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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때의 상선과 잠수함의 충돌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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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28.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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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의 주인공인 급양함 하야사키가 속해 있는 키네사키급 급양함. 


1943년 2월 7일 새벽, 미 해군의 가토급 잠수함 그라울러(SS-215)는 축전지의 충전을 위해 태평양 한가운데에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라울러는 1942년 7월 단함으로 알류산 근해에 돌입하여 혼자서 일본군 구축함 1척을 격침시키고 2척을 대파시키는 전과를 올린 배였죠. 그 때 1척의 함선이 그라울러를 향해 접근해 옵니다. 이 함선은 일본군 급양함 하야사키(早埼)로, 냉동고를 갖춘 일본군의 식량 전문 수송선이었습니다. 이 배는 어떤 호위함 없이 혼자 요코스카에서 라바울로 항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라울러에 대항할 수단이 전무했고, 결국 하야사키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라울러를 향해 충각을 감행하기로 합니다.


그라울러는 하야사키에게 발견되기 전에 레이더로 이미 하야사키의 존재를 알아챘습니다. 하지만 그라울러의 함교의 하워드 길모어 함장을 비롯한 당직사관들이 하야사키의 움직임에 신경을 너무 곤두세운 바람에 반격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뒤늦게 하야사키의 충각 의도를 알아챈 길모어 함장은 급히 왼쪽으로 방향전환을 명령했지만(Left full rudder!) 그의 명령은 이미 늦었고, 결국 그라울러는 17노트의 속력으로 하야사키의 중앙부에 충돌하고 맙니다.

 

하야사키와의 충각으로 완전히 꺾여버린 그라울러의 함수.


충돌의 여파로 그라울러의 함수는 위 사진과 같이 왼쪽으로 18피트에 걸쳐 꺾여 버렸고, 함수 어뢰발사관 또한 사용 불능이 됩니다. 또한 충돌 자체의 충격으로 그라울러 자체가 순간적으로 50도나 기울었습니다.

하야사키는 이렇게 전투능력을 거의 상실한 그라울러를 곱게 놔두지 않았습니다. 배의 얼마 안되는 무장인 8cm 고각포와 기관총을 그라울러의 함교에 난사해 함교에 있던 장교 1명과 수병 1명은 즉사하고 길모어 함장을 비롯한 지휘부 몇몇도 중상을 입습니다. 부함장도 사령탑에 머리를 다쳐 가벼운 뇌진탕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길모어 함장은 다친 몸으로 함교에 있는 승조원 모두에게 '함교에서 떠나라!(Clear the bridge!)'라고 명령합니다. 그의 신속한 조치로 그라울러 함교의 모든 승조원들은 배 안으로 피신할 수 있었고, 함교에 남은 것은 길모어 함장 뿐이어서 모두가 그의 대피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길모어 함장은 자신의 운명이 이미 다했다 판단했고 마지막 명령을 내립니다.


'잠항하라!(Take her down!)'


즉, 함교에 있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그라울러와 그 안에 탄 부하들을 지키려 한 것이었습니다. 중상을 입은 자신이 배 안으로 대피하면 오히려 시간이 지체될 뿐이라고 판단한 거죠. 결국 이 명령에 따라 부함장은 해치를 닫고 잠항했고, 그라울러는 저녁이 되어서야 물 위로 올라옵니다. 위치는 거의 그대로였지만 하야사키는 이미 라바울을 향해 제 갈 길을 가버려서 그 자리에 없었고, 길모어 함장의 유해도 바다에 쓸려갔는지 흔적도 남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항해가 가능했던 그라울러는 호주 브리즈번까지 후퇴하여 수리를 받아야 했죠. 이 공훈으로 길모어 함장은 명예 훈장을 사후 추서받습니다.


참고로 그라울러의 배수량은 만재 1500톤 남짓,1 하야사키는 만재 951톤으로 무게로만 따지자면 그라울러 쪽이 더 무거웠습니다. 그럼에도 함수가 왼쪽으로 심하게 꺾어버려 더 이상 정상적인 작전수행이 불가능했습니다.

하야사키 역시 손상을 입긴 했지만 라바울에서 응급수리 잠깐 하고 일본으로 돌아와 요코스카 항에서 한달 남짓 본격적인 수리를 받고 다시 완전히 복귀했습니다. 이 배는 전후까지 살아남아 소련에 전후 배상함으로 인도됩니다.




1. 수상 기준, 수중 기준으로는 2424톤.
무수천
무수천 교육·학문

김민준, 부산 장전동 금강로 27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