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 어려워진 ‘계층 순환버스’ [90년대생 불평등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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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9.30. 오후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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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는 ‘순환버스’를 닮았다. 부모의 자산과 소득, 학력은 자녀에게 대물림된다. 그 자녀는 또다시 자신의 자녀에게 이를 물려준다. ‘계층’이 세대를 거치며 순환한다. 조국 법무부 장관 딸의 입시비리 의혹은 이 같은 순환고리를 수면 위로 드러냈다. 상류층 자녀들은 부모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교육을 풍족하게 받는다. 부모 인맥을 활용해 ‘스펙’이라는 각종 이력을 쌓는다. 이를 기반으로 명문대에 진학하고 선망직업을 갖는다.

문제는 부모의 계층적 배경이 단순히 자녀의 학업과 취업 수준을 결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모의 그림자는 자녀의 주거권과 건강권, 안전권, 인맥, 더 나아가 삶의 태도에까지 깊게 드리운다. 어떤 계층에 속하는 순환버스에 타는지에 따라 삶이 지나치는 풍경 자체가 달라진다.

한번 탄 버스에서 ‘환승’을 하기가 점점 어려워진 시대다. 빨간 정차 버튼은 없다. 세대 간 계층이동이 막혀 있다. 경향신문은 29일 계층이 세대 간 대물림되는 과정을 순환버스가 ‘사교육-대학-취업’이라는 세 정거장을 지나치는 것에 비유해 살펴봤다.

한국 공교육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공교육 기회는 국민 대다수에 열려 있다. 하지만 사교육은 다르다. 부모 소득이 많은 아이는 사교육을 많이 받는다. 그렇지 못한 아이는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공교육 확대로 줄어들었던 교육의 불평등이 다시 생겨나는 지점이다. 올해 내놓은 통계청의 ‘사교육비 조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월평균 소득 800만원 이상 가구의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50만5000원이다. 월평균 소득 200만원 미만인 가구는 9만9000원에 불과했다. 약 5배 차이다. 월평균 소득 800만원 이상인 가구의 84%가 사교육에 참여하지만 200만원 미만 가구의 참여율은 47.3%였다.

자녀의 사교육 경험은 부모 소득뿐 아니라 학력에 따라서도 차이가 난다.

부모 학력이 높을수록 자녀가 사교육을 경험할 기회가 많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7년 지역·가구소득·양육자 학력별 사교육 경험 통계’에서 부모 학력이 대졸자 이상인 청소년의 88.8%가 사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부모 학력이 초졸 이하인 청소년은 30.6%, 중졸 이하인 청소년은 58.6%에 불과했다.

■ 부모 소득·학력 따라 어떤 ‘계층 버스’에 올라탈지 결정돼

계층의 ‘순환버스’

■ 사교육 정거장

사교육 따라 성적 갈리고

부모의 소득이 높을수록

일반고보다 자사고 입학

명문대 진학률도 높아져


사교육은 입시제도 변화에 따라 진화를 거듭하고 그 영역을 넓힌다. 사교육 변화를 얼마나 좇아가는지에 따라 사교육 기회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 서울 노원구의 한 고교 3학년 담임교사인 ㄱ씨(29)는 “주요 대학들이 학생부종합전형(학종)으로 학생들을 뽑으면서 입시 컨설팅, 자기소개서 첨삭 등 비용을 써야 할 사교육 영역이 넓어졌다”고 말했다. ㄱ씨는 “우리 학교처럼 저소득층이 많은 강북 학생들은 여기에 돈을 쓰는 경우가 많지 않지만 고소득층이 많은 강남은 흔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학종으로 대학에 가려면 고교 1학년 때부터 봉사활동과 교내수상 등 생활기록부를 탄탄하게 준비해야 한다”며 “이를 챙겨줄 여유가 있고 정보와 인맥이 많은 부모는 많지 않다. 이런 입시제도가 불평등을 확대한다”고 했다.

사교육 기회 격차는 학업성취도 차이로 이어진다. 사교육을 많이 받은 아이가 높은 성적을 받는다. 통계청의 사교육비 조사 자료에서 지난해 상위 10% 고등학생의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38만4000원이었다. 하위 20% 학생은 21만1000원으로 2배 가까이 차이 났다.

부모 소득에 따라 자녀가 어느 고교에 들어갈지도 달라진다. 소득이 높은 부모일수록 실업계고 대신 일반고에 자녀를 입학시킨다.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다. 최필선 건국대 교수와 민인식 경희대 교수가 한국고용패널 2004~2013년 자료를 분석해 내놓은 ‘부모의 교육과 소득 수준이 세대 간 이동성과 기회불균등에 미치는 영향’에서 가구소득이 가장 높은 5분위는 일반고 진학률이 약 90%였다. 소득 1~2분위에서는 일반고 진학률이 50~60%대로 낮았다. 가구소득이 낮은 자녀는 실업고에 진학해 대학 입학 대신 노동시장에 진출하는 경향을 보였다.

