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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세계사

마릴린 먼로

세기의 스타

[ Marilyn Monroe ]

출생 - 사망 1926.6.1. ~ 1962.8.5.

1954.1.14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다

마릴린 먼로(마를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의 만남은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두 세계’의 절묘한 결합이었다. 1950년대 영화산업은 최고의 절정이었고, 미국의 프로야구는 모든 미국인들의 공통된 화제였다.영화배우 마릴린 먼로는 세계를 유혹하는 섹스 심벌로 명성을 더해가고 있었고, 조 디마지오는 미국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존재였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세기의 결혼식

1951년에 은퇴한 조 디마지오는 메이저리그 56경기 연속안타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우고 통산타율 3할2푼5리 홈런 361개를 친 전설의 메이저리거로 인기 절정의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와의결혼 소식을 들은전 세계 사람들은 설레는 가슴으로 두방망이질했다. 1954년 1월 14일, ‘20세기 최고의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와 프로야구의 상징적인 강타자 조 디마지오는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두 사람 모두 두 번째 결혼이었다.일본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는데,여행 중 먼로는한국을 방문하여 미군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갖기도 했다.

디마지오와 함께한 마릴린 먼로

2월 12일 공연을 앞두고 대구 동촌비행장에는 먼로를 환영하기 위해 배우 백성희와 최은희가 마중을 나갔고, 세계적인 여배우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인해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향수병에 걸려 있는 군인들을 상대로 한 미군부대에서의 공연이 더욱 열광적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먼로가 직접 쓴 <마이 스토리>에 그때 공연 모습이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먼로가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한 장교가 당황한 모습으로 다가와 말했다. “예정보다 일찍 무대에 오르셔야겠어요. 더는 군인들을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무대 위로 돌을 던져대고 있어요.”

공연을 마친 먼로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디마지오와 함께 여행을 즐겼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두 스타의 결혼생활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두 사람의 불화는 이미 예정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먼로가 만인의 주목을 받기를 원했다면 디마지오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뭐든 싫어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9개월 만에 파경을 맞게 된다. 10월 4일 먼로의 변호사가 이혼을 발표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애정이 완전히 식은 것은 아니었다.디마지오는 먼로가 세 번째 결혼에도 실패하고 약물중독에 빠졌을때다시 사랑의 손길을 내민다. 재결합을 목전에 둔 1962년 8월 5일, 먼로는 서른여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그 후 디마지오는 20여 년 이상 매주 장미꽃을 그녀의 무덤에 바쳤다. 1999년 디마지오는 숨을 거두기 전 “이젠 먼로를 다시 볼 수 있겠군”이라고 말했단다. 그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화제 만발했던 결혼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영원할 것이다. 2006년 5월에는 그들이함께 사인한 야구공이 19만1200달러(당시약 1억8000만원)에 팔리기도 했다.

고아 소녀가 스타가 되기까지

가장 화려한 스타였으나, 한편으로 가장 불행한 여인이기도 했던 마릴린 먼로는 그 출생부터가 비극적이었다. 1926년 6월 1일 먼로는 어머니 글래디스 펄 베이커의 딸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의 이름은 노마 진이었다. 출생신고서에 기록되어 있는 아버지 마틴 E. 모텐슨은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실제 아버지는 어머니의 직장 동료였던 스탠리 기포드였다. 훗날 먼로는 여러 번 친아버지를 찾았지만, 아버지는 딸을 만나기를 꺼려했다. 어린 시절 직장에 다니던 어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딸을 맡기고 가끔 들러서 그녀를 만나곤 했다.

해맑은 미소의 어린시절과 데뷔초 노마진 시절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노마 진은 심한 애정결핍에 시달리게 되었다. 어머니가 정신분열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수용된 뒤에는 어머니의 친구 집에서 생활하다가 고아원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1942년 6월 19일, 마지막 보호자 그레이스 고다르의 주선으로 노마 진은 제임스 도허티와 결혼했다. 그러나 도허티는 해병대에 입대했고, 혼자 남은 노마 진은 군수공장에서 일하다가 1945년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버를 만나 모델과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노마 진의 꿈은 이제 스타가 되는 것이었지만, 도허티는 노마 진의 일을 하찮게 여겼다. 1946년 9월 13일 두 사람은 이혼에 합의했다. 이혼한 노마 진은 할리우드로 향했다.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에서 노래까지 부른 먼로

