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새옷 입고 돌아온 추억의 시트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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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순풍·하이킥 유튜브로 부활

10~20년 전 시트콤이 유튜브를 통해 돌아왔다. 화면은 옛날 그대로지만 자막과 편집 기술은 최신이다. 10대들은 "재밌다"며, 30~40대는 "추억이다"라며 빠져들고 있다. / MBC·SBS

#1. "엄마 '지뚫킥(지붕 뚫고 하이킥)' 빵꾸똥꾸 넘 재밌어. '순풍' 미달이 이모가 스카이캐슬 우주 엄마 맞지?" 김모(43)씨는 초등학교 4학년 딸(10) 질문에 귀를 의심했다. "너 태어나기도 전에 한 방송인데 그걸 어떻게 알아? 케이블에서 재방송 봤어?" 딸이 답했다. "아니, 유튜브로 봤지. 우리 반에서 엄청 인기야."

#2. "퇴근해서 '순풍' 보며 힐링해요.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면서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정화돼요." 직장인 김아인(가명·34)씨 피로 해소제는 1990~2000년대 시트콤이다.

21세기 초등학생이 20세기 초등학생을 보며 깔깔댄다. 30대 직장인이 10~20년 전 프로그램을 보며 스트레스 푼다. '순풍 산부인과'(1998~2000)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2000~2002) '하이킥' 시리즈(2006~2012)…. 추억의 시트콤이 돌아왔다. 컴백 무대는 브라운관이 아니다. 유튜브로 새 옷 갈아입고 금의환향했다.

10~20년 전 시트콤이 1억8000만뷰

옛 시트콤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3~4년 전. 네티즌들이 시트콤의 웃기는 장면을 따로 모아 만든 '짤'(인터넷에서 도는 자투리 이미지를 뜻하는 속어)과 유튜브 영상을 올리기 시작하면서다. 그러다 지난해 초 몇몇 영상이 크게 화제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인기가 점화됐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웬그막)'에서 신구 등 출연진이 웃음을 참지 못해 NG 낸 장면이 그대로 방송에 나간 장면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웃음보가 터지는 영상으로 확산됐다. '거침없이 하이킥'(2006~2007)에서 20년 차 무당이 기 센 박해미의 눈치를 보다가 굿을 망치는 '무당 이기는 박해미' 편도 인기 끌었다.

소셜미디어에서 네티즌들이 편집한 옛 시트콤 동영상이 화제를 모으자 원생산자인 방송사에서 다시 옛 콘텐츠를 가공해 서비스하기 시작했다. MBC는 지난 5월 유튜브 공식 계정에 '오분순삭'이라는 코너를 새로 만들었다. '지붕 뚫고 하이킥' '거침없이 하이킥' '뉴 논스톱' 등 과거 시트콤을 5분으로 짤막하게 편집하고 요즘 식으로 자막과 해시태그를 달아 업로드하고 있다. 5분이 순간 삭제되는 것 같은 '마성의 콘텐츠'가 목표다.

SBS도 지난해 6월 공식 계정 'SBS NOW'에 '순풍 산부인과'와 '웬그막'을 10분짜리로 편집해 올리기 시작했다. 조회 300만회 이상 기록한 동영상도 있었다. 유명 유튜버도 기록하기 어려운 수치다.

오분순삭 담당자인 김영규 MBC 디지털랩장은 "창고에 먼지가 쌓여가는 명작이 많아 어떻게 재조명해야 할지 구상하던 중 '푹티비' '티빙' 등 VOD 플랫폼에서 '거침없이 하이킥'의 다운로드 수가 꽤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지난해 7월부터 옛 시트콤에 자막을 입혀 새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고 했다. 김 디지털랩 팀장은 "2015년 작품부터는 한 포털과 계약이 돼 있어 불가능하지만, 그 이전 작품은 저작권이 우리에게 있어 유튜브에 올릴 수 있었다"고 했다. '오분순삭'은 월·수요일 오후 5시에 올리고, 금요일은 오후 5시 30분에 '10분 순삭'을 올리는데 실시간 스트리밍을 하면 동시 접속자가 4000명 가까이 된다. 김 팀장은 "'지붕 뚫고 하이킥'은 최근 누적 조회 수가 1억8000만뷰를 넘길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했다.

