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대

최악의 오보사건 : 이승만과 김구 때문에 조국이 분단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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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3.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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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현대사에서 좌익과 우익은 어떻게 나뉘나?


일반적으로 좌익이라고 하면 

급진적이고 혁명적이고 


경제적으로 평등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인식이 되고


우익이라고 하면 

보수적이고 민족적(국수적)이면서 


경제적으로 경쟁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인식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고정된 개념이 아니다.


시대마다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해방 정국인,  

1945년 ~ 1948년를 꼬집어 보자면


역사학자들은 꽤나 독특한 방법으로 

좌익과 우익을 구분하고 있다.


어떻게 

말인가?

 


일단 경제적인 부분은 

대부분 무시한다.


왜냐하면 당시 정치인들은 모두

사회주의적인 마인드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반공우익적인 인사로 알려진 

이승만 조차도 이렇게 말했을 정도다.

(1945년 10월 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이라는 방송 연설 중)


 이승만

"공산주의도 

배울 점이 있습네다."


 이승만

"특히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는 수용할 부분이 많습네다."


따라서 경제적인 관점은 배제하고

단순히 계급적인 입장 차이로만 따지는 경우가 많다.


"계급적인 입장이라니?"


"쉽게말해, 부르주아 계급(지주와 자본가들)을 

주류에 포함시킬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먼저 공산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박헌영

"지주와 자본가들은 모두 배제하고

노동자와 농민들이 주도적으로 정부를 만들자."


사회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운형

"지주와 자본가들 중에 친일파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력들이 뭉쳐 정부를 만들자."


그렇다면 

우익들은?


 이승만

"일단 모두(친일파도 포함해서)가 뭉쳐서 

정부를 만들자."


물론 경제적으로도 

미세한 차이점은 있다.


공산주의자는 

이렇다.


 박헌영

"지주와 자본가의 재산을 싹 다 몰수해서

공짜로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나눠주자." (무상몰수 무상분배)


사회주의는

이렇다.


 여운형

"지주와 자본가의 재산들은 싼값에 몰수해서

공짜로 노동자와 농민에게 나눠주자." (유상몰수 무상분배)


우익의 생각은

이렇다.


 이승만

"지주와 자본가의 재산들은 싼값에 몰수해서

싼값에 노동자와 농민에게 나눠주자." (유상몰수 유상분배)


이렇듯 

미묘한 차이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모두가 사회주의적인 분배 방식이다.

 

 

"일제강점기 지주와 자본가들의 수탈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국민들은 자연스레 

사회주의 사상에 빠질 수밖에 없었음."

 

사상이 분명하지 않았던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당시 우익계 정치가들은 

대부분 뚜렷한 이념 노선이 없었던 것이다.


우익 인사들이 

공산당을 싫어하는 이유만 봐도 이렇다.


유교적 마인드와 위정척사사상이 강했던 김구는 

이런 이유로 공산주의를 싫어했다.


 김구

"사물의 질서는 위아래로 정연하게 배열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거스른다는 것은 자연에 반하는 것임."

 

 김구

"고로 좌파들이 떠드는 평등주의는 

조화를 해치는 일시적인 풍파일 뿐."


가장 미국식 자본주의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이승만조차도


자신이 기독교 신자였던 점 외에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이승만

"공산주의는 

파괴주의자라서 싫다."



● 지주와 자본가, 친일파들이 뭉쳤다


때는 

1945년 9월 초.


해방 후 우리나라는 

좌익 계열이 주도하여 


자체적으로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고

 

인민공화국이라는 

임시 국호까지 선포하고 난 뒤였다.


해외에서는 

이승만과 김구 모두 


미국이 선뜻 입국을 허락해주지 않아 

발만 동동 굴리고 있었고


과거 친일 전력이 다분했던 지주와 자본가들은

바싹 움츠려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럴 때 

미군정이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미군정은, 

건국을 주도했던 좌익계열의 조직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건 

지주와 자본가들로 이루어진 우익집단들이었다.


미국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지주와 자본가들을 비호할 거라는 풍문은 사실이었다.


그렇게 힘을 얻게 된 우익들은

미군정이 주둔한 지 1주일 후, 대대적인 창당작업을 갖게 된다.

 

전국적으로 200여 명의 

우익인사들이 모여들었는데,


특이한 건 

호남 지역 지주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전라도 지역은 농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지주나 부호들이 많았음."


이들은 건준이 만든 

인공을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근본도 없는 인공 따위 사이비다.

우리는 임시정부만 인정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정당의 이름은 

한국민주당(한민당)이었고


당수로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를 추대했다.


