정 요원들이

1964년 이집트에서 훔쳐온 볍씨였다.


이집트에서 일반 쌀보다

수확량이 30% 이상 많다는,


기적의 쌀 '나다(Nahda)'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중정부장 김형욱은 요원들을 시켜서

 

두꺼운 책에서 표지만 남기고

안쪽을 도려낸 뒤 


그 속에 볍씨를 채워

항공 소포로 밀반입해 왔던 것이다.

(중앙일보, 실록 박정희 p.144~145)


박정희는 훔쳐온 볍씨에

너무도 기뻐,

 

자신의 이름 끝자를 따서

'희농1호'라는 이름을 붙였다.


 박정희

"하하하. 희농1호."


기뻐하기는 

김형욱도 마찬가지였다.


 김형욱

"봤어? 내가 제2의 문익점이래도."


그런 희농1호를, 박정희는 언론에

'기적의 볍씨'라고 밝히면서


일반 농가에서 

재배하도록 했다. (67년)


 박정희

"음.."


하지만 이게 웬걸!

결과는 참담했다.


종자곡(씨받이)도 거두지 못할 만큼

흉작이 든 것이다.


"'나다'가 이집트에서는 

고수확 품종이었지만,"


"우리 나라 기후와 토양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박정희

"아놔.."



● 진짜 기적의 볍씨, 통일벼


60년대에 미국은, 가난한 국가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며 


공산주의 확산을 봉쇄하기 위해

개발도상국들에 막대한 경제원조를 했다.


 케네디

"빈곤에 시달리는 전 세계 국민들을

미국이 돕겠슴돠."


그리하여 미국의 지원으로 필리핀에 

'국제쌀연구소'가 문을 열게 되었으니,

▲ 필리핀의 국제쌀연구소


이곳 연구소에 

서울농대 허문회 교수도 들어갈 수 있었다.


허 교수는 여기서

한국의 기후와 토양에 맞는 


'기적의 쌀'을 만들고자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게 된다.


참고로 벼 품종은 

크게 인디카와 자포니카, 둘로 나눌 수 있는데

▲ 자포니카 (좌), 인디카(우)


'자포니카'는 낟알 길이가 짧고 

밥을 하면 찰기가 있는 반면,


'인디카'는 낟알 길이가 길고 

밥에 찰기가 없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인디카는 자포니카에 비해 

수확량이 월등히 많았다.


때문에 1920년대부터 일본 학자들은

자포니카와 인디카의 교잡을 통해 


자포니카의 맛에 

인디카의 생산량을 가진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내고자 

갖은 노력을 다 해봤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인디카와 자포니카의 교잡은 

유전적으로 거리가 먼 종끼리의 교잡으로, 

▲ 자포니카 (좌), 인디카 (우)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노새가 


새끼를 낳을 수 없는 것처럼 

'불임'의 문제가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허 교수 역시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나 결국 

신품종을 개발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서... 성공이다!"


허 교수는 

성공 비법을 이렇게 밝힌다.


 허문회

"자포니카도 인디카도 아닌

중간 종을 먼저 자포니카 종과 결합시키고.."


 허문회

"그걸 인디카 종과 결합했더니

신기하게 불임 문제가 사라졌습니다."



 허문회

"보통 벼(자포니카)는 이삭당 낟알이 80~90개였지만

신품종은 120~130개나 됐죠."


 허문회

"키가 작고 줄기가 단단해

잘 쓰러지지도 않고요.." 


이런 신품종 개발 사실에

누구보다 기뻤던 것은 박정희였으니,


1970년 연두기자회견에서

이런 사실을 대대적으로 밝혔다.


 박정희

"이번에 진짜 기적의 볍씨인

통일벼를 개발했습니다."


 박정희

"통일벼는 일반 쌀보다

수확량이 40% 더 높다고 합니다."


그렇다.

이번에는 '진짜 기적'의 볍씨였다.


지난번 '기적'의 볍씨라던

희농1호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 통일벼의 문제점들


하지만 통일벼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니,


일단 맛이 없었다.

쉽게 말해 인디카 맛이었다.


하지만 71년 2월, 

정재계 인사들이 참석한 통일벼 시식회에서


박정희는 무기명으로 작성하게 되어 있는

설문지의 밥맛 평가란에,


'색깔'과 '밥맛'이 '좋다'에 동그라미를 치고

'자기 이름'을 적어 넣었다.



