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이회창, 일곱 가지 공통점과 한가지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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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4.15. 오후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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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261

1. 보수 정당의 비영남 지도자

2. 경기고 나온 최고의 엘리트

3. 체제 수호하는 법률 기술자

4. 일인지하 만인지상 국무총리

5. 정치 한복판 뛰어드는 결단

6. 도덕적 의무에 중대한 하자

7. 보수 기득권 세력 집중지원

‘원칙과 소신’ 이회창 - ‘안정과 순종’ 황교안

이회창 총재, 판사 시절 중앙정보부 영장 기각

선관위 고발 후보 대통령 치하에 항의해 사표

김영삼 대통령과 대판 언쟁 뒤 국무총리 사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2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조양호 회장 빈소에서 조문을 마친 뒤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목표는 2020년 총선이 아닙니다. 그의 목표는 2022년 대통령 선거입니다. 지난 1월 29일 황교안 전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유한국당 전당대회 출마 선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사랑하는 자유한국당 당원동지 여러분! 저 황교안 대한민국의 새로운 내일을 선언하기 위해, 국민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저는 오늘 자유한국당의 새로운 출발을 선언하기 위해 당원동지들 앞에 섰습니다.

위기의 대한민국을 성취와 도약의 새길로 이끌겠습니다. 고난의 자유한국당을 승리와 영광의 큰길로 이끌겠습니다. 한숨과 눈물의 우리 국민들을 끌어안고, 행복과 번영의 새로운 세상으로 함께 나아가겠습니다.”

황교안 대표는 차기 대선주자 경쟁에서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가 리얼미터에 의뢰해 3월 25일부터 29일까지 5일간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황교안 대표가 21.2%로 1위였습니다. 그 뒤로 이낙연 14.9%, 유시민 12.0%, 이재명 7.1%, 김경수 박원순 5.9%, 심상정 4.9%, 오세훈 4.5%, 홍준표 4.4%, 김부겸 3.6%, 유승민 3.6%, 안철수 2.8% 순입니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황교안 대표도 자신이 차기 대선주자 경쟁에서 앞서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 같습니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내년 총선에서 제왕적 대통령 권력구조를 바꾸는 개헌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국회에서 국무총리를 복수로 추천하고 대통령이 국무총리를 임명하도록 권력을 분산하는 내용입니다. 기자들이 황교안 대표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황교안 대표의 답변은 이렇게 나왔습니다.

“기본적으로 많은 협의와 논의가 필요하다. 한 가지 포인트로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권력구조 개혁의 핵심 중 하나는 대통령의 권한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일 텐데, 그런 부분 없이 한두 가지 아이템을 가지고 말하는 것보다는 종합적이고 총체적으로 국민의 뜻을 따르는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충분한 논의와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그런 것에 따라서 후속 조처를 하겠다.”

‘종합적이고 총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충분한 논의와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는 얘기는 ‘하지 말자’는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한 황교안 대표가 차기 대통령의 권력을 제한하는 개헌에 찬성할 리가 없습니다.

황교안 대표가 문재인 대통령의 뒤를 이어서 차기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황교안 대표와 비슷한 경로를 거쳐 정치에 입문한 뒤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유명한 정치인이 있습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입니다.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교해 볼 만한 지점이 있습니다.

이회창 총재의 본가는 충남 예산입니다. 그는 1935년 아버지의 임지였던 황해도 서흥에서 출생했습니다. 전남 담양군 창평초등학교, 광주시 서석초등학교, 청주중학교에 다녔고, 부산 피난 시절 경기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갔고 서울대 법대 재학시절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판사가 됐습니다.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지냈고, 정치에 입문해 세 차례 대선에 도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황교안 대표의 부모는 황해도 사람들입니다. 한국전쟁을 피해 강화도로 이주했다가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황교안 대표는 1957년 서울 용산구 서계동에서 출생했습니다. 봉래초 등 학교, 광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해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했습니다. 재수했지만 서울대에 떨어져 후기였던 성균관대 법학과에 들어갔습니다. 1980년 만성 담마진으로 징집면제 처분을 받았고 1981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가 됐습니다. 법무부 장관,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냈고 최근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간단한 이력에서 드러나는 두 사람의 중요한 공통점이 꽤 많이 있습니다.

첫째, 비영남입니다. 정확히는 영남 출신이 아니면서 보수 정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됐다는 점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이래 우리나라 보수 정당 대통령은 모두 경상도 사람이었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까지 예외가 없었습니다. 이들이 티케이 정권, 피케이 정권을 이어갔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패한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도 경상도 사람이었습니다.