     

▲ 한민당의 주요 인사들 (좌측부터) : 송진우, 김성수, 조병옥, 윤보선, 장택상, 장덕수


그리고 이런 한민당이 바로, 

오늘날 정통야당인 


민주당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 한민당 당원들


"어? 친일파 계열하면 

왠지 집권 여당 쪽이 아닐까 싶은데.. 그게 아니었네?"


"우리나라는 반세기 넘게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애초에 좌익 정당이란 

살아남기 힘들었음."


"그리고 사실 야당이든, 여당이든 그 뿌리를 찾다보면 

모다 다 친일친미반공우익으로 귀결된다능."


어찌보면 역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안타까운 역사였다. 


어쨌든 

그렇게 시작된 한민당은


시작부터 친일파 정당이니, 

부르주아 정당이니 하는 비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실제로 3/4 가량이 

친일 경력의 인사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전국적으로 

'인민위원회'라는 조직으로


기반을 튼튼히 다지고 있던, 좌익 세력과 비교해 

너무도 세력이 미약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한민당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미국!


미군정

"우리가 원하는 사람은, 미국에 협조할만한 보수적이고 

이왕이면 미국 유학 경험 있는 사람들임"

(좌익의 경우 대부분 소련이나 중국에서 활동했었다)


미군정

"딱 조병옥같은 인물!"


때문에 한민당은 

발빠르게 미군정과 유착할 수 있었고,


결국 군정 내 요직 11개 중 

9개를 한민당 인사가 차지하게 된다.


 


한민당이 임정을 내세운 점은

내세울만한 항일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임정과 연계시킬 필요성을 느낀 탓이다.


"친일파 숙청이 

가장 두려웠던 한민당."


당시 해외에는 

임정보다 더 큰 독립단체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럼에도 임정을 고집한 이유는

화북지방과 소련에 있던 단체들은 하나같이 좌익 성향이었지만

▲ 연안의 독립동맹


중경의 임시정부는

나이가 연로한 보수주의자와 기독교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 중경의 임시정부


따라서 미국과 가까워진 한민당 당원들은

미국을 설득해 김구의 귀국을 적극 추진하게 된다. 



● 좌익의 균열


해방 이후 건국을 주도했던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은 

미군정이 들어서자 자동 해산되었고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인민당)을 창당하여,

건준을 대체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 

박헌영의 공산당과 의견대립이 있었다.

▲ 박헌영과 여운형


무엇보다 

친일파 청산 문제부터 차이가 있었다.


 여운형

"일단 정부를 세우고 나서, 

친일파들을 처단합시다."


 박헌영

"아니 될 말입니다. 

친일파부터 싹을 잘라내는 게 우선입니다."


 여운형

"나도 예전에 레닌을 만났지만, 

'조선'에서는 과격한 혁명보다 민족해방을 먼저 하라고 하셨소."

(참고로 여운형은 '한국'이라는 국호를 대한제국의 잔재라며 매우 싫어했다)


 박헌영

"스탈린 동지의 생각은 

그렇지 않슴돠."


그렇게 온건한 사회주의자 여운형의 생각과

과격한 공산주의자 박헌영의 생각은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박헌영은 

독자적으로 공산당을 재창단하면서 

(1925년에 창당한 조선공산당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체됐었다)


여운형과는 

궤를 달리하기 시작한다.

 

▲ 조선공산당 행사 : 가운데 박헌영

 

그리고 이후 좌익 계열은 

대부분 박헌영 쪽으로 기울게 되면서


한동안 

박헌영의 공산당은 


38선 이남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정당으로 군림하게 된다.


"전국적으로 정착된 인민위원회가 

뭐니뭐니해도 공산당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지."



이후 박헌영은 혁신적인 '정치강령'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8월 테제)


 

"反 일제 反 민족반역자"

 

"무상몰수 무상배분"


"反 한민당" 

"한민당은 지주와 자본 계급의 이익을 대표한 반동적 정당!"

 

"反 민족주의" 

"민족주의자는 계급운동을 포기한 사이비!"



● 이승만의 귀국


해방이 되면서 

가장 귀추가 주목되었던 건 


해외에서 명망이 높았던 

이승만과 김구의 귀국이었다.


그 중 이승만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해외 독립운동가였다. 


"아 글쎄, 윌슨 대통령이 총장이던 

대학교 출신이라잖아."

(사실 그 이유로 상해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뿐인가! 미국의 소리라는 단파 방송으로 

수 년째 해외소식을 국내에 알렸다잖아."