"뜨아!"


그다음부터 아무도 통일벼의 밥맛에 대해

시비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홍구, 유신 p.299)


"각하가 좋다면 좋은 게지 뭐."


하지만 일반인들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가 못했으니,


"밥에 찰기가 하나도 없고

푸석푸석하니 맛대가리가 전혀 없구먼."


"그러게. 이거 먹을 바엔

차라리 꽁보리밥이 낫겠네."


"볏짚도 짧고 부실해서 

새끼를 꼴 수도 없고.." 


"심지어 여물은 

소도 맛없다고 안 먹어."

 

이런 사정을 농림부장관도

박정희에게 귀띔을 해줬다.

(중앙일보, 실록 박정희 p.148)


 김보현

"각하, 맛도 맛이지만

볏짚의 키가 작아.."


 김보현

"지붕 이엉을 엮는데도

문제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자 

박정희는 투덜댔다.


 박정희

"밥맛을 따지는 건 사치야.

먼저 배불리 먹는 게 중요하지."


 박정희

"또 지붕은 개량하면 되지 

무슨 소리야?"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통일벼가 초가집을 없애고


농촌 지붕을 신속히 개량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에잇! 쓸모도 없는 지푸라기."


▲ 일반벼(좌), 통일벼(우)


여기에 통일벼는

태생적으로 병충해에 약했다.


신품종은 원래 개발되더라도

실용화 단계까지는


통상적으로 10년 가까운

테스트를 거쳐야만 한다.


하지만 하루빨리 식량의 자급자족을 

이뤄야 한다는 절박함에 


통일벼는 그런 단계를 건너뛰고 

일반에 보급되고 말았던 것이다.


"원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품종은

유전적 다양성이 부족해서,"


"병충해에 취약하기 마련임."


때문에 통일벼는 비료와 농약을 

많이 쳐야만 했고


덕분에 논에서 메뚜기와 미꾸라지가 

사라졌다는 얘기도 나왔다.


1974년 10월

(김영미, 시골소녀 명란이의 좌충우돌 서울살이 p.22~23)


오늘은 벼 베는 날,

논두렁에서 새참을 하고 있을 때였다. 


"올해도 풍년은 풍년이네.

통일벼라 수확량은 확실히 많기는 허니께."


"수확량만 많으면 뭐 혀."


"통일벼는 병충해가 많아서

그동안 농약을 얼마나 쳐 댔나."


"거기서 비료값이며 품삯까지 빼고 나면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모를 판인디.."


"그러게, 농사지어 봐야 

빚만 자꾸 늘어나니께.."


아저씨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자니 

나까지 기운이 쏙 빠지는 것 같았다.


새참을 다 먹고 나서

동생이랑 메뚜기를 잡았다.


그런데 논 여기저기에 톡톡 튀어야 할 

메뚜기가 영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한두 마리만 

눈에 띌 뿐이었다.


메뚜기를 몇 마리밖에 잡지 못한 걸 보고 

덕만 아저씨가 끌끌 혀를 찼다.


 덕만

"하도 농약을 쳐서 

메뚜기도 씨가 말랐구먼."


 덕만

"그 독한 농약에 

메뚜기인들 배겨 내겄냐." 


여기에 통일벼는 

냉해에 취약하다는 단점도 있었으니,


가을 서리를 맞지 않으려면

모를 일찍 내야 했고, 수확도 앞당겨야 했다.


그래서 못자리에 비닐을 씌워 

봄추위를 막았는데, 


이게 비닐하우스의 시초였다.

문제는 그게 다 빚이었다.


"뭔 넘에 쌀이

돈이 이리 많이 들어가는겨."



● 녹색혁명


하지만 정부는 일선 공무원들을 

농촌 곳곳에 파견하며


통일벼 재배 면적을 늘리려 

분주히 돌아다녔다. 


"이거 한번 심어보드라고."


그러나 1972년

첫 수확 당시,


추수를 앞두고 닥친 냉해 때문에 

통일벼는 큰 흉작을 기록하고 말았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렇게 성토했다.

(조선일보, 1972년 10월 11일자)

"미숙한 품종에 겹친 천재지변이다."


그러나 

유신의 힘은 막강했다.


1주일 후 유신이 선포되자

조선일보는 재빨리 태도를 바꿨으니,



"통일벼의 엄청난 수확량 판명!"

