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정부 '사실상 계엄령' 선포…시민 저항 꺾을지는 미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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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10.04. 오후 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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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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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 만에 '긴급법' 적용해 복면금지법 시행…캐리 람에 비상대권

야간통행·집회 금지 가능…위반시 종신형까지 처벌 수위도 결정

시위대·범민주 진영 "악법 못 받아들인다" 반대 투쟁 예고

미국 등 국제사회 반발도 변수…사태 악화 시 중국군 투입 가능성

복면금지법 발표하는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로이터통신=연합뉴스


(홍콩=연합뉴스) 안승섭 특파원 = "내가 정말로 우려하는 것은 다음 조치다. 정부가 '비상대권'이라는 수문(水門)을 연 후 어떠한 악법을 도입할지 알 수 없다.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한 홍콩 시민은 4일 홍콩 행정 수반인 캐리 람(林鄭月娥) 행정장관의 복면금지법 시행 발표 후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이 같은 우려를 밝혔다.

캐리 람 행정장관이 이날 복면금지법 시행을 전격적으로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긴급정황규례조례'(긴급법)를 발동했기 때문이다.

1922년 제정된 긴급법은 비상 상황이 발생하거나 공중의 안전이 위협받을 때 행정장관이 홍콩 의회인 입법회 승인 없이 광범위한 분야에서 공중의 이익에 부합하는 법령을 시행할 수 있도록 한 법규이다.

긴급법이 적용되면 행정장관은 체포, 구금, 추방, 압수수색, 교통·운수 통제, 재산 몰수, 검열, 출판·통신 금지 등에 있어 무소불위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비상대권'을 부여받는다.

행정장관은 이러한 비상조치를 어겼을 때 처벌도 정할 수 있으며, 그 처벌은 종신형까지 가능하다. 사실상 계엄령에 가깝다.

행정장관에게 부여되는 비상대권의 수준이 이처럼 막강하기 때문에 홍콩 역사에서 긴급법이 적용된 것은 1967년 7월 반영(反英)폭동 때 단 한 번뿐이다. 52년 만에 긴급법이 발동됐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범민주 진영은 홍콩 정부가 긴급법이라는 '무소불위'의 칼로 민주화 요구 시위를 진압할 추가 조치를 내놓을 수 있다는 점을 진심으로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캐리 람 행정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폭력사태가 악화하면 정부는 더 많은 해결책을 검토할 수 있다"며 추가 조치가 나올 수 있음을 강하게 시사했다.

친중파 진영과 경찰 조직 내에서는 이미 특정 지역의 집회 금지나 야간 통행금지령 등을 시행해 송환법 반대 시위를 전면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민주화 요구 시위대의 대변인을 자처하는 단체인 민간기자회는 "긴급법이 발동되면 이는 '엔드게임'(endgame)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홍콩 정부는 긴장 상황을 조장해 홍콩의 법률체계를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마스크를 쓰고 얼굴 맞대고 대치한 홍콩 경찰과 시위대(홍콩 로이터=연합뉴스) 3일(현지시간) 홍콩의 타이쿠 역 주변에서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 반대 시위 도중 한 시위대가 경찰관과 얼굴을 맞댄 채 정면 대치하고 있다. bulls@yna.co.kr


하지만 홍콩 정부가 희망하는 대로 사태가 흘러갈지는 미지수다.

우선 복면금지법 시행 자체가 거센 정치적, 법률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홍콩 야당인 공민당 소속 데니스 궉 의원은 "긴급법은 홍콩 기본법과 국제인권규약이 없던 1922년에 제정된 것"이라며 "홍콩 정부는 1999년 유엔인권위원회에 긴급법 발동 시 입법회 심의를 거칠 것이라고 약속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긴급법을 발동하려면 입법회 심의를 거쳐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사법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궉축킨 등 범민주 진영 인사들은 복면금지법이 실질적인 홍콩 헌법인 기본법 등에 어긋난다고 보고 이날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

홍콩 시위대는 복면금지법에 전면적으로 저항하겠다고 밝혔다.

16살 학생인 한 시위 참여자는 "경찰은 식별번호를 가리고 마스크까지 쓴 채 시위 진압에 나서는데 왜 우리만 마스크를 벗어야 하느냐"며 "경찰이 법을 지키지 않는데 우리만 지킬 수 없으며, 우리는 마스크를 계속 쓰고 시위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홍콩 도심에 운집한 수만 명의 시민이 한꺼번에 마스크를 쓰고 시위에 나선다면 과연 홍콩 경찰이 이를 현실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시위 진압에 투입돼 왔다는 한 경찰은 "복면금지법은 불필요한 갈등만 불러올 것"이라며 "지금까지는 경찰에 체포된 시위대만 마스크를 벗어야 했지만, 이제는 마스크를 쓴 시위대는 모두 경찰을 자극하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고 이는 분명히 더 큰 갈등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탄발사' 그림 든 홍콩 시위 지지자(홍콩 AP=연합뉴스) 2일 홍콩에서 반정부 시위 지지자가 전날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 반대 시위 진압 도중 경찰이 한 시위자에게 실탄을 발사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을 들고 있다. bulls@yna.co.kr


미국,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의 반발도 변수이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홍콩 시위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중국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지난 1일 시위에서 고등학생이 경찰이 쏜 실탄에 맞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국제사회의 비판 여론은 더욱 거세졌다.

홍콩 정부와 중국 중앙정부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는 것은 미국 의회가 추진하는 '홍콩 인권 민주주의 법안'이다.

'홍콩 인권 민주주의 법안'은 미국이 매년 홍콩의 자치 수준을 평가해 홍콩의 특별지위 지속 여부를 결정하고, 홍콩의 기본적 자유를 억압한 데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 미국 비자 발급을 금지하고 자산을 동결하는 내용을 담았다.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는 이 법안은 이달 중순 미국 의회 본회의 표결에 부쳐질 것으로 전망된다.

만약 긴급법 발동 등으로 미국 내 여론이 더욱 악화해 '홍콩 인권 민주주의 법안'이 미국 의회를 통과해 시행되면 홍콩 경제는 관세 특혜 등을 잃는 치명상을 입게 된다. 미국과 무역전쟁을 벌이는 중국에게도 큰 타격이 될 수 있다.

긴급법 발동에도 불구하고 홍콩 시위 사태가 진정되지 않을 경우 중국 중앙정부가 미국 등 국제사회의 제재를 각오하고 홍콩에 인민해방군을 투입하는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홍콩과 이웃한 중국 도시 선전(深천<土+川>)에서 중국군 무장경찰이 대규모 훈련을 벌이고, 송환법 반대 시위 시작 후 홍콩 내 중국 주둔군이 2배로 늘었다는 보도가 나오는 것은 이러한 우려에 힘을 실어준다.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의 알렉산더 닐 연구원은 "중국은 홍콩 경찰에 의한 질서 유지가 불가능해질 때를 대비해 적극적인 비상 계획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ss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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