대외적으로도 이승만은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코리아하면 프레지던트 리"

(이승만은 국무총리 시절부터 해외에서 대통령으로 사칭하고 다녔다)


하지만 미국은 

이런 이승만의 귀국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너무 반공반소적인 인물임.

소련이 많이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 함."


이런 이유로 미국무부는 

이승만을 기피인물로 지목해서


두 달 가까이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다가 

겨우 내줬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의 귀국은 

다른 해외 독립운동 지도자보다는 이른 것이었다. 


그는 귀국 라디오 연설에서

이렇게 강조하면서


 이승만

"나는 '평민의 자격'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연합군 환영대회에서 

미군정의 '하지 장군'은


예정에도 없던 대중 연설기회를 주며 

대중들에게 이승만을 전면적으로 알렸다.

▲ '서울시민 미군 환영대회'에서 4일 전 귀국한 이승만이 연설하고 있다


다만 이때 미군정은 

이승만의 엄청난 대중적 지지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흐억! 이 엄청난 환호성은.."


그런 이승만의 귀국을 반긴 건 

무엇보다 한민당이었다.


"이박사님이 우리 당에 오시면,

우리를 감히 누가 건드리겠어."


그래서 

이승만에게 부탁을 했는데,


"우리 당으로 오셔서 

당수가 되어 주세요."

 

이승만은 

야심이 큰 인물이었다.


 이승만

"나는 일당 일파의 영수가 아니라 

온 국민의 벗이 되고 싶소."


겉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속마음은 이러했다.


 이승만

"장차 내가 대통령이 될 몸인데

한민당에 갇혀있으라니, 농민과 노동자들이 나를 뽑아주겠어?"



● 김구의 귀국


이승만이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독립운동을 했다면


김구는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으며 

독립운동을 했었다.


따라서 8.15 해방 이후, 

중국의 장제스는 


김구를 통해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 김구(좌)와 장제스(우)


그러나 그걸 모를 리 없는 미군정은 

근 석 달동안 김구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상황이 묘해졌다.


거물급 우익 인사들의 

귀국이 늦춰지다보니,


38선 이남에는 

온통 좌익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던 것.


 

"지금 너무 빨갱이들이 많아.

이러다 큰일나겠어."


그리하여 김구의 입국을 허락했는데,

이때 미군정은 조건을 붙였다.


 

"임시정부 주석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입국 허락하는 거임. 명시하셈!"


미국은 

미군정 외에 


또 다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귀국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 돌아온 김구

 

 김구

"나 개인이 아니라 

임시정부의 귀환입니다."


  

"뭐야! 약속이 틀리잖아."


다만 장제스가 준 20만달러의 정치자금은 

끝내 미국이 불허했다.


"장제스가 대체 

무슨 속셈으로 돈을 준거야!"


어쨌거나, 김구의 귀국으로 

또 다시 설레었던 한민당이었다.

 

때문에 한민당의 당수 송진우가 직접,

김구가 입경한 다음날 후원금을 가지고 찾아왔는데,


이때 김구 일행들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친일파의 돈은 

그다지 깨끗하지가 못해서리.."


그러자 열받은 송진우가

버럭 따졌다.


 송진우

"정부가 받는 세금 속에도 

양민의 돈도 들었고 죄인의 돈도 들어 있는 것이오."


 송진우

"당신네들이 정부를 자처하면서

이럴 수 있는 것이오?"


첫만남부터 그렇게 

삐걱 거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김구 일행은

결국 한민당의 돈을 넙죽 받아 챙겼기 때문에


한민당으로서는

제 것 주고 뺨 맞는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1945년 12월, 

귀국한 임정 요인을 환영하는 자리가


한민당 간부에 의해 마련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임시정부의 신익희가 이렇게 말했다.


 신익희

"국내에 있던 사람들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들에요."


그러자 화가 난 

한민당원들이 받아쳤다.


 장덕수

"그럼 난 어김없는 숙청감이군 그래."


 신익희

"어디 설산(장덕수의 호)뿐인가."


 송진우

"여보 해공(신익희의 호)

표현이 좀 안됐는지 모르지만.."


 송진우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정을

누가 오라 하였기에 그런 큰소리가 나오는 게요."


 송진우

"중국에서 궁할 때 뭣을 해먹고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어!"


그리고 김구가 

괴로운 표정으로 모두 엿듣고 있었다. 


 김구

"..."



● 신탁통치 오보사건


1945년 12월 

우리 역사상 최악의 오보사건이 터졌고


결국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영영 갈라지고 말았다는 


평가가 있을만큼의

심대한 파국을 맞게 된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 모인 

미·영·소 3국의 외무 장관들은


향후 한반도 독립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게 된다.