(조선일보, 1972년 10월 31일자)


대부분의 언론들도 마찬가지였다.

죄다 통일벼를 칭찬하고 나섰다.


그리고 유신 첫해인 73년도의 수확량은 

꽤 만족할만 했고


74년에는 쌀 생산량이 

3천만 석을 돌파하더니


3년 뒤인 77년에는

4천만 석을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자포니카에 비해 37%나 높아


77년에는 한국의 단위면적당 쌀 생산량이 

세계 최고를 기록할 정도였다.


"와! 1헥타르당 5톤!"


이 기간 중 농가의 명목소득도

크게 증가했다.


통일벼를 심었던 

초기 5년 동안 (1972~1976년)


1차산업의 성장률은 평균 5.9%로

계획했던 4.5%보다 높았다.


당시 매년 농촌인구가

2%씩 줄어들었던 것을 감안하자면


농촌의 1인당 소득은

매년 8% 씩 상승했던 것이다.

 


다만 그렇더라도  

전국 평균인 11.2%에는 미치지 못했고


평균 13%씩 성장한 도시에 비해 

매년 약 5% 씩 더 낮았다. 


"결코 도농 격차가 

좁혀진게 아니라는 말."


농촌소득이 크게 증가했지만

도시소득은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의 그래프의 맹점은

농촌은 주로 대가족, 도시는 주로 핵가족인데


'1인당 소득'이 아닌

'가구소득'으로 비교를 했다는 점이고


1977년 이후로의 자료는 

애써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식의 선동용 그래프는.."


그렇더라도 통일벼 재배로

농가소득이 늘어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통일벼는 맛이 없어

시장에서의 경쟁력은 떨어졌지만,


정부는 추곡수매와 

이중곡가제를 통하여


통일벼 재배 농가에 

확실한 인센티브를 부여했던 것이다.

▲ 통일벼를 사들이는 정부 관리 : 그래서 통일벼는 흔히 '정부미'라고 불렀다


"추곡수매가 뭐임?"


"농민들이 추수한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파는 게 아니라.."


"시장을 거치지 않고

정부에게 직접 파는 것."



"이중곡가제는 뭐임?"


"정부가 농민들에게 비싼 값에 사들여

농가 소득을 보장해주고.."


"대신 도시민들에게 팔 때는

싼값에 팔아 물가를 안정시키는 방법."


"그럼 이중곡가제는 농민과 도시민

모두에게 좋은 제도인가?"


"아냐. 정부는 그만큼 재정부담이 커지는데,

이게 결국 세금으로 메꿔지는 것임."


"즉 사람들은 그만큼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하지만,

당장은 못 느끼는 거지."



"그냥 농가소득 높아지고,

물가가 낮으니깐 일단 기분이 좋은 것일 뿐." 


때문에 정부는 그토록 찾으려 애썼던

기적의 쌀을 드디어 확보하는 듯했다.


박정희는 이를 두고 

'녹색혁명'이라고 감격하기까지 했다.



● 알고 보니 빚더미


하지만 통일벼의 성공이

역설적으로 통일벼의 몰락을 재촉했다.


공무원들은 증산 목표 달성을 위해

일반벼의 못자리까지 짓밟아가며


통일벼를 심으라고

열심히 닦달을 했다. 


 공무원

"통일벼를 심으라니깐 그러네.

값은 정부가 다 쳐준데도."


때문에 농가 대부분은

일반벼를 포기하고 통일벼를 심어야만 했다.


오직 농민들은 스스로가 먹을 쌀만

따로 아키바레(자포니카종)로 심었을 뿐이다.

(한홍구, 유신 p.300)


하지만 정부의 고미가(高米價)정책은

오래 가지 못했다.


73~74년 

석유파동이 터지고


정부가 중화학공업을 

육성한다 뭐다 해서

▲ 포항제철 : 73년 준공


정부의 재정상태도 

좋지 못한데,


언제까지 통일벼를 장려하겠다고 

높은 값으로 쌀을 사들일 수는 없는 법.


결국 농민들은,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값으로 쌀을 팔아야 했다.


"70년대 후반 

평균 물가상승률이 20%를 넘어서.."


"매년 15%씩 쌀값을 올려줘도, 

결국은 농민 손해."


반면에 통일벼는 

비료와 농약, 비닐하우스 등


일반벼에 비해 생산비가

월등히 많이 들어갔다.

