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만이 가죽 소파를 산성 욕조로 바꿔놓을 수 있고 아기 침대를 치명적인 무기로, 휴대전화 배터리를 심장을 뚫는 포탄 파편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귀에 대고 중국을 상대로 한 무역 전쟁을 부추긴 피터 나바로(70) 백악관 무역·제조업 정책국장이 2011년 저서 ‘중국이 세상을 지배하는 그날(원제 Death by China)’에서 인용한 중국 전문가 론 바라(Ron Vara)의 말이다. ‘중국의 부상으로 미국이 파탄날 수 있으니 중국을 눌러버려야 한다’는 게 이 책의 요지다. 론 바라의 말은 나바로의 중국 위협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인용된다.
론 바라라는 인물은 나바로가 쓴 13권의 책 중 여섯 권 이상에 등장한다. 책에 쓰인 론 바라의 발언은 누가 봐도 중국 혐오 감정이 짙다. 나바로는 책에서 중국의 환율 조작, 지식재산권 도용, 미국 제조업 파괴 등을 주장하며 2001년부터 책 곳곳에 론 바라의 말을 가져다 넣었다.
이달 15일 대학 관련 정보와 뉴스를 다루는 미국 ‘고등교육 크로니클(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은 테사 모리스-스즈키 호주 국립대 일본·한국사 명예교수의 연구를 인용해 "나바로의 책에 나오는 론 바라는 실존 인물이 아니며 나바로가 만들어 낸 가상의 인물"이라고 밝혔다.
모리스-스즈키 교수는 나바로가 중국과 관련해 써온 거친 표현을 조사하던 중 그의 책에서 론 바라라는 이름을 계속 마주쳤는데, 아무리 추적해도 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나바로가 쓴 한 책에 론 바라가 1980년대 미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고 나왔으나, 하버드대에는 론 바라의 기록이 없었다. 모리스-스즈키 교수는 론 바라가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과정을 공부했다는 시기에 나바로가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를 받은 점을 의아하게 여기던 중, 론 바라란 성(Vara)과 이름(Ron)이 나바로의 성(Navarro)에 쓰인 영어 철자 순서를 바꿔서 만들어진 것을 알아챘다. 나바로가 인용했던 론 바라란 인물은 세상에 없는 가짜였던 것이다. 론 바라는 사실상 나바로의 가상의 자아라는 게 모리스-스즈키 교수의 결론이었다.
나바로는 고등교육 크로니클에 "론 바라는 내가 오랫동안 의견을 표명할 때 사용한 기발한 장치이자 필명이며, 순수하게 재미를 위한 것이지 사실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아니다"란 입장을 밝혔다. 자신의 책에 자신과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낸 것을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이 자기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한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 "눈에 빤히 보이게 숨겨놓았던 장난을 누군가 드디어 알아챈 게 재미있다"고도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CNN, 뉴욕타임스 등 미국 주요 언론 매체도 이를 크게 다루기 작했다. 지난해부터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는 미·중 무역 전쟁의 설계자 중 핵심이 대중(對中) 초강경파인 나바로이기 때문이다.
2016년 대통령 선거 중 트럼프 당시 공화당 후보는 중국을 상대로 무역 전쟁을 치러 이기겠다고 공약했다. 미국과의 무역에서 일방적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긴 중국을 손보겠다고 했다. 트럼프 후보는 ‘중국산 제품을 사지 말라’ ‘중국에 무역 응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나바로 당시 캘리포니아대 어바인 캠퍼스 경제학 교수를 대선 캠프 정책자문위원으로 불렀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12월 당선인 신분으로 백악관에 국가무역위원회를 신설하고 위원장에 나바로를 앉혔다. 미·중 무역 전쟁을 총괄할 조직을 새로 만들고 조직 수장으로 혐중파 나바로를 선택한 것이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성명에서 "중국에 관한 나바로 교수의 책 중 한 권을 읽었는데, 그가 제시한 주장의 명확성과 연구의 철저함에 감명을 받았다"고 밝혔다.
나바로가 맡았던 국가무역위원회는 백악관 내 자유무역론자들의 견제로 폐지됐다. 그러나 나바로는 굴하지 않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접근해 중국에 대한 보복 관세 부과를 관철했다. ‘중국은 미국의 적’이란 둘의 근본적 믿음이 맞아떨어졌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3월 5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수입품에 25% 관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해 미·중 무역 전쟁의 신호탄을 쐈다. 나바로는 이후 트럼프 대통령의 추가 관세 부과 결정도 강력 지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중국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퍼뜨리며 무역 전쟁을 조장한 나바로가 책에서 반중(反中) 전문가를 조작한 것으로 밝혀지자, 중국 정부의 감독을 받는 관영 매체들은 일제히 그를 비난하고 나섰다. 중국 입장에선 트럼프 행정부의 트집을 잡을 좋은 구실이 생긴 것이다.
중국 국영 CCTV는 21일 "트럼프 대통령의 수석 경제 고문 나바로가 반중 경제 서적에서 대중 강경파 전문가를 날조하는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고 전했다. CCTV는 나바로를 ‘중국에 대한 매파 중의 매파’ ‘대중 무역 정책의 중요 인물’ ‘지속적으로 중국 위협론을 퍼뜨린 인물’로 평했다. 나바로가 대중 관세 부과를 지지하고 환율 조작, 지식재산권 절도, 미국 제조업 타격을 이유로 들며 중국을 비난했다고도 소개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의 후시진 총편집인도 나바로를 공개 비판했다. 그는 17일 트위터에 "이는 파렴치한 조작이며, 나바로가 독자를 속였다. 그가 미국 대통령에게 잘못된 생각을 심었을지 누가 아나"라는 글을 올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나바로로부터 잘못된 조언을 듣고 정책을 결정했을 수도 있다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베이징=김남희 특파원 knh@chosunbiz.com]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네이버 메인에서 조선일보 받아보기]
[조선닷컴 바로가기]
[조선일보 구독신청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