▲ 모스크바 3상 회담


내용은 

이러했다.

 


 

"한반도에서 미·소 양국이 

단일정부 수립을 위한 '공동위원회'를 설치하자능."

 

 

"본질은 한반도에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고, 

신탁은 부차적인 문제!"

 

"최대 5년까지 

미소중영 4개 정부가 신탁을 하되,"


"신탁기간에도 통치의 기본 주체는 임시정부이며 

4개국은 후원의 역할만 할 뿐이다."


즉 한반도의 조기 독립을 위해 

열강들이 후원을 자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모스크바 3상회의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동아일보는 

엄청난 오보를 터뜨리고 만다.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


읭?

 

본래 신탁통치안은 

미국 쪽 생각이었고


임시정부 수립 안이 

소련 쪽 의견이었는데,


친미반공의 우파 언론이었던 동아일보

대충 전해들은 내용을,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급하게 보도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만큼 당시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세계 정세에 어두웠던 것."


"평소 미국과 소련의 대외전략을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이런 오보는 결코 날릴 수가 없었을텐데.."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는 

뒤늦게 오보임을 알고 수습을 하려고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인터넷과 같은 매체가 없었기 때문에 


신문이 가진 정보의 독점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쏘련놈들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더욱이 '식민통치'에서 벗어난지 

겨우 넉 달 밖에 안된 시점이라


대중들의 '신탁통치'에 대한 거부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덕분에 해방정국의

우리나라는 


남북을 통합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문제는

완전히 뒷전으로 밀린 채 


신탁통치만이 크게 부각되어 

신탁통치 반대(반탁) 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된다.

 



● 오보의 비극 


반탁운동에 가장 앞장선 것은 

김구를 위시한 임시정부 계열이었다.


김구는 반탁운동과 함께 

임정법통론도 병행했다.


 김구

"우리가 왜 서양 사람 구두를 신는가,

차라리 짚신을 신고 양복도 벗어버리자"


 김구

"공산당의 실상이 그러하다.

이제라도 임정 중심으로 뭉치자!"


김구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자를

매국노라고 규정했다.


이승만은 한술 더 떠 

이참에 좌익세력의 기세를 확실히 꺾어놓고자 했다.


 이승만

"봤지? 

공산당은 매국노야!"


반면에 박헌영은 크게 난처했다. 

본인도 반탁의사를 밝혔지만,


김구와 이승만의 공격으로 

공산당이 크게 욕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오보 사실이 퍼지고 있었다.


먼저 김규식이 신탁통치 결의문을 입수해 검토한 뒤, 

곧 반탁 대열에서 이탈했고


 김규식 

"사실은 그게 아니잖아!"


이어서 안재홍, 여운형 등이 

잇달아 이탈했다.


 안재홍 

"동아일보에 속았어."


 여운형

"이거 큰일이구먼."


그러나 김구는 오보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도

신탁통치 반대의사를 강력히 관철하려 했다.


오히려 

이렇게 절규했다.


 김구

"우리 민족이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으며," 


 김구

"피를 흘려서라도 

자주 독립정부를 우리들 손으로 세우자!" 

 

이렇게 거물급 정치인사가 부추겼으니

그 불길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예 반탁운동을 

'제2의 독립운동'으로 간주해 버렸다.

▲ 1945년인데 컬러 사진이다!


이럴 때 '오보사건의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송진우가 김구를 찾아왔다.


김구는 송진우가 반탁운동에 함께 할 것으로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송진우는 

3상회의의 진실을 설파하며


오히려 

반탁운동을 철회할 것을 종용했다.


 송진우

"신탁통치는 길어야 5년이에요.

그 기간 동안에도 통치의 주체는 우리 민족이라 했어요." 


 송진우

"그러니 여유를 갖고 

냉정히 생각해봅시다."


 김구

"..."


때문에 

김구의 표정은 좋지 못했고


그날 밤 송진우는

그의 저택에서 총을 맞고 피살되고 만다.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이렇게 평했다.

 

 브루스 커밍스 

"송진우를 암살한 배후는 김구였다."


 브루스 커밍스 

"김구는 테러와 암살에 

정통한 사람이다."



● 공산당의 협상지지 선언


박헌영과 공산당 역시 

처음에는 모두 반탁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박헌영이 평양을 다녀온 후로 

'협상 지지'로 선회한다.

 

 박헌영

"알고 보니, 오보였어."


 박헌영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위해 

잠시동안 관리를 해주겠다는 것임."

