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이 그랬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386세대 남성이었다. 운동권 출신이었다. 언제나 학생운동 시절의 경험을 영웅담처럼 늘어놓곤 했다. 그러나 내가 바라본 아버지의 모습은, 당신이 묘사하듯 과거의 그 멋진 모습이 아니었다. 약자를 대변하지도, 노동자를 존중하지도 않는 위선으로 가득 찬 꼰대가 나의 아버지였다. 난생 처음 만난 택시기사와 정치적 언쟁을 벌일 때는 ‘박사’라는 자신의 지위를 앞세웠고, 책임감 있는 자세로 돌봐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던 우리 삼 남매에게 학벌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는 비하적 언어로 ‘공돌이’와 ‘공순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커서 저러지 말아야지”라는 통제 가능한 결론을 도출했다.
아버지는 가족을 돌보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방관으로부터 장남이었던 나는 어릴 적부터 책임의 중요성을 배웠다. 사실 이건 훨씬 나중에 깨달은 거고 내 어린 시절은 그저 불우했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제대로 된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다. 나와 두 명의 동생을 부양한 건 보험 일을 비롯해 갖은 일을 하던 어머니였다. 대학 운동권 서클에서 만나 같은 꿈을 꾸던 두 사람. 그러나 한 사람은 가부장적 꼰대 마인드로 무장해 가족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는 존재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가장 큰 피해자는 우리 삼 남매가 아닌 어머니인지도 모른다. 한때 아버지의 이념적 동지였던 어머니는 당신의 삶을, 온전히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자식을 키우는 데 바쳤다. “그때는 손만 잡아도 결혼해야 하는 줄 알았다”라며,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게 해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어머니는 선비질이 몸에 밴 386의 피해자였다. 하지만 피해자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악착같이 우리 삼 남매를 거뒀으며, 내가 대학에 들어가서 내 학비를 스스로 벌게 되자 “내 인생을 살겠다”고 선언했다. 여성학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휴학하고 돈을 벌면서, 그런 어머니가 아버지만큼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해했다. 그리고 어느덧, 문제의식을 배움의 토대로 삼는 어머니의 모습과 닮은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젠더 갈등과 세대 갈등을 얼마든지 풀어낼 수 있는 문제로 바라보는 건 이런 경험에서 나온 것이리라.
물론 대학 입학 직후에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부모님의 이혼 소송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홀로 학비를 벌며 대학을 졸업하고 정치권에 나선 지금까지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내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스스로 노력해서 쟁취한 명문대 졸업장이라는 학력이라도 없었다면 나는,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미약하게나마 도움을 주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여성가족부였다. 가정폭력을 가정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게 만들고, 위자료와 양육비 산정 기준을 개선하였으며, 한부모 가정 지위를 신설하여 지원한 건 여가부의 공이다. 내가 직접 경험해봐서 안다. 그러기에 가족 문제만큼은 지금의 여가부 이상의 세심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젠더 갈등을 부추기는 여가부가 아니라 말이다. 어릴 적 여가부의 도움을 받은 내가 여가부를 폐지하고 미혼모와 한부모 가정, 위안부 피해자 보호 등의 업무를 총괄하는 부처를 신설하겠다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생각에 기꺼이 동의할 수 있는 이유다.
세상에는 많은 악이 존재한다. 사실은 악은 어디에나 있다. 그래서 문제의식이 있고, 갈등이 있고, 그렇게 갈등하며 사회는 성장한다. 세대갈등과 젠더갈등도 마찬가지다. 자식이 부모를 반면교사 삼듯, 청년세대는 기성세대를 반면교사 삼아 새로운 가치를 좇는다. 그렇게 도달하게 될 미래가, 세대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