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매거진 농구인생] Coach

"선수들이 없으면 저도 없는 거잖아요." KEB하나은행 수석코치 김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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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인생

공식

2019.10.21. 18:001,391 읽음

- '매거진 농구인생' 9월호 내용입니다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KEB하나은행 수석코치 김완수입니다.

먼저 코치님의 선수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처음에 어떻게 농구선수의 길을 걷게 되신 건가요?
어렸을 때부터 밖에서 뛰어노는걸 좋아하고 운동을 좋아해서 학교 육상부를 했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시작을 해서 1년 정도 하다가 개인 사정 때문에 그만두게 되었는데, 이후에 다시 육상부를 들어가려고 하니까 선생님께서 육상부보다는 농구부가 어떻겠냐고 하셔서 그렇게 농구를 시작하게 되었죠.

산곡북초등학교에는 원래 농구부가 있었던 건가요?
생긴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어요. 4학년 2학기 때 농구부에 들어갔는데 제가 3회였어요. 1회가 신기성 선배님, 2회가 현재 송도고 부장님인 김상우 선배님, 그리고 4회가 김승현, 이현준 선수였죠.

처음 접한 농구는 재미있으셨나요?
초등학교 때는 정말 재미있게 즐겁게 했던 것 같아요. 농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는데 공을 이용해서 골을 넣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열심히 하고, 그러다 보니까 선생님께 칭찬도 듣고, 그러면 더 신나서 열심히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부모님의 반대는 없으셨나요? 지금도 힘들지만 당시에는 분위기나 운동이 지금보다 더 강하던 시기였잖아요.
부모님께서 어렸을 때부터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원하는 길을 가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리고 당시에는 체벌이 있었지만, 선생님께 맡긴다는 개념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이야 케어를 부탁하는 느낌이지만 당시에는 칭찬을 받든 체벌을 하든 믿고 맡기는 시대였기 때문에 그런 거에 대한 걱정도 없으시지 않았을까 해요.

이후 송도중학교에 진학해서 전규삼 할아버지께 지도를 받으셨어요. 전규삼 할아버지께서는 굉장히 자유롭고 시대를 앞서가신 지도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
전규삼 할아버지께 배운 중학교 3년 동안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지금도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그때 배운 걸 지도하고 있고, 최근에 NBA를 보다가 제가 어렸을 때 배우던 스텝을 하는 걸 봤어요. 송도 애들만 하던 거였는데 NBA 선수가 하는 걸 보면서 전규삼 할아버지께서 정말 공부를 많이 하시고 업그레이드된 기술들을 많이 가르쳐주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지금도 많이 생각나죠. 

송도고등학교 시절은 어떠셨나요? 아무래도 중학교 때보다는 조금 더 체계가 잡히고 틀이 있는 농구를 했을 것 같은데요.
송도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농구를 해서 농구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어요. 다만, 사춘기가 오고 선, 후배 간의 위계질서가 중학교 때 보다 강해지니까 그런 부분이 조금 힘들었어요. 이렇게까지 하면서 농구를 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중3 때 시합을 많이 뛰다가 고1이 되면서 시합을 못 뛰니까 그런 부분도 힘들었고요. 또 그때 제가 빈혈이 있었어요. 당시만 해도 남자가 빈혈이라고 하면 다들 의아해하고 그럴 때라 병원 가서 치료받고 약 먹으면서 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뛰니까 체력적으로 금방 지치고, 그러면 또 잘 못 뛴다고 혼나고. 그래서 운동을 그만두니 마니 하면서 부모님과도 싸웠는데, 박재수 선생님께서 많이 잡아주셨어요. 그래서 지금도 연락 자주 드리려 노력하고 있고, 정말 감사한 분이죠.

힘든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시고 건국대학교로 진학을 하셨어요. 대학교 때 기억은 어떠세요?
사범대(체육교육과)라는 메리트가 있어서 학교를 일찍 정했어요. 그리고 1학년 때부터 감독님께서 기회를 많이 주셨는데 제가 그 기회를 잘 못 잡았어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농구를 하다가 틀이 짜여진 농구를 하다 보니까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고등학교 때보다 선배들에 대한 압박감이 더 컸어요. 그래서 농구가 조금은 싫어졌던 순간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제일 아쉬워요. 그걸 이겨냈으면 프로에 가서도 조금 더 빛을 보고 길게 선수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죠. 다른 사람들은 다 이겨낼 때 저만 그러지 못한 거니까 누굴 탓할 수 없는 문제지만, 후회는 남는 것 같아요.

그렇게 힘든 대학 시절을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KBL 드래프트에서 호명되어 신세기 빅스에 입단을 하셨어요. 
원래 드래프트 신청서를 안 넣으려고 했었어요. 돌이켜보면 잘못된 생각이었는데, 당시에는 졸업만 하고 다른 길을 찾으려고 했었죠. 그런데 지금 전자랜드에 계신 김승환 코치님께서 지금까지 한 게 아깝다면서 지원서라도 넣어보라고 해서 신청을 했어요. 드래프트를 앞두고 이틀 동안 트라이아웃을 했는데, 첫날 게임을 뛰자마자 김승환 코치님께 욕을 엄청나게 먹었어요. 이왕 하는 거 열심히 좀 하라고 엄청 혼나서 다음 날은 열심히 하기도 했고 운 좋게 잘하기도 했는데, 유재학 감독님께서 그걸 인상 깊게 보셨는지 뽑아 주셨죠.