1946년 8월 26일, 노마 진은 이름을 마릴린 먼로로 바꾸고, 20세기폭스사와 첫 계약을 맺었다. 주로 모델로 활동했지만, 그것은 여배우로 성장하기 위한 전초 작업이었다. 1947년 마릴린 먼로는 첫 번째 영화 <스쿠다 후! 스쿠다 헤이! Scudda-Hoo! Scudda-Hay!> (1948년 개봉)에 출연하지만, 편집과정에서 그녀의 연기는 대부분 잘려나가고 영화사와 계약도 연장되지 않는다. 이후 그녀는 <위험한 세월 Dangerous Years>(1947), <코러스의 숙녀들 Ladies of the Chorus>(1949), <러브 해피 Love Happy>, <아스팔트 정글 The Asphalt Jungle>(1950),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Gentlemen Prefer Blondes>(1953),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How to Marry a Millionaire>(1953) 등에 출연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다. 특히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는 먼로가 ‘섹스 심벌’로서의 이미지를 굳히는 데 크게 기여한다.

1954년 먼로는 조 디마지오와 혼인한 후 <7년 만의 외출 The Seven Year Itch>(1955년 개봉)을 촬영한다. 이 영화로 인해 먼로는 특별한 이미지를 세계에 선물한다. 지하철 환풍구 바람에 드레스가 들리는 관능적이면서도 코믹한 장면은 그해 9월 15일 뉴욕에서 촬영된 것이다. 매력적인 외모뿐만 아니라 연기력도 인정받고 싶어했던 먼로는 뉴욕의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리 스트래스버그로부터 연기를 배웠다. 탁월한 연기력까지 갖춘 그녀는 할리우드로 돌아와 <버스 정류장 Bus Stop>(1956), 로렌스 올리비에와 공연한 <왕자와 쇼걸 The Prince and the Showgirl>(1957), <뜨거운 것이 좋아 Some Like It Hot>(1959), <부적합자 The Misfits>(1961) 등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영광 속에 숨어 있는 파멸

영화배우로서는 승승장구했지만, 그녀의 영광 속에는 늘 파멸에 대한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1956년 7월 1일 유대인 극작가 아서 밀러와 혼인하지만, 5년 만에 파경을 맞이한다. 그녀는 과학자 아인슈타인, 가수 프랭크 시네트라와 이브 몽탕,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케네디 형제와의 염문설도 뿌렸다. 이러한 화려한 연애 속에는 어쩌면 애정결핍에 시달렸던 어린 시절의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빨간 슬림 드레스를 입고 팬레터에 둘러싸여 포즈를 취한 먼로

노마 진의 어린 시절에 대해 페미니스트 안드레아 드워킨은 마릴린 먼로의 <마이 스토리> 서문에서 “이 어린 여자아이에 비하면 문학에 등장하는 불우한 어린 주인공들은 상황이 꽤 좋았던 셈이다. 디킨스도 이렇게 강하고 재치 있고 무지하고 가엾은 아이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드워킨은 또 마릴린 먼로의 남자들에 대해 그들이 “그녀의 찢어지고 곪은 상처에 소금을 대고 문질렀다”고 말한다. 섹스 심벌로서의 먼로의 이미지는 어쩌면 남성 판타지가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먼로를 유명하게 했지만, 그것이 또한 그녀를 불행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릴린 먼로 하면 ‘섹스 심벌’이라는 말과 ‘백치미’의 여인을 떠올린다. 지하철 환풍구 위에서 허벅지가 드러나도록 치마를 펄럭이며 천진하게 웃는 모습,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도발적인 입술, 반쯤 감은 눈, 출렁거리는 금발 미인, 그것이 우리가 떠올리는 먼로의 이미지다. 그러나 그 이미지의 이면에서 그녀는 모순된 우리 사회에 대해 상당한 깊이의 문제의식을 가진 배우였다.