경상도 출신이 아닌 보수 정당 대선후보는 영남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확장력이 있다는 강점이 있겠지만 동시에 영남에서 표의 응집력이 떨어진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이회창 총재가 1997년 대선과 2002년 대선에서 겪었던 일입니다. 황교안 대표도 2022년 대선에 출마하면 비슷한 어려움에 봉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째, 경기고입니다. 두 사람 모두 경기고 출신 엘리트입니다.

고등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 경기고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모여든 학교였습니다. 경기고-서울대 출신을 ‘케이에스’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라는 의미입니다. 이회창 총재가 바로 ‘케이에스’였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공부 잘하는 엘리트와는 거리가 먼 자리입니다. 왜 그럴까요? 젊은 시절 한때 공부를 잘했던 엘리트들은 평생 자신이 최고라는 헛된 자부심이나 허영심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봉사직입니다. 게다가 손에 흙을 묻히고 때로는 피를 묻혀야 하는 험한 직업입니다. 엘리트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오히려 결정적 장애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경기고 출신 정치인들은 많았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황교안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경기고 출신 최초의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황교안 대표는 경기고를 시험 보고 들어간 마지막 세대입니다. 명문 경기고 출신들로서는 마지막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울대 출신 대통령은 경남고를 거쳐 서울대 철학과를 나온 김영삼 전 대통령 한 사람뿐입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육사,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목포상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산상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동지상고와 고려대,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성심여고와 서강대, 문재인 대통령은 경남고와 경희대 출신입니다.

셋째, 판검사입니다.

이회창 총재는 판사, 황교안 대표는 검사 출신입니다. 판검사는 ‘법조 3륜’에서 재조(在朝) 구성원입니다. 같은 법조인이지만 변호사와는 전혀 다른 직업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변호사 출신입니다.

판검사는 기본적으로 기득권 체제를 지키는 체제의 수호자들입니다. 국가 공무원으로서 범죄자를 처벌하고 옳고 그름을 가려주는 법률 기술자들입니다. 따라서 정치적 안목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가운데 판검사 출신이 있었던가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잠시 판사를 지낸 적이 있지만 그를 판사 출신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판검사 출신 대통령이나 총리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정치 선진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넷째, 국무총리입니다.

국무총리실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이회창 총재는 26대 국무총리(1993년 12월 17일~1994년 4월 21일)였습니다. 재임 기간이 4개월 정도에 불과합니다. 황교안 대표는 44대 국무총리(2015년 6월 18일~2017년 5월 11일)였습니다. 2년 가까이 재임했습니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포함한 기간입니다.

국무총리는 흔히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라고 하지만, 대통령제 권력구조에서는 실권이 별로 없습니다. 국무총리 출신 대통령이 있었던가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숨진 뒤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내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0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된 사례가 있습니다. 제대로 된 대통령이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의 압력으로 8개월 만에 물러났습니다.

김종필 총재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아래에서 국무총리를 지냈지만 끝내 대통령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습니다.

다섯째, 결단입니다. 정치적 고비에서 위험을 무릅쓰는 결단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회창 총재는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뒤 정계에서 은퇴하지 않았습니다. 1998년 8월 31일 전당대회에 출마해 한나라당 총재에 당선됐습니다. 이후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정치의 한복판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웠고 이를 기반으로 2002년 대선에 다시 출마할 수 있었습니다.

황교안 대표는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당대회에 출마했습니다. 김병준 위원장의 논리는 황교안 대표는 대선후보로서 당의 소중한 자산이니 당권 다툼에서 상처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황교안 대표는 물러서지 않았고 출마했습니다. 그리고 당권을 거머쥐었습니다. 이회창 총재와 마찬가지로 정치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용기를 발휘한 것입니다.

황교안 대표가 2022년 대선에 나설 수 있게 된다면 이번 결단이 큰 정치적 자산이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치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부작위(不作爲)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하는 작위(作爲)라는 것을 황교안 대표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섯째,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에 결정적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회창 총재는 1997년과 2002년 두 차례 대선에서 모두 두 아들의 병역면제라는 악재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병역 비리 의혹을 제기한 김대업 씨가 감옥에 갔지만, 이회창 총재의 두 아들이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달라질 수 없었습니다.

황교안 대표는 만성 두드러기라는 매우 희소한 질병으로 징집면제를 받았습니다. 그가 징집면제를 받은 것은 1980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은 1981년입니다. 징집면제를 받지 않았다면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황교안 대표가 2022년 대선에 출마한다면 이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의혹이 제기될 것입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군대에 가지 않았지만 2007년 대선 당시 최고경영자 출신이라는 그의 정체성이 약점을 덮어줬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 죄로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국민의 감수성이 높아졌다고 봐야 합니다. 더구나 황교안 대표는 기업인이 아니라 고도의 도덕성을 생명으로 하는 법무부 장관 출신입니다. 아무래도 병역면제는 황교안 대표의 치명적 약점이 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일곱째, 보수 기득권 세력의 집중지원입니다.

