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 어때요?”…‘마우스’ 작가의 눈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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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1.07.05. 오전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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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르물 진일보’ 최란 작가 인터뷰]
사이코패스 주인공인 ‘마우스’
1회부터 퍼즐 맞춰 나가듯 연결
소품 하나까지 계산 ‘무릎 탁’
다음달 프랑스 행사에도 초청
“잔혹 판타지도 하고 싶어요”
드라마 <마우스>를 쓴 최란 작가. 남지은 기자


그는 태블릿피시에서 ‘복싱글러브’를 검색하고 있었다. 응? 혹시 누구를 패려는 건 아닐까. “하하. 제가 사이코패스 작가여서요? 저 개미 한마리도 못 죽인다니까요. 하하.” 지난 5월 종영한 드라마 <마우스>(티브이엔)를 보다가 작가한테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생각했다’는 우스갯소리를 건넨 적이 있다.

그만큼 놀라웠기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잔혹한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인 경우가 있었던가. 주인공을 응원하는 한국 시청자의 정서상 선한 인물인 경우가 많았다. <마우스>의 경우, 대단한 모험이다. 아니, 개척이다. “그래서 정바름 캐스팅이 쉽지 않을 거라 각오하고 있었는데 승기씨가 흔쾌히 하겠다기에 너무 신났죠. 만나자마자 물어봤어요. 광고 모델 섭외가 줄면 어떡하냐고.(웃음) 배우로서 뭔가 보여주고 싶다는 대답이 너무 멋졌어요.” 이승기는 편성, 감독, 그 어떤 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대본의 완성도 하나만 믿고 작품을 선택했고, 편성이 엎어질 위기에도 묵묵히 기다려줬을 정도로 작가에 대한 신뢰가 강했다. 그는 약속대로 뭔가를 보여줬고, 배우로서 한 단계 도약했다. 특히 잔인한 ‘사패’, 그걸 숨기기 위한 위장술인 더없이 순한 순경, 이후 눈뜬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 등 선악을 오가는 복잡한 연기를 눈빛과 표정의 변화를 활용해 섬세하게 드러냈다. “살인적인 스케줄에 배우들 모두 고생했어요. 그들이 없었다면 저도 너무 힘들었을 거예요.”

<마우스>. 티브이엔 제공


한국 장르물을 진일보시켰다고 평가받는 <마우스> 최란 작가를 지난 1일 서울 마포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장르물은 간접광고(피피엘)는 꿈도 못 꾸고 수출이 힘들다는 이유로 지상파에선 애물단지 취급받아왔지만, 수년 사이 많은 것이 달라졌다. 중국 수출용 드라마로 인기가 많았던 로맨스물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사태 이후 판로가 막막해지면서 퇴조의 길을 걸었다. 그 빈자리를 미국 등에서 관심이 많은 장르물이 채웠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오티티)가 일상화된 것도 다양한 장르에 관심을 갖게 했다. 그 중심에 최란 작가가 있다.

그가 쓴 <신의 선물―14일>은 국내 드라마로는 최초로 파일럿 프로그램 제작 없이 미국 지상파 <에이비시>(ABC)에서 <섬웨어 비트윈>이란 이름으로 리메이크됐다. 본편 제작 결정 전 파일럿 제작을 통해 상품성을 따져보는 선례에 비춰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신의 선물―14일>. 에스비에스 제공


숱한 장르물 중에서도 최란 작가의 작품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뭘까? 정덕현 평론가는 “1회부터 마지막회까지 퍼즐 조각을 맞춰나가듯 이야기가 매우 정밀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호평했다. <마우스>도 1회에서 무심코 봤던 장면이 알고보면 이유가 있었다는 걸 후반부에서 확인하고는 무릎을 치게 된다. “기획 단계부터 전 회차를 다 생각하고 시작해요.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찾고, 취재를 한 뒤 시놉시스(간단한 개요)를 자세하게 쓰죠. 작품마다 시놉시스만 늘 100장이 넘어요.(웃음)” 외국이라면 여러 작가가 한회씩 나눠 쓸 이야기를, 그는 혼자 그 많은 퍼즐을 흐트러뜨리고 다시 맞춰나간다. 그래서 최 작가의 작품은 장르물 중에서도 연출에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하지만 한국은 장르물 촬영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족하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품, 장소, 심지어 후드티까지 계산된 이유가 있다 보니, 촬영 현장에서 그 계산이 어긋나면 다음회 대본을 수정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마우스>에서도 그런 일은 어김없이 벌어졌다. <마우스>는 작년 추석 전, 첫 촬영이 시작됐다. 1회 촬영 전 대본이 12회까지 나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반 사전제작도 못 한 채 1회가 시작됐다. 중반부터는 거의 생방송처럼 흘러갔다. 대본이 일찍 나왔는데도 방송사고가 나고 결방까지 한 이유를 물으니 그는 “모두 고생한 작품이고 배우들에게 고맙다”며 말을 아꼈다.