 

 박헌영

"빨리 정부를 수립하고 싶으면

3상 협상을 지지해야함. 그래야 빨리빨리 진척됨."


그리하여 좌익계열은 갑자기 돌변하여 

협상지지 시위를 벌이게 된다.


하지만 우익들은 

공산당의 '협상지지' 선언을 '찬탁'으로 매도했다.


이참에 좌익 세력을 

확실히 꺾어놓고 말겠다는 의지였던 것이다.


 김구

"찬탁을 주장하는 

조선공산당은.."


 김구

"반민족적 집단이자 

소련을 모국으로 생각하는 사대주의자들!"


"찬... 탁!

와! 쟤네들봐. 지금 신탁 찬성하는거임?"

 

 

"거봐. 쟤네들 소련 앞잡이라니깐."


이에 좌익들은 

항변했다.


"찬탁이 아니라, 

3상 협상을 지지한다는 거임."


"찬탁이라니, 우익들의 모략임! 

어디에도 찬탁은 없어"


하지만 네거티브 공략은 주효해서

이후로 공산당의 인기는 크게 급락하게 된다. 


한편 북한에서도 

신탁통치 오보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고,


결과적으로 

김일성의 권력 강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김일성

"여러분들 봤디요? 

사실은 미제놈들이 신탁을 주장한기야요."


 김일성

"앞으로 우익 분자들은 

전부 매국노로 간주하갔시요."



●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았던 반탁운동


반탁운동을 했던 

이승만의 전력을 보면


그는 1921년 상해 임시정부의 대통령 직에 있으면서

국제연맹에 덜컥 위임통치를 청원한 적이 있었다. 


 이승만

"코리아를 국제연맹이 맡아서 관리해주세요.

일제는 내쫓아내주시고.."


그러자 상해 임정은 난리도 아니었다.

당시 신채호는 이렇게 비난했고


 신채호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에요!"


이승만은 

이렇게 되받아쳤다.


 이승만

"이봐요,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요."


하지만 그때 일로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탄핵되어 면직되고 말았다.


이랬던 이승만이 

1946년 1월에 와서는


찬탁 행위를 매국노라 지칭하면서 

비난에 앞장선 것이다.


김구가 반탁을 주장한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김구

"새로 임시정부를 세워? 

임정이 있는데 무슨 소리!"


즉 임시정부를 전혀 인정해주지 않은

열강의 결정에 대한 반발이었고


자존심과도 같은

'임정법통론'에 대한 고집이었다.


한편 한민당의 경우

영수인 송진우가 피살을 당하기는 했지만


결국엔 반탁운동에 동참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한민당

"지금 당장 임시정부가 세워지면

민심을 업고 있는 좌익에게만 유리함."


한민당

"그러니 좌익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라도

3상회의의 진실 따위는 접어두고.."


한민당

"좌익을 찬탁분자로 선동하는 

반탁운동에 동참할 필요가 있음."


그리하여 이승만, 김구, 한민당으로 대표되는 우익들은

모두 반탁 운동으로 결집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반탁운동은 

친일파를 애국자로 둔갑시키는 도구로도 이용된다.


친일파

"신탁통치 반대!

소련 앞잡이들을 처단하자!"


이와 관련해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이렇다.


 강준만 

"김구의 반탁운동으로

공산당의 인기는 크게 추락하고 만다."


 강준만

"반면에 존립기반이 약했던 보수주의자들이나 친일파들에게는 

예상치 않은 정당성을 얹어주게 된다."


 이인수 

"오늘날 유독 

김구가 추앙받는 이유는.."


 이인수 

"박정희 정부가 이승만의 권위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띄워줬기 때문이다."


 이인수 

"사실 김구는 해방 정국에서 

용도가치가 떨어진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다."


 이인수

"따지고 보면, 그의 반탁 투쟁이

해방공간 좌우대립구도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이인수

"결국 남북 분단으로까지 

연결되고 말았다."

 


● 오보사건의 결과


3상 회의 오보 사건은 

우익계가 반탁운동을 전개하며


열세였던 지지도를 만회하려는 술책으로 이용되면서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리 심각하지 않았던 좌우 이념 대립이 


본격적으로 

심화되는 계기였고

 

수많은 친일파 세력들이 

반탁운동을 악용해 


자신들을 '반공투사', '애국자'로 

화려하게 변신시킨 희대의 사건이었다.

▲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 경찰들


우리와 비슷한 사례로 

오스트리아가 있었다.


2차대전 이후 

이런 식으로 분할 점령되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좌우대립을 피하고 


좌우합작을 통해 

분단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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