이회창 총재가 1997년 대선에서 패배한 여러 가지 원인 중에는 기득권 세력의 분열이라는 악재가 있었습니다. 디제이피(김대중-김종필) 연합과 이인제 후보의 출마로 보수 기득권 세력의 힘이 이리저리 흩어졌습니다.

2002년 대선에서 보수 기득권 세력은 이회창 후보를 집중적으로 지원했습니다. 그런데도 노무현 대통령에게 패배했습니다. 힘의 한계를 절감한 보수 기득권 세력은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그야말로 ‘올인’했습니다. 보수 기득권 세력은 정권을 되찾는 데 성공했지만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지금 황교안 대표에게 보수 기득권 세력의 지지가 집중되는 양상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총재에게 보수 기득권 세력의 지지가 집중됐던 양상과 매우 흡사합니다. 보수 성향 주요 신문사 사주, 재벌 오너, 보수 정권에서 고위 관료를 지낸 사람들, 태극기 부대 등이 반문재인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캠페인의 목표는 정권교체, 즉 황교안 대통령 만들기일 것입니다. 황교안 대표는 대형교회 일부 목회자들의 전폭적인 지원까지 받고 있기 때문에 2002년 이회창 총재보다 더 유리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회창 총재와 황교안 대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우선 용모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회창 총재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지만 키가 작고 목소리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타계한 코미디언 이주일(정주일)씨를 닮았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황교안 대표는 외모가 훤칠하고 말도 품위가 있습니다. 목소리도 좋은 편입니다. 법무부 장관 시절 관상 보는 사람이 그를 “귀상(貴相)에 귀성(貴聲)을 갖췄다”고 평가한 일이 있습니다. 그의 경기고 동창들은 그가 경기고 학생연대장을 하면서 운동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부대를 지휘하던 장면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앞에서 열거한 일곱 가지 공통점을 다 덮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차이점입니다.

이회창 총재는 기존 권위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황교안 대표는 기존 권위에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2017년 발행된 <이회창 회고록>을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 시험을 망치고 가출했던 얘기, 의협심을 발휘했다가 선생님에게 억울하게 매 맞은 얘기, 고등학교 때 친구와 결투를 했던 얘기, 서울법대 시절 철학개론 강사에게 강의가 너무 어렵다고 항의해 폐강시킨 얘기 등을 솔직하게 써 놓았습니다.

그는 1963년 서울지방법원 판사 시절 중앙정보부가 신청한 야당 의원 구속영장을 기각했다가 검찰총장의 전화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서울지방법원장이 법관 연임에서 탈락했다고 합니다. 그는 5·16 쿠데타 뒤 계엄군법회의와 혁명재판소에 파견됐는데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기소 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 혁명검찰부부장 박창암 대령과 언쟁을 벌이고 혁명재판소 심판관 사퇴서를 낸 일도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1989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하면서 동해시 재선거과 서울 영등포을 재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을 포함한 각 정당 총재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선거법 위반 사범을 예외 없이 전원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검찰은 선관위의 고발을 무시하고 불기소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됐던 민정당 당선자를 “선전했다”고 치하했습니다. 그는 항의의 뜻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직을 사퇴했습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그를 문민정부 초대 감사원장으로 발탁했습니다. 그가 원장을 지낸 9개월 동안 감사원은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 율곡사업과 평화의 댐을 감사했습니다. 감사원의 위상과 독립성을 크게 높인 것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의 이런 행동이 못마땅했지만 제지하지 못했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그 뒤 국무총리 시절에 터졌습니다. 그는 감사원장에 이어 1993년 12월에 국무총리로 발탁됐습니다. 그는 국무총리를 4개월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헌법이 보장한 국무총리의 ‘국정 통할권’을 행사해 “외교·국방·안보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는 잘못된 프레임에 정면으로 맞섰기 때문입니다. 김영삼 대통령과 말 그대로 대판 싸움을 하고 국무총리를 그만뒀습니다. 이 사건으로 세상은 그에게 ‘대쪽 총리’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수여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신한국당 중앙선대위 의장과 전국구 1번으로 그를 영입했습니다. ‘대쪽 총리’라는 이회창 총재의 이미지가 선거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를 못마땅해하면서도 매번 발탁하는 김영삼 대통령도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1996년 총선에서 승리한 이회창 총재는 당내 경선을 거쳐 1997년 12월 대선에 도전했습니다. 그는 ‘3김 청산’을 내세웠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탈당을 요구했습니다. 자신을 발탁해서 키워준 ‘보스’를 내쫓아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회창 총재는 1997년 대선에서 떨어졌습니다.