"나는'섹스 심벌'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먼로가 가장 좋아한 미국인은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링컨은 그녀가 아는 인물 중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대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할리우드에서 블랙 리스트에 올라 있던 작가 링컨 스테펀스의 작품을 탐독했다.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와 달리 먼로는 만만찮은 지성을 갖춘 배우였던 것이다. 그녀는 <라이프> 지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섹스 심벌’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의 심벌이 되었든 이 심벌은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 섹스 심벌이 사물화될 때 그렇다. 나는 물건 취급 당하는 것이 무엇보다 싫다. 하지만 내가 어떤 것의 심벌이 되어야 한다면 기꺼이 섹스 심벌이 되겠다. 어떤 여자들은 스스로든 스튜디오의 유혹에 의해서든 나처럼 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 여자들은 전방이나 후방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 중간에서 살고 있다.” 먼로는 스스로가 최전방 또는 최후방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그것은 영광의 첨단이자 불행의 심연일 수 있다. 이러한 발언은 백치미의 그녀가 결코 백치가 아님을 보여준다.

죽기 얼마 전의 모습

영화평론가 유지나의 마릴린 먼로에 대한 발언은 그녀의 진가를 다시 한번 생각게 한다. “정치적 자유를 갈망하고,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진보적 이데올로기를 추종했던 배우, 반공을 애국적 광기로 몰아가던 매카시즘에 저항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던 용기 있는 배우, 인민주의를 이상으로 삼아 인민(people)이라는 말을 좋아했던 배우,자신의 신체적 매력을 전략적으로 남성 판타지 속에 투사하며 가부장적 할리우드 시스템에서 생존을 시도했던파워 페미니스트로서의 잠재적 가능성을 지닌 여성, 연기를 통한자아 실현의 의지를 갖춘 철학적 시인 같은 지성적 배우, 고독을 친구 삼아 철저하게 자기 준비를 했던 프로, 대중이 만들어준 스타의 공익적인 기능을 간파한 동시에 장식품이 되기를 거부했던 지성, 그러면서도 자아 도취와 자기 혐오라는 극단적인 인지 부조화 속에서 죽음으로 자신을 내몰 정도로 순수하게 자신을 직면했던 마릴린 먼로!”

1962년 6월 1일은 먼로가 20세기폭스 사와 마지막으로 작업한 날이자 공개석상에 모습을 보인 최후의 날이었다. 이후 그녀는 극심한 조울증 증세를 보였다. 1962년 8월 5일 이른 아침, 마릴린 먼로는 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사인은 수면제 과다로 발표되었다. 그녀는 갔지만, 그녀가 남긴 이미지는 우리에게 영원히 있다. 그 이미지 때문에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저승으로 무대를 옮겼다. 조 디마지오는 저승에서 마릴린 먼로를 ‘다시’ 만나 ‘어떻게’ 사랑하고 있을까?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칼 롤리슨의 <세상을 유혹한 여자 마릴린 먼로> 은 섹스 심벌이자 ‘백치미’의 금발 미인으로서의 마릴린 먼로의 생애를 사실적으로 접근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화려한 바람둥이로서의 먼로의 이미지를 전면적으로, 아니 부분적으로 수정케 한다. 이 책에 따르면 마릴린 먼로는 진정으로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싶었던 여인이었다. 먼로가 아서 밀러와 혼인할 때 유대교로 개종한 것, 자식을 낳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이 이를 증명한다. 조 디마지오와 혼인했을 때에도 남편 가족의 종교인 가톨릭을 믿으려 애썼다.이 책은 또한 가난한 어린 시절로부터 불꽃 같은 정열로 스타가 되기까지 먼로의 치열한 노력을 드라마틱하게 구성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가난한 이의 편에 서서 모순된 사회구조에 맞서려는 그녀의 내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마릴린 먼로, My Story> 는 마릴린 먼로가 스스로 쓴책이다. 1954년경에 씌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책은 먼로의 어린 시절부터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 생활까지 자신의 일생을 솔직담백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미완의 자서전은 그녀의 사업 파트너였던 밀턴 H. 그린(Milton H. Greene)에게 전해진 원고를 책으로 낸 것이었다. 조 디마지오와 먼로는 성격적으로 꽤 차이가 나는 듯하지만, 먼로는 두 사람이 닮은 점이 많다고 말한다. “스타가 되는 것은 회전목마 위에 서는 것과 같다. 여행을 할 때도 회전목마를 가지고 간다. 그 지역 사람이나 낯선 풍경은 볼 수 없다.”(본문에서) 이 책에 담긴 그녀의 마음속에서 우리는 먼로의 인생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발행일

발행일 : 2009. 01. 14.

출처

제공처 정보

  • 차창룡 시인, 문학 평론가

    글을 쓴 차창룡은 1989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됐으며, 제13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고시원은 괜찮아요>,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등 다수의 시집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 이미지 getty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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