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주주자본주의 좇은 보잉사의 ‘희비극’ [김학균의 금융의 속살]

입력
수정2020.04.12. 오후 9:19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욕망을 숭배한다. 욕망하지 않는 자본은 자본이 아니다. 자본의 욕망은 자기 증식에 있다. 자본의 인격적 표현인 자본가들이 주로 탐욕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혹자는 말한다. “그렇게 벌었으면 됐지, 무슨 욕심으로.” 자본의 속성을 모르는 말이다. 욕망이 없었더라면 애당초 그 정도 벌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욕망을 옹호한다. 독과점 규제를 비롯해 불공정한 경쟁을 막을 수 있는 규칙과 경쟁에서 도태된 이들이 받을 충격을 완충시켜줄 수 있는 사회안전망을 갖춘다면 자본주의는 괜찮은 시스템이다.

세계 최대 항공우주기업인 미국 보잉사가 파산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보잉 주가는 최근 6개월 사이에 75%나 급락했고, 부도위험을 보여주는 CDS프리미엄도 급등했다. 대마를 죽일 수 없는 미국정부의 지원책이 나오면서 한숨 돌리고 있지만 당대의 우량주는 한순간에 부실기업으로 전락했다.

기업의 흥망은 늘 있는 일이지만, 보잉의 몰락에는 상식에 반하는 점이 많다. 보잉은 2019 회계연도에 6억3000만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최근 수년 새 보잉의 주력 생산기종인 737맥스 기종이 잇따라 추락했고,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올해도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이지만 보잉이 파산위기에 내몰릴 정도로 취약한 기업은 아니다. 작년부터 영업실적이 악화되고 있지만 그 이전에는 1998년부터 2018년까지 21년 연속 흑자를 기록했고, 그 기간 동안의 당기순이익 누계는 746억달러에 달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생각하면 한두 해의 실적 부진으로 보잉이 파산위기에 내몰렸다는 점은 상식적이지 않다.

보잉의 문제는 그동안 벌어놓은 돈이 회사에 쌓여있지 않다는 데 있다. 보잉의 몰락은 작년부터 시작된 영업부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량기업으로 불리면 돈을 잘 벌었던 이전 20여년 동안에 잉태됐다. 연속 흑자행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던 1997년 말 보잉의 총 부채는 250억달러였다. 이후 21년 동안 연속 흑자를 기록했지만 2018년 말의 총 부채는 1169억달러로 증가했다. 반면 같은 기간 자기자본은 129억달러에서 4억달러로 줄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연속 흑자를 낸 21년 동안 부채는 4배 넘게 늘었고, 자기자본은 96%나 쪼그라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비상식은 과도한 주주환원에서 비롯됐다. 보잉은 벌어들인 돈을 모두 주주들에게 돌려줬다. 배당금을 계속 지급했고, 자사주를 매입해 소각했다. 자사주 매입 후 소각은 자기자본을 줄인다. 이익만 자사주 매입에 사용한 것이 아니라 빚까지 내면서 자사주를 사서 소각했다.

보잉은 자본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런 행동을 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통적 제조업은 공급과잉에 시달려왔다. 미국의 주가는 얼마 전까지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지만 설비가동률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과잉생산이 존재한다면 사업기반을 조금 줄여도 당기순이익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의 효율성을 나타내는 ROE(자기자본이익률=당기순이익/자기자본)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ROE 계산에 사용되는 분모가 작아지기 때문이다. 빚까지 내면서 자사주를 매입했던 것도 경제적으론 합리적 선택이다. 최근과 같은 저금리 환경에서는 부채에 지급하는 이자율이 기업이 주주들에게 지급하는 배당수익률보다 낮았다. 보잉은 미국 증시에서도 손꼽히는 배당주였는데, 자사주를 매입해 소각하면서 남은 주주들에게는 더 큰 규모의 배당금을 지급할 수 있었다.

자본 효율을 높이기 위해 합리적으로 행동했지만 그 결과는 자기자본의 과도한 축소로 귀결됐다.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의 속성에 반하는 행동이 주주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셈이다. 자기자본은 위기 때 기업이 기댈 수 있는 안전망이다. 자기자본이라는 버퍼가 취약해진 21년 연속 흑자기업 보잉은 2019년 단 한 해의 손실로 자본잠식기업으로 전락했다. 몰락 한 해 전인 2018년 보잉의 ROE는 985%였다. 자기자본이 너무 작아졌기 때문에 나온 결과이다. 1000%에 육박하는 ROE가 희극이라면 한 해 만에 부도위기에 내몰린 21년 연속 흑자기업의 추락은 비극이다. 극단의 자본 효율성만 추구하며 주주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주주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

김학균 |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신문 바로가기▶ 경향신문 구독신청하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경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