고소득층 부모는 일반고 대신 특수목적고·자율형사립고에 자녀를 입학시킨다. 유한구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연구위원과 이혜숙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부연구위원이 2010년 서울시내 251개 초·중·고생 7887명의 가정배경과 개인특성 등을 분석한 결과, 외고·국제고·과학고 등 특목고 학생의 평균 가구소득은 727만원, 자사고는 526만원으로 집계됐다. 일반계고 학생의 평균 가구소득은 400만원대였다. 고소득층 부모가 자녀를 특목고 등에 보내는 건 자녀를 ‘명문대’에 입학시키기 위해서다. 특목고와 자사고는 일반고보다 학비가 수배 더 들고 명문대 입학률도 일반고보다 높다.

■ 대학 정거장

대학 내 리더 맡는 경험 등

취업 스펙·인맥도 ‘격차’

직종·고용안정성에 영향


부모의 계층적 배경은 자녀의 대학 입시 성적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최필선·민인식 교수 연구를 보면 부모 학력이 높을수록 상위권 대학에 진학 가능한 1~2등급 비율도 높았다. 부모가 대졸 이상이면 자녀의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 1~2등급 비율은 20.8%에 이르렀다. 보호자가 고졸 미만이면 자녀의 수능 성적 1~2등급 비율은 1%가 채 되지 않았다.

부모 소득이 높으면 자녀의 4년제 대학 진학률도 높다. 같은 연구에서 소득 1분위 자녀의 4년제 대학 진학률은 30.4%이지만 소득 5분위의 4년제 대학 진학률은 68.7%였다. 황규성 노동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이 2016년 전병유 한신대 교수의 ‘2016년 한국의 불평등’을 요약한 연구자료에서 4년제 대학에 가지 않은 학생의 월평균 가구소득은 220만원이었지만 4년제 대학에 입학한 학생의 가구소득은 340만원이었다. 부모 합산 소득이 1분위이면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이 37.4%에 그친 반면 5분위는 81.4%로 나타났다.

명문대에 입학하는 비중 또한 고소득층 자녀가 높다. 오호영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과 이정수 고려대 박사과정이 한국교육고용패널 2004년, 2013년 자료를 분석한 ‘청년층의 계층이동과 시장경제에 대한 태도’에서 저소득층 가구의 1~10위권(수능 점수 등 기준) 대학 진학 비중은 0.9%, 11~20위는 1.9% 등에 불과했다. 고소득층은 1~10위권 대학 7.4%, 11~20위 10.2% 등으로 저소득층 가구에 비해 각각 8.6배, 5.3배 높았다. 연구진은 “계층 세습이 학력보다는 학벌에 더 좌우될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서울대 대학생활문화원이 매년 시행하는 ‘신입생 특성조사’ 자료에서 2000년대 이후 최근까지 서울대 신입생 아버지의 직업 비율은 의사·변호사·판검사·연구원·교수·교사 등 전문직이 25~30%에 달했다. 경영주·대기업 간부·고급 공무원·사회단체 간부 등 고위관리직도 15~20%였다. 입학생 10명 중 4~5명의 아버지가 이른바 고위직에 있었다. 아버지 직업이 농축수산업인 학생은 1~3%, 비숙련 노동자는 1~2%, 무직은 1~3%에 불과했다.

부모의 계층적 배경은 대학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김영미 연세대 교수의 2016년 ‘계층화된 젊음: 일, 가족형성에서 나타나는 청년기 기회불평등’ 논문에 따르면 대학 재학 중 학생회나 동아리 등에서 리더를 맡은 경험은 고소득층 청년일수록 높게 나타났다. 해외여행과 단체활동 경험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제적 지원을 해줄 수 있고 인맥이 많은 부모를 둘수록 대학생 자녀는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가 용이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취업 등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인맥 역시 격차가 크다. 201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발표에 따르면 ‘의지할 수 있는 친척이나 지인이 있다’고 응답한 대졸자와 고졸 미만 학력자는 각각 82%와 42%였다. 인적 네트워크 격차는 OECD 가입국 중 한국이 가장 컸다.

서울 하위권 대학을 졸업한 박보미씨(28·가명)는 “대학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등록금도, 용돈도 못 받아 아르바이트를 3개씩 해야 했다”며 “기회가 생기는 대로 스펙을 만들어 중소기업에 입사했지만 20대 초중반을 회상하면 힘들었다는 기억이 크다”고 말했다.

■ 취업 정거장

부모의 계층적 배경은 자녀 취업과도 연관된다. 고소득층 자녀일수록 고소득·고용안정(정규직·원청업체) 등을 누리는 질 좋은 일자리를 얻는다. 이들이 ‘고졸-전문대-4년제 대학-명문대’ 순으로 서열화된 피라미드의 상위를 점하기 때문이다.

최필선·민인식 교수의 연구에서 소득 5분위 그룹 자녀(2004년 고3 표본 기준)의 2014년 월급은 193만원으로 소득 1분위 자녀 162만원에 비해 19.1% 더 높았다. 부모 학력이 대졸(전문대 포함) 이상이면 자녀 월급이 179만원인 데 비해 부모 학력이 고졸 또는 고졸 미만인 경우에는 145만~148만원으로 30만원 이상 차이를 보였다.