 

그 결과 농가부채는

10년 사이에 27배가 증가하게 된다.

(한홍구, 유신 p.301)


물가상승률을 감안해도

10년 사이에 부채는 6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 시기별 농가 부채 비교


때문에 농민들은 

의구심이 들었다.


"참말로 이상혀.

해마다 사상 최대의 풍년이라 하는데.."


"왜 살림살이는

갈수록 빡빡해지는 걸까?"


어쨌거나 통일벼는 

수확량 하나는 알아줄 만했다.



▲ 사실 60~70년대는, 지나치게 쌀밥에만 집착한 탓에 쌀이 부족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을 

130kg이라고 할 때.."


"총 500만 톤의 쌀이 필요했지만,

1977년에는 660만 톤을 생산했던 것임."


때문에 1977년에는, 남아도는 쌀을

최초로 해외로 수출하는가 하면,


14년 만에 다시 

쌀 막걸리의 제조를 허용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1977년 11월 8일자)


또 대북 쌀 지원을 제의하는

호기까지 부릴 정도였다. (77년 1월)



● 유신·노풍


그 사이 육종학자들은 

열심히 통일벼를 개량하고 있었다.


연구의 핵심은

'밥맛'이었다.


그리고 1977년 밥맛을 개선한

'유신'이 새로 나왔다.

 


그리고 또다시 공무원들의 

'재배면적 늘리기' 충성경쟁이 벌어졌다.


"이게 요즘 새로 나온 최고 품종이에요.

그러니 이번에 유신벼로 심어보세요."



하지만 유신을 심은 농민들은

그해 농사를 모두 망치고 말았고


농민 

"아놔, 이렇게 병충해에 약해서야."


유신은 1년 만에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 뒤를 이어 '노풍'이라는 

신품종이 나왔다.


박정희는 1977년 1월 

농수산부 연두 순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아일보, 1977년 1월 22일자)


 박정희

"앞으로는 신품종이 개발되면 

연구원의 이름을 붙여,"


 박정희 

"대대손손 그 영예가 

지속될 수 있도록 하겠슴돠."


그래서 박노풍 씨가 발명한 신품종이

'노풍'으로 명명된 것이었고


78년 정부는 

'유신'의 실패를 가리기 위해


새로 개발된 노풍을 

대대적으로 재배하게 했다.


"이게 바로 기적의 쌀, 노풍!

밥맛도 좋고 병충해에도 강하다능."


"어서 많이들 심으라능."


하지만 이게 웬걸.

78년에 한반도를 강타한 '변종도열병'은


노풍을 전부

쭉정이로 만들어버렸다.


농민

"뜨아!"


정부의 말만 믿고 

노풍을 심었던 농민들은


그야말로 막대한 타격을 

입어야 했던 것이다. ☞ 참고

농민


때문에 대대손손 

영예가 지속되라는 뜻으로 붙여진 


'노풍'이란 이름은,

농민들의 원한의 상징이 되고 말았고

(동아일보, 1978년 9월 26일자)


농민 

"에라! 똥물에 튀겨 죽을 노풍!"


노풍 피해가 덮친 78년에만 

무려 78만 명의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대부분 도시빈민의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이어서 1979년과 1980년에도 

통일벼는 엄청난 흉작이었다.


그래서 이후로 통일벼 계통의 벼를 심는 

농가는 급격히 사라지고


다시 자포니카를 심는 

농가가 슬그머니 늘어나기 시작한다.


"우리 기후와 토양에 맞는 게 최고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1979년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통일벼 재배를 강요했던 

'강제농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편 비슷한 시기 

김일성도 통일벼의 증산에 자극받아


단위면적당 생산량을 높이는 데 주력하여

80년대 초반 북한도 


한때 단위면적당 생산량에서

세계 최고를 기록했었다.

(한홍구, 유신 p.304)


하지만 90년대 고난의 행군에서 밝혀지 듯이

그 결과는 참담했다.




쌀 덜 먹기 운동


● 쥐잡기 운동


통일벼 보급이 

쌀의 증산을 위한 노력이었다면


70년대 혼분식 장려운동과

쥐잡기 운동은


쌀을 아끼려는 

'절미운동'이었다.