당시 본인의 이름이 호명될 거라고 예상을 하셨나요?
반반이었어요. 여기서 안 되면 좀 창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이름이 불려도 좀 문제지 않을까하는 그런 느낌 있잖아요.(웃음) 그래서 돼도 걱정 안 돼도 걱정이었는데 이름이 불렸고, 거기에 동기부여를 받아서 열심히 했었죠. 당시 임근배 코치님께서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해주시고 여름에 퓨쳐스리그에서는 잘 했는데, 시즌에 들어가면서는 조금씩 뒤로 밀린 것 같아요. 

선수 생활을 1년만 하시고 바로 입대를 하셨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그때 허리가 좋지 않아서 쉬고 있었는데 미리 군대를 갔다 오면 어떻겠냐고 해서 입대를 하게 됐어요. 또 개인적으로는 농구가 정말 어려웠어요. 프로는 굉장히 디테일한 부분까지 들어가니까 제가 가드로서 벤치에서 지시한 걸 수행하면서 코트 위 선수들을 이끌어야 하는데, 항상 자유롭게만 농구를 해왔다 보니까 그런 부분에서 조금 어려움을 겪었죠.

상무가 아니라 현역으로 입대를 하셨어요. 2년이라는 세월 동안 농구공을 놓아야 하는 건데, 두려움은 없으셨나요?
두려움은 없었고, 오히려 사회를 많이 배우고 왔어요. 제가 나이가 많은 편이었으니까 선임들이 다 어린 친구들이었는데 참을 건 참고, 넘어갈 건 넘어가면서 많이 배웠죠. 그리고 체력 훈련을 하도 많이 하니까 몸도 좋아졌어요.(웃음) 그래서 조금 더 성숙해져서 돌아왔죠.

전역한 이후에는 프런트 생활을 시작하셨어요. 선수 생활을 더 하실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은퇴를 결정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몸은 되어있었지만 자신감이 없었던 것 같아요. 내가 들어갈 자리가 있는지,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지 판단을 하는데, 가드라인에 (홍)사붕이형, (강)기중이형, (최)명도형까지 있더라고요. 그래서 스스로 겁을 먹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차에 사무국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고 그렇게 사무국에 들어가서 일을 배우게 됐죠.

프런트 일도 농구와 관련된 일이지만 선수와 선수를 서포트하는 역할은 전혀 다른 일이잖아요.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프런트는 선수들을 위해서 있는 존재잖아요. 처음에는 그걸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어요. 근데 대리님이나 팀장님, 과장님, 국장님께서 자기 자신을 버리고 선수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팀 모두를 위해서 이게 맞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죠. 그래서 선수들에게 더 애정을 가지고 많이 도와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선수가 해야하는 부분들을 프런트에게 넘긴다거나 하면 확실하게 잘랐어요. 제 나름의 가이드라인을 정해놓고 도와줄 거는 확실하게 도와주고 아닌 건 확실하게 거절하면서 일을 했죠.

이후 온양여중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지도자로서 첫발을 내딛으셨는데, 첫 코치 생활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어느 날 허기영 선배님께서 "너 코치 한 번 해보지 않을래?"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디냐고 물으니까 충남에 있는 온양여중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부모님께서 충남에 계셨는데 지금까지 떨어져 살았으니까 이번 기회에 부모님과 같이 지내면서 지도자 생활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시작하게 됐어요. 

우리나라가 코치 아카데미 같은 지도자 양성 기관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첫 지도자 생활을 하실 때도 시행착오나 어려움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가르치는 것보다 인원이 없어서 힘들었어요. 처음 갔을 때 농구부에 3명이 있더라고요.(웃음) 운동 관둔 아이들 만나서 설득하고 클럽 활동하던 아이들 중에 잘하는 아이들 만나서 설득하고, 인원 맞추는 데만 1년이 걸렸어요.

온양여중과 대진고를 거쳐 온양여고에서 코치 생활을 이어 가셨어요. 온양여고에서는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도자 생활을 하셨고요.
온양여고로 가면서 스스로 정한 철칙이 있어요. 첫 번째는 절대 이 아이들을 배신하지 말자, 두 번 째는 내가 이 학교로 온 이상 무조건 우승을 한 번 해보자. 아이들과 서로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썼죠.

농구를 가르치실 때는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셨나요?
기술 훈련과 1대1 훈련을 많이 시켰어요. 1대1 되어야 그다음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을 해요. 1대1이 안 되면 패턴플레이를 해도 그 상황 상황에 맞게 응용을 할 수 없기 때문에 1대1을 중요하게 여겼어요. 또 볼을 항상 들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체력 훈련을 할 때도 볼을 가지고 체력훈련을 하고 그랬죠. 그리고 본인들이 코트 위에서 판단하고 맞춰서 경기를 풀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서 패턴 위주의 플레이보다는 선수들 스스로가 알아서 플레이 할 수 있도록 했던 것 같아요.