“다만, 드라마를 쓰는 건 너무 행복한데, 드라마화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시스템의 허점은 속상해요. 장르물은 사전제작, 적어도 반 사전제작은 필수인 것 같아요. 바쁘게 찍다 보면 현장에서 대본을 작가와 상의 없이 수정하거나 신을 아예 안 찍는 경우가 생기거든요. 최소한 ‘이 장면을 빼겠다’고 얘기라도 해주면 좋겠는데. 장르물의 경우 특정 장면을 상의 없이 빼버리면 다음 대본을 다 수정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작품의 퀄리티가 떨어져서 너무 속상하죠.” 작가는 최근 <마우스> 대본집을 개인적으로 발간했다. 그는 말을 아꼈지만, 홍주가 왜 집에 돌아가지 않았는지 등 드라마를 보면서 의아했던 대목들이, 대본을 보니 이해가 됐다. 빠진 장면과 잘못 촬영된 장면 등이 많았다.

드라마 <마우스> 대본집을 든 최란 작가. 남지은 기자


드라마 작가는 외롭고 억울한 직업이다. 작가는 혼자 작업실에 틀어박혀 대본을 쓰느라 현장과 소통이 단절되기 일쑤다. “그래서 이상한 소문에 대처할 수도 없어요. 특정 방송사를 무시해서 그곳과는 작품을 안 하겠다고 했다거나, 모 프로듀서에게 뭘 집어던졌다거나, 입에 담기에도 민망한 소문까지 돌아요. 이번 작품도 작가가 대본을 늦게 썼다거나, 대본을 다 쓰고도 제작진한테 주지 않아서 결방이 됐다는 소문이 너무 속상했어요. 20회까지 이미 탈고를 한 상태였는데 쪽대본이라는 기사까지 나왔더라고요.”

작품을 쓰다가도 이런 황당한 소리를 들으면, 아무리 무시하자고 다짐해도 멘탈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럴 땐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단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대화 중간에 종종 “이런 이야기 어때요?”라고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이야기꾼들은 이야기 만드는 걸 놓을 수가 없다. 줄거리를 풀어놓을 때 그의 눈은 가장 빛난다. 천생 이야기꾼인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뭐가 됐든 남들이 안 한 것,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최란 작가는 2008년 데뷔작 <일지매>(에스비에스)가 시청률 30%를 넘기며 화제를 모은 이후 작품마다 새로운 시도를 했다. <마우스> 이전엔 어느 드라마도 사이코패스의 내면을 이렇게 자세하게 쓴 경우는 없었다. 취재력이 좋은데, 그의 경력에 이유가 있었다. <피디수첩>을 시작으로 시사교양프로그램 작가를 15년 정도 했다. 그 경력이 장르물을 쓰는 데 도움이 됐다. “취재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 <세이버>(미공개)를 쓸 때는 전국 소방서를 다 돌아다녔어요. 시사교양 작가를 오래 했기에 발로 뛰면서 곳곳을 다녀요.” <마우스>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도 <일지매>가 끝나고 범죄심리전문가 표창원이 진행한 사이코패스 관련 특강을 들으러 가서였다. 그 인연으로 표창원은 <마우스>에 특별출연도 했다.

<일지매>. 에스비에스 제공


“장르물 작가가 돼야겠다 생각한 건 아니지만, 시사교양 작가를 오래 하면서 세상을 일찍 알게 된 것 같아요. <일지매>를 쓰면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내가 신나서 쓰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범죄수사물만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새로운 얘기를 찾다 보면 늘 장르물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잔혹 판타지도 하고 싶어요.” 드라마를 통해 사회가 조금이라도 바뀌었으면 하는 희망을 담은 마음은 작품마다 깔려 있다. 박근혜 정권 때 방영한 <신의 선물―14일>에는 대통령이 다른 드라마와 달리 영부인의 비리를 책임지는 멋진 모습으로 등장했다. “대통령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사회는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나저나 복싱글러브는 왜 검색하고 있었던 걸까. 혹시 다음 작품이 복싱을 접목한 장르물? “올해 제 목표가 안 해본 것 해보기라서요. 복싱과 도자기, 드로잉을 배우고 있어요. 생각해보니까 제가 글 쓰는 거 말고는 해본 게 없는 거예요. 학원 선생님들이 다들 제가 재능 있다고 하시니 너무 신나요. 하하.” 음. 그 순간, ‘그거 다 상술인데’라는 생각부터 드는 걸 보면, 현실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우리가 작업실에서 살인마 사이코패스 이야기를 쓰는 작가보다 더 세상을 못 믿는 이기적인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우스>를 썼어요. 사회가 각박해지면서 팽배해진 이기주의 때문에 우리가 점점 일종의 집단 사이코패스화되는 게 아닐까요. 타인의 죽음 앞에서 휴대전화부터 꺼내는 현실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었어요.”

그는 오는 8월26일부터 9월2일까지 프랑스에서 열리는 ‘시리즈 마니아’ 행사에 참석한다. <마우스>가 ‘페스티벌 스크리닝작’으로 선정되어 작가를 공식 초청했다. 2010년부터 시작된 ‘시리즈 마니아’는 여러 나라의 감독, 작가 등이 모여 최고의 드라마 시리즈를 선정하는 행사다. “이 역시 해보지 않은 일을 하겠다는 올해 제 목표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세상을 많이 경험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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