5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는 '쥐잡기 캠페인'을 벌였다. ☞ 


 

"쥐에 기생하는 벼룩이

장티푸스, 이질과 같은 각종 병균을 옮깁니다."


"그러니 쥐덫을 놓고 쥐약을 뿌려

쥐를 박멸합시다."



하지만 쥐를 박멸해야할 

보다 큰 이유는 


병균을 옮기는 것보다

쌀을 훔쳐먹는다는 점에 있었으니,


실제로 60년대 후반

우리나라 쌀 생산량의 6%가 넘는


연간 150만 석의 쌀을 

쥐가 갉아먹고 있었다. ☞ 


여기에 쥐의 번식률은

소름 끼칠 정도로 엄청나서


쥐 한 쌍은 불과 1년이 지나면

1250마리가 되었다.


때문에 60~70년대 쥐는

그냥 혐오스러운 동물이 아닌


국민의 생존을 위협하는

증오의 대상과도 같았으니,


전국적으로 쥐잡기 운동이

정부 주도하에 실시됐는가 하면


1970년부터는 

'전국 쥐잡기 대회'가 열려


우승자에게 상품과 더불어

표창장이 수여되기도 했다.


대학가에서도 

쥐를 박멸하기 위한


학생들의 

열띤 토론이 있었을 정도로


'쥐잡기운동'은 

그야말로 온 국민의 관심사였다. 


심지어 학교에서는 '쥐잡기 숙제'도 있었으니, 

당시의 모습은 이랬다.


1974년 9월

(김영미, 시골소녀 명란이의 좌충우돌 서울살이 p.16~17)


'쥐 꼬리 열 개 이상 가져오기.'

왜 이런 숙제로 골치 아프게 하나?


쥐가 먹어 치우는 

식량이 어마어마해서


쥐를 모조리 

없애야 한다는 거다.


쥐약을 놓든 덫을 놓든

어찌어찌 쥐를 잡는다 해도


꼬리는 징그럽게

어떻게 자르란 말인가.


친구들은 오빠가 도와주고

삼촌이 해 준다는데... (중략)



그런데.. 

휴, 다행이다.


치봉이가 라면 봉지에 쥐 꼬리 열 개를

담아 줘서 숙제를 낼 수 있었다.


살다 보니 치봉이가 

고마울 때도 다 있다.


그런데 미양이네 누렁이가 

쥐약을 먹었다.


쥐약 놓기 전에 

목줄을 단단히 묶어 놨는데


밤사이 목줄이 풀리면서 

쥐약을 먹었다고 한다.


엊저녁에 미양이네 집 마루 밑에서

입에 거품을 문 채 


헐떡이는 누렁이를 봤는데,

오늘 결국 죽고 말았다. 



● 혼식먹기 운동


정부는 쌀이 부족한 만큼, 

다른 잡곡을 먹도록 장려해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쌀밥만을 선호하고 


보리 등의 잡곡을 천시한 나머지

혼식 먹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쌀을 중시했다.


조선시대에는 

물을 대기가 쉽지 않은 지형이 많아


논보다 

밭이 많았기 때문에

▲ 자료 : 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 (한국고문서학회)


'쌀만'이 우리의 주식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독 '쌀밥'에 집착했던 것이다.


영양학적으로 쌀이 

다른 곡물보다 우월한 것도 아닌데 ☞ 참고


쌀에 집착했던 것은

일단 맛이 좋았기 때문이다.


같은 양이라도

쌀은 다른 곡식보다 비싸게 팔렸다.


15세기 중엽 세종 때

쌀의 가치는 일반 곡물의 2배로 평가했고


임진왜란 당시에 쌀은

보리 가격보다 무려 6배나 더 높았다. ☞ 참고

▲ 북부지방에서 주로 먹었던 조밥

 

이러한 '쌀 사랑'은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되었으니,


남북한은 한때

쌀 생산을 두고 체제경쟁까지 했었다.

 

▲ 북한은 아직도 쌀에 집착하고 있다 : '쌀은 곧 공산주의다!"


"천 것들이나 밥에다가 

잡곡을 섞어 먹는 거 아님?"


때문에 국가는 

대대적으로 캠페인을 벌여야 했으니,


이때 반드시 들어가는 문구는

혼식을 하면 '건강'이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국의 학교마다

'꽁당 보리밥'과 같은 동요를 보급하는가 하면

(손해용, 다시 쓰는 경제 교과서)


"꼴보다도 더 맛좋은 꽁당보리밥~

보리밥 먹는 사람 신체 건강해~♬"


연예인들을 동원해서

보리밥 먹기 홍보를 하기도 했다. 