송도중, 고등학교 시절처럼 자유로움을 주신 건가요?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인성적인 부분을 굉장히 강조했던 것 같아요. 저는 제가 농구 선수로서 실패를 했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이 친구들 중에서도 분명 프로에 못 가는 선수도 있고, 가서 금방 나오는 선수도 있을 텐데 그때를 위해서 인성적인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정말 애들이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강조했는데, 제가 실패를 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컸던 것 같아요.

이후에 박종천 감독님과 함께 KEB하나은행으로 오시면서 프로 코치로서 첫 커리어를 시작하셨어요. 좋은 기회이자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요.
제일 중요한 게 선수들과 이별한다는 거잖아요.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또 좋은 선수들도 많아서 사고 한 번 치겠다는 자신감도 있던 시기였는데, 마침 하나은행에서 제의가 들어오니까. 아내와도 상의하고 아이들에게도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봤었는데, 아이들이 너무 기쁘게 "선생님, 더 높은 곳으로 가시는 건데 당연히 가셔야죠."라고 이야기해 주더라고요. 학교 측에서도 당연히 가야 되는 거 아니냐고 말씀해주셔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온양여고 학생들이 KEB하나은행 경기 때 응원하러 많이 왔던 기억도 나는데요.
끈끈하게 지내던 아이들이 이제는 다 졸업해서 끈끈함이 사라지긴 했는데.(웃음)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건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지 제가 잘해서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자들한테 너무 고맙고, 그건 지금 여기에 있는 선수들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선수들이 없다면 제가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 다들 너무 고맙죠.

올해 3월 이훈재 감독님이 새롭게 부임하셨어요. 감독님이 추구하시는 농구는 어떤 농구인가요?
먼저 선수들에게 자유로운 농구를 하게 해주시려고 하세요. 선수들과의 신뢰도 중요하게 생각하시고요. 저와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좋은 것 같아요. 코치 입장에서 감독님이 어떤 스타일이신지 빨리 파악을 해야 그에 맞춰서 같이 선수들을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에 감독님 스타일에 잘 맞춰 나가야죠.

다가오는 박신자컵은 어떻게 준비하고 계신가요?
비시즌 때 훈련했던 부분들을 중점적으로 해서 대회를 잘 치르고 싶어요. 작년에 우승을 했기 때문에 올해도 당연히 우승이 목표인데, 작년에는 조금 우왕좌왕하면서 우승을 했다면 올해는 경험이 있으니까 선수들도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냉정하게 플레이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코치님께서 특별히 기대하고 있는 선수가 있나요?
누구 한 명을 지명해서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고참 선수들은 다 잘하고 있고, 어린 선수들은 잘 하고 있지만 지금 하는 것 외에 본인들이 뭐가 더 필요하고 뭘 더 할 수 있는지를 빨리 파악했으면 좋겠어요. 언니들이 몇 년을 더 운동한 사람들이니까 잘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위치까지 올라가는 시간을 1, 2년이라도 줄이려고 노력하면 좋겠어요. 

어느덧 세 아이의 아버지이시기도 해요. 농구 코치라는 직업의 특성상 가족들과 시간을 자주 보내기 어렵잖아요.
처음에는 와이프가 아무것도 모르고 기다려줬는데, 지금은 아이가 세 명이다 보니 저한테 화도 많이 내요.(웃음) 항상 미안하죠. 그런데 여기 있는 선수들도 우리 가족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아직은 여기에 더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데, 물론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코치라는 직업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나중에 나이 먹으면 지금 못한 것까지 다 해줘야죠. 와이프, 자식들한테 못 해줬던 거 다 하면서 희생하고 봉사하면서 살고 싶어요. 

아직도 농구가 재미있으신가요?
나이가 먹으면 열정이 줄어들 줄 알았거든요? 근데 점점 더 강해지고 있어요. 열정이 많아지면 뭔가 더 많이 하고 싶은데 그러면 선수들이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적정선으로 유지하려고 많이 누르고 있어요. 저도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웃음)

그럼 언제까지 지도자 생활을 하고 싶으세요?
지금 막내가 2살인데 막내가 대학교 갈 때까지는.(웃음) 그 후에는 애들이랑 같이 농구 보러 다니고 그러고 싶어요.

다가오는 올 시즌 목표는 무엇인가요?
올 시즌 목표는 저 혼자만의 목표가 아니라 감독님, 사무국, 단장님, 국장님, 선수들까지 무조건 플레이오프에 가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그렇게 되게끔 다들 노력을 많이 하고 있고 앞으로도 더 노력해야 하겠지만 꼭 목표를 이루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김완수 코치님의 '농구인생'을 한 단어로 표현해주세요.
바보? 조금 더 빨리 농구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했더라면, 어려운 상황들을 지혜롭게 헤쳐나갔더라면 더 나은 결과가 있었을 텐데, 물론 그게 더 좋았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많이 돌아왔잖아요. 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항상 아쉬움이 남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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