2000년 총선에서는 김윤환 이기택 등 당내 계파 보스들을 공천에서 배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2002년 대선에서 또 떨어졌습니다.

2007년 11월7일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가 개인사무실이 입주한 서울 남대문로 단암빌딩에서 제17대 대선 출마선언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2007년 대선에 그는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보수 정당의 평화 무드 편승 기류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다시 출마했습니다. 3위에 그쳤습니다. 그의 ‘대쪽’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졌고 세상은 그에게 손가락질을 해댔습니다. 세 번째 대선에는 출마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가 내세운 명분이 워낙 터무니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회창 총재는 거의 평생을 이렇게 기존 권위에 도전하고 싸운 사람입니다. 황교안 대표는 어떤가요?

황교안 대표가 아직 회고록을 쓰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검찰에 남아 있는 그에 대한 평판은 ‘성실’ 그 자체입니다. 윗사람에게 대든 적이 있다는 소문조차 없습니다. 그저 일만 열심히 하는 매우 순종적인 검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검사로서 자신의 이력을 블로그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1992년~2011년 강직한 검사

대검찰청 공안1과 과장

서울지방검찰청 공안2부 부장검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2차장 검사

대구고등검찰청 검사장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

지적 재산권을 훼손하는 문화 콘텐츠의 무단 복제와 다운로드를 막기 위해 무료 다운로드 사이트 운영자를 기소해 유죄판결을 이끌었습니다. 일명 ‘국정원 도청 사건’ 수사를 지시했습니다. 국정원이 불법으로 사용하던 도청 장비를 완전히 폐기하여 누구나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밝은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황교안 대표, 성실하고 순종적인 공안검사 이력

법무부 장관 시절 통합진보당 해산 업적 내세워

내년 총선서 자유 한국당 공천 개혁 기대 어려워


1989년 문익환 목사, 서경원 의원, 임수경 학생이 잇따라 방북했습니다. 시대의 흐름이 남북교류와 통일을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는 ‘좌경 세력’에 대한 수사를 강화하고 국가보안법 적용 범위를 확대하는 등 강경하게 맞섰습니다. 이른바 ‘공안정국’을 조성한 것입니다.

황교안 대표는 당시 서울지검 공안2부 검사였습니다. 국가안전기획부와 경찰에서 넘어온 수많은 사건을 처리했습니다. 무리한 수사와 가혹 행위가 남아 있던 시절입니다. 당시 법조 출입기자였던 저는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이 안기부나 경찰의 무리한 수사에 제동을 걸었다거나 억울한 피의자를 풀어줬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공안검사들은 체제가 아니라 정권의 수호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황교안 대표의 이러한 경력과 태도는 같은 법조인지만 이회창 총재의 경력과 태도와 대단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황교안 대표는 심지어 박근혜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하면서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의 뜻을 단 한 번도 거스른 적이 없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2012년 대선 당시 후보 토론회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면전에서 모욕감을 줬던 이정희 후보의 통합진보당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정당 해산을 청구해 관철했습니다. 황교안 대표는 자신의 블로그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는 위헌 정당 ‘통합진보당’을 해산시켰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올려놓았습니다.

그의 이런 이력으로 미루어 보면 황교안 대표가 앞으로 정치인으로서 어떤 행보를 걷게 될지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과거 정당 총재나 대표들이 당선이 어렵거나 아슬아슬한 순번에 자신을 공천해서 배수진을 치던 관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교안 대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년 총선에서 그는 비례대표 2번 정도 당선이 확실한 안정권에 자신을 공천할 것입니다. 안전제일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총선 공천도 크게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 자유한국당 당원이나 지지자들의 여론은 의원들을 대폭 물갈이해 달라는 것입니다. 2000년 총선에서 이회창 총재가 했던 것처럼 황교안 대표가 과감한 물갈이를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어렵다고 봅니다.

‘공천 학살’은 당내분란과 위험부담을 수반합니다. 황교안 대표의 성정으로 미루어 그런 도박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이회창 총재와 황교안 대표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이회창 총재의 정치적 자산은 ‘대쪽 총리’였습니다. ‘원칙과 소신’이 그가 가진 재산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회창 총재는 1997년 대선과 2002년 대선에서 ‘원칙과 소신’의 가치를 극대화하지 못했습니다. ‘아름다운 원칙’이라고 이상하게 포장했고,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알부남)라고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실패했습니다.

정치인은 자신이 가진 자산으로 정직하게 승부해야 합니다. 자신의 자신이 시대정신과 맞으면 성공하는 것이고, 맞지 않으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황교안 대표의 정치적 자산은 한마디로 ‘안정과 순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22년 대선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요? 황교안 대표는 성공할 수 있을까요?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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