 엄앵란

"농민들이 힘들게 생산한 보리를 

도시 사람들이 소비하지 않는다면.."


 엄앵란

"애써 생산한 보람이 

없지 않겠어요?"


 엄앵란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보리 혼식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1969년부터 정부는 

아예 매주 수·토요일을 


쌀밥을 먹지 않는

무미일(無米日)로 고시하기도 했다.


 

"쌀 3알에 

보리 1알을 먹읍시다!"


당시 대한뉴스다. ☞ 


"온 국민이 혼분식 운동에 

참여하는 가운데.."


"나는 모르쇠로 나가는 

국민들이 있으니 한심한 일입니다."


"특히 온 국민이 쌀 3알에 보리 1알을

외치고 있는 이때에.."


"버젓이 쌀을 튀겨 

심심풀이로 뻥튀기를 먹는 강심장도 있고,"


"개밥으로 흰 쌀밥을 주는 

몰상식한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에 언론도 나서서

'혼식의 과학'이니 


'보리밥 도시락 맛있게 싸려면'과 같은 

기사 등을 싣고 있었다.

(이승호, 옛날 신문을 읽었다 1950~2000 p.179)

▲ 혼분식 요리강습 (1973년)


하지만 '무미일'을 실시했음에도

쌀 부족 현상이 개선되지 않자,


박정희는 72년 12월 

농림부장관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중앙일보, 실록 박정희 p.149)


 박정희

"현재 주 2회의 무미일을 

주 5회로 늘리고.."


 박정희

"벌칙을 강화하여 음식점에도

혼식을 팔도록 하세요."


때문에 이후로 음식점에서도 

하얀 쌀밥을 팔지 못하게 된다.


"최소한 10% 이상 잡곡을 섞어서

공기밥을 제공하라능."


"위반시 영업정지!"


하지만 너무 까탈스럽게 

적용됐던게 문제였으니,


일식집의 생선 초밥에도

잡곡을 섞도록 강제했던 것인데,


당시 일본인 관광객들이 

잡곡이 섞인 스시에 기겁을 하자

▲ 70년대 일본 관광객 : 유독 30~50대 남성들이 많았다


관광협회는 1973년초 

보리로 만든 스시를 들고 


농림부장관을 찾아가

이렇게 항의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중앙일보, 실록 박정희 p.149)


관광협회 

"이게 생선초밥입니까?

한번 먹어보세요."



● 분식 먹기 운동


밀가루 소비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물자 탓에

크게 늘어나서

▲ 미국의 밀가루는 한국에 '악수 문화'를 정착시키기도 했다 ☞ 참고


밥과 국 위주였던 우리 밥상 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쌀밥만을 중시하는 습성 때문에


정부에서는 쌀 비를

밀 소비로 돌리기 위한


여러 가지 분식먹기 캠페인을

거행해야만 했으니,


수·토요일로 공식화된

무미일 중에서도


매주 수요일은 '분식의 날'이라고 해서

빵이나 국수 등을 먹도록 적극 장려했다.


당시의 명목상 취지는 

'식생활 개선'이었다.


1963년의 홍보 뉴스다. ☞ 


"농림부직원들은 점심 시간에

도시락 대신 우유 한 병, 빵을 먹고 있는데.."


 

"이것은 취급이 간편할 뿐만 아니라,

영양도 100%여서 많은 호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


 


1969년의 홍보 뉴스다. 


"비용이 적게드는 국수를 마련해서

하루 한끼니 분식을 권했다고해서,"


"입맛살을 찌푸릴 남편은 

한 분도 안 계실 줄 믿습니다만.."


"게다가 쌀에 부족한 영양소나

두뇌활동을 촉진하는 비타민 보급을 위해서도," 


"분식 섭취는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이런 밀가루 소비를

획기적으로 촉진시킨 것은,


뭐니 뭐니 해도

63년에 처음 생산된 라면이었다.


라면은 독특한 맛과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를 얻으며


가정은 물론, 산업체와 군대 끼닛거리로 

빠르게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 60~70년대 새로 나온 식품들


다만 정부의 시책을 따르려고

지나치게 오버하던 교사들도 있었으니,


수필가 이승호 씨의 얘기다. 

