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재훈의 실리콘밸리 인사이더] 요즘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최고다양성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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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지난달 애플의 연례 개발자 행사인 WWDC(Worldwide Developers Conference)를 실시간 온라인 중계로 지켜보다 깜짝 놀랐다. 팀 쿡 CEO(최고경영자)가 "우선 인종차별과 불평등, 불의(injustice)에 대해 말하겠다"며 기조 연설을 시작하는 걸 보고서였다. 시가총액 기준 세계 최대 기업의 대표가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된 행사장에서 거침없이 인종차별을 말하고, 구체적 해결책까지 제시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그동안 미국 내에서 인종차별 문제는 사회 일부의 논의 대상이었을 뿐 주류 사회에선 다소 금기로 여기는 주제였다.

애플뿐만이 아니다. 지난 몇 주간 실리콘밸리의 크고 작은 테크 기업들이 일제히 인종차별에 항의하고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는 운동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왜 유독 실리콘밸리의 기술 기업 CEO들은 다른 지역·업종 CEO보다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일까.

우선 실리콘밸리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능력을 중시하는 문화 때문이다. 팀 쿡은 성소수자다. 창업자도 아닌데 능력을 인정받아 당대 최고 기업 CEO 자리까지 올랐다. 이곳은 출신 국적, 인종, 성별, 성적 지향보다 능력을 훨씬 중시하는 문화가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알파벳(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CEO 역시 인도 출신 유색인종이다. 미국 이민정책센터 통계를 보면,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창업자의 과반이 이민자다. 당연히 피부색에 따른 차별을 온몸으로 거부할 수밖에 없다.

많은 실리콘밸리 기업은 CDO(최고다양성책임자·Chief Diversity Officer)라는 직책을 두고 있다. CEO(최고경영자), CFO(최고재무책임자), CTO(최고기술책임자)처럼 '최고' 타이틀을 가진 고위직이다. 성별·인종·문화 등 조직의 다양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이다. 실제로 페이스북의 CDO팀에서 일하는 지인은 "인종차별 문제가 불거진 지난 한 달간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음재훈 실리콘밸리 벤처 투자가

심지어 실리콘밸리가 위치한 캘리포니아주는 지난해 모든 상장 기업이 연말까지 이사회에 여성을 적어도 한 명 두라는 법(SB 826)까지 통과시켰다. 2021년 말까지는 이사가 5명인 경우 최소 2명, 6명 이상이면 최소 3명을 두는 식으로 점차 비율을 늘려야 한다.

또 다른 이유는 테크 기업들이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 소통을 좌우하는 엄청난 영향력을 쥐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미국인은 인종차별이 사회문제라는 건 알지만 이를 직접 겪은 적은 거의 없다. 주류 미디어도 잘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가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동영상을 트위터, 유튜브, 페이스북에서 수백만 명이 함께 돌려 보며 격분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됐다.

테크 기업들이 움직이는 것은 직원과 고객들의 기대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런 성명을 내지 않으면 '침묵은 동조'라는 오해를 받을 만큼 이들은 기업의 명확한 태도를 요구한다. 실리콘밸리는 수시로 해고, 이직이 가능할 만큼 고용 유연성이 높은 곳이다. 직원들도 회사를 택할 때 처우뿐만 아니라 이런 기업 정책, 방향성을 매우 중시한다.

실리콘밸리의 한 핀테크(금융 기술) 회사에 다니는 필자의 아내도 최근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인종차별 문제가 불거지자 회사 대표는 전 직원이 참여하는 '타운홀 미팅'(공개 토론)을 열어 자신과 회사의 입장을 설명하고, 직원들 질문에도 일일이 답변했다고 한다. 대표가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플로리다에서 자라며 백인으로서 겪었던 경험, 자신의 고등학생 두 아들이 코로나 검사까지 받아가며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는 개인적인 얘기까지 울먹이며 나눴다는 것이다. 이날 회의 이후 특히 밀레니얼 세대 직원, 상대적으로 흑인 비율이 높은 텍사스 지사 직원들에게서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졌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는 후일담을 들었다.

국내 기업들도 지난 20여 년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해 왔다. 다만 각종 봉사 활동에는 적극적인데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경우는 드물다. 여러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되지만 아쉽다. 어릴 적부터 마블 만화·영화 팬인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수퍼히어로는 '스파이더맨'이다. 유독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 "엄청난 힘에는 엄청난 책임이 따른다." 밀레니얼 세대에게는 테크 기업들이 바로 그 수퍼히어로다. 가지고 있는 엄청난 힘과 영향력을 한껏 발휘해 사회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꿔주길 기대한다.

[음재훈 실리콘밸리 벤처 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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