‘청년층의 계층이동과 시장경제에 대한 태도’에서 가구소득이 높을수록 자녀의 선망직장 취업률도 상승하는 경향이 보였다. 고소득층 가구에 속하는 청년 취업자가 고소득 직종 등 선망직장에 종사하는 비율은 30%였다. 중소득층 25.4%, 저소득층 19.5%로 가구소득이 낮아질수록 점점 하락했다.

고용안정성도 부모에 따라 달라진다. 부모 지원 아래 대학에 입학한 뒤 취업한 자녀의 정규직·대기업 입사 비중이 컸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04년 고교 3학년이었던 2514명을 10년간 추적조사한 결과, 정규직 비율은 대학 진학 후 취업한 학생들이 84.5%로 가장 높았다. 이어 선취업·후진학 학생(81.6%),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학생(79.5%) 순이었다. 300인 이상 대기업 취업 비율은 대졸자의 경우 34.3%, 고졸자 29.7%, 선취업·후진학 대졸자 26.7%로 차이가 났다.

일자리의 질은 근무환경까지 좌우한다. 저소득층 자녀가 고소득층보다 질 낮은 일자리에 종사하는 비중이 높다는 건 이들이 더 위험한 일을 맡는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지난 8월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발전소 자회사 노동자는 원청 노동자보다 작업 중 사고를 당하거나 중독될 확률이 7.1배 높았다. 하청업체와 협력사 노동자는 원청 노동자 대비 각각 8.1배와 8.9배 수준이었다. 자유한국당 문진국 의원이 발표한 ‘업종별 30대 기업 중대재해 발생현황’을 보면 2011~2015년 30대 기업에서 발생한 사고 사망자 중 86.5%(212명)가 하청 노동자였다.

안전을 넘어 건강 수준도 달라진다. 김승섭 고려대 교수 등은 2016년 ‘한국의 비정규직 고용과 건강 연구에 대한 체계적 문헌고찰’을 발표했다. 연구진은 고용 형태와 건강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 37편 중 35편에서 ‘정규직 노동자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건강이 유의미하게 나빠진 것’을 확인했다.

■ 자산 축적의 격차, 교육 불평등의 고리로 자녀 세대 ‘대물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음주나 흡연, 사고 등으로 몸이 아프거나 수면장애, 만성질환, 우울증 등을 더 쉽게 겪었다. 자산·소득 격차가 자녀 세대로 이어지면서 주택 임대차 여부·거주 지역·주택 유형 등 주거 수준도 차이가 벌어지는 결과가 발생한다.

■ 계층의 대물림

‘개천에서 용 난다’도 옛말

“노력해도 지위 상승 못해”

부모의 계층, 자녀의 삶으로

OECD “경제성장에 부정적”


자녀가 ‘개천에서 나는 용’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부모가 뒷받침해주지 못하면 묻혀버리는 시대다. 김세직·류근관 서울대 교수가 2016년 내놓은 논문 ‘학생 잠재력인가? 부모 경제력인가?’는 고소득 지역인 서울 강남구와 저소득 지역인 강북구 학생의 지능·노력·유전 등 잠재력을 분석했다. 그 결과 둘 사이 서울대 추정 합격률은 1.7배 차이가 났지만, 2014년 실제 서울대 합격률은 20배 넘게 차이가 났다. 비슷한 자질을 가졌어도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성과가 달라진다는 얘기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말이 됐다. 주병기 서울대 교수는 지난 2월 부모 학력·소득 수준과 자녀의 성공(수능 고득점, 고소득 획득) 여부를 측정한 ‘개천용지수’(기회불평등지수)를 내놓았다. 그는 부모 학력이 가장 낮은 집단(중졸 이하) 출신자(30~50세)가 능력이 있어도 소득 상위 20%에 진입하지 못할 확률이 2000년 23%에서 2013년 34%로 뛰었다고 했다. 2017년에도 28.9%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시민들도 계층이동이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을 알고 있다. 통계청의 ‘한국의 사회지표’에서 노력에 의한 사회경제적 지위 상승 가능성에 대한 인식은 점차 낮아지는 추세다. 2011년 본인, 자녀의 지위가 상승할 수 있다고 본 응답자는 각각 28.8%, 41.7%였지만 2017년에는 23.1%, 30.6%로 줄어들었다.

부모의 계층적 배경이 자녀의 교육과 노동시장 성과, 더 나아가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대물림 현상은 여러 사회경제적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본다. 세대 또는 계층 간 갈등이 심화되거나 사회통합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빈곤·건강 불평등이 세습되고 경제성장이 저하되는 점도 지적된다. OECD는 2014년 보고서에서 “계층의 대물림을 통한 소득불평등 심화는 경제성장에 상당한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다.

황규성 노동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소득을 통해 자산 축적에 불평등이 생기고 이게 다시 교육을 통해 자녀 세대로 대물림된다”며 “요즘에는 교육 등 계층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했던 사회경제적 기반마저 무너져 세대 간 계층이동이 사실상 어려운 상태”라고 진단했다.

< 시리즈 끝 >

이보라·심윤지·조문희 기자 purp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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