(이승호, 옛날 신문을 읽었다 1950~2000 p.182~183)


70년 초반 J초등학교 5학년 시절,

담임 선생은 이런 말까지 했다.


 선생

"서양 사람이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것은

밀가루로 만든 빵을 먹어서 그렇다."


그러자 아이들 사이에서는 

쌀밥을 먹으면 미개한 것이고, 


밀가루를 먹으면 

문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아이가

그게 아니라고 부정하고 나섰다.


"선생님, 우리 아버지가 그런데요."


"사실 쌀이 밀가루보다 훌륭하댔어요.

담임 선생님 말은 다 거짓이래요."


그러자 반 아이들은 다 놀랬다.

분노한 선생은 그녀석을 매우 쳤다.


이렇게 

소리소리 지르면서 말이다.


 선생

"임마, 네 아버지가 말이 맞아,

내 말이 맞아?" 



● 도시락 검사


70년대 교사들은 학생들의 도시락을

일일이 검사를 했다.


당시 정부가 제시한

권장 혼식률은 30%였지만,


학교마다 '과잉 충성' 때문에

그 기준치가 달랐다.


당시 도시락 검사의 모습이다. ☞ 기사

(동아일보 1976년 6월 12일자)

▲ 학생 도시락 혼분식 과잉단속 : 성적에 반영, 처벌까지 


A여중의 경우 조회시간에 

학생들의 도시락을 일제히 검사, 


잡곡을 50% 이상 섞지 않은 학생은 

1주일 동안 실내 청소를 시키고


해당 학부모를 학교로 불러 

이행각서를 쓰게 하고 있다.


B여중에서도 담임교사가 

매일 도시락 점검을 하여 


이행이 안된 학생은

도덕 성적에 반영시키고 있었다.


C중학교와 D여중에서는

학생들의 혼식 성적을 통지서에까지 기입,


부모의 확인도장을 

받아오게 하고 있으며


E여고 등에서는 

학급별 혼식 이행 통계를 작성, 


잡곡을 가장 많이 섞는 

학급에 대해 표창을 하고 


도시락을 싸오지 않은 학생들은 

혼식 불이행자로 간주, 교실 청소 등의 벌을 주었다.


F국교의 경우는 

혼식 비율을 50% 이상으로 높여 


불이행 학생들의 도시락을 

압수하기도 했으며


극빈 학생으로 

점심을 갖고 오지 못하는 학생들도


불이행자로 간주, 

어린이들에게 열등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1975년 3월 

(김영미, 시골소녀 명란이의 좌충우돌 서울살이 p.38~39)


아침에 밥 안칠 때 

보리쌀 섞는 걸 깜빡했다. 


안 하던 짓을 하면 꼭 문제가 생긴다더니,

꼼짝없이 손바닥을 맞게 생겼다.


전학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게 무슨 창피인가.


그런데 얌전하기만 한 짝꿍 은경이가 

자기 도시락의 보리를 내 도시락으로 옮기자고 했다.


나는 얼씨구나 하고 은경이 도시락의 보리를 

내 도시락으로 옮겼다.


도시락 검사 때, 

들킬까 봐 가슴이 콩닥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이 범인을 조사하는 

형사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 

"너희는 보리가 너무 적은데.. 

밥을 뒤집어 봐."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은경이의 가는 한숨 소리도

파르르 들려왔다.


그렇게 진실은 홀랑 밝혀졌다.

은경이와 나는 손바닥을 세 대씩 맞았다.


우리는 손바닥을 맞고도

유리창 청소를 하라는 벌을 덤으로 받았다. 


수필가 이승호 씨는 

70년대 도시락 검사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이승호, 옛날 신문을 읽었다 1950~2000 p.182~183)


1976년 서울 Y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었다.


어머니가 그날 아침 깜빡해서

쌀밥을 짓는 실수를 했다.


그런데 하필 공포의 훈육주임이

직집 우리 반에 왕림했다.

 


그리고 내 도시락의 흰쌀밥을 보더니 

나를 매우 쳤다.


한 10분간 이렇게 

소리소리 지르면서 말이다.


 훈육주임 

"이 애국심이라곤 

코딱지만큼도 없는 놈!


 훈육주임

"나라 걱정 하나도 안 하는 놈!" 


만쭈리
만쭈리 교육·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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