짧고 웃기는 이야기, 배꼽을 흔들다

여러 장르 중 왜 시트콤일까. 방송 관계자들은 형식과 소재 두 측면에서 요즘 젊은 세대 취향에 맞는다고 했다. '순풍 산부인과' '하이킥' 시리즈 등을 연출한 '시트콤 대부' 김병욱 PD는 "내 시트콤은 30분짜리인데 대개 두 에피소드가 들어가 있어 한 에피소드 중심으로 하면 15분 정도다. '짤'로 만들어 모바일로 빨리빨리 보기 편하니 다시 주목받는 것 같다"고 했다.

대중문화 평론가 정덕현씨는 "시트콤은 짧으면서도 웃음 강도는 굉장히 높아 요즘 보기 좋다"며 "과거엔 시트콤이 신인 등용문 같아서 '뉴 논스톱'의 조인성,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이종석 등 지금 젊은 층에서도 인기 있는 유명 배우들의 초창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라고 했다.

유튜브 채널 SBS NOW 담당인 SBS 홍보팀 이슬기 차장은 "편집하면 한 에피소드가 10분 내외로 요즘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웹 드라마와 비슷하다"고 했다. 이 차장은 "시청자와 쌍방향으로 소통할 수 있어 댓글을 보고 에피소드를 선정해 올리다 보니 반응이 좋다"며 "제일 조회 수가 많이 나온 장면은 순풍 산부인과에서 미달이가 방학 숙제를 하는 에피소드로 조회수 322만 뷰를 기록 중"이라고 했다. 댓글엔 '○회 △△ 에피소드 올려주세요'라고 구체적인 요구를 올려놓는 시청자가 많다. 방송국과 시청자가 함께 먼지 쌓인 보물을 발굴하는 격이다.

시트콤 소환한 '뉴트로'

인천의 초등학교 5학년 담임교사 양모(29)씨는 올 학기 초 시트콤 때문에 아이들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아이들이 순풍 산부인과에서 미달이가 초콜릿 먹으려고 공부하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다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거예요. 나중에 보니 제가 열 살 때 방영했던 시트콤이더라고요." 양씨는 학생들하고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유튜브에서 '순풍 산부인과 레전드' 에피소드를 다 찾아봤다.

"예전 시트콤은 요즘 TV 프로에 없는 거라 재미있어요. 또 우리 또래 초등학생 주인공이 나와서 더 웃겨요." 초등학교 6학년 봉윤화(12)양은 "시트콤 속 '초딩'이 지금 '초딩'들하고 비슷하면서도 달라 신기하다"고 했다. "미달이나 해리도 벼락공부 하고 숙제하느라 힘든 거 보니 우리하고 똑같은데 스마트폰 없이 노는 건 신기했어요. 걔네는 인형 놀이하면서 놀거든요." 윤화양이 '걔네'라고 칭한 미달이(김성은·28), 해리(진지희·20)는 현실에선 이모뻘이다.

시트콤을 추억에서 채굴해낸 동력은 요즘 강하게 부는 '뉴트로(newtro)'. 새로움(new)과 복고풍(retro)을 합친 말로 복고를 새롭게 즐기는 트렌드다. 20여 년 전 유행했던 아디다스 삼선 '추리닝'을 입고, 롤러 스케이트장·볼링장을 즐긴다. 젊은 세대에선 옛 시트콤 역시 과거를 즐기는 새로운 방법이다.

특히 10대가 많다. 대중문화 평론가 하재근씨는 "옛 시트콤은 방영 당시에도 10대에게 인기가 많았다"며 "학업, 연애 등 시대를 막론하고 '이거 우리 이야기다'라고 할 만한 소재를 많이 다뤘기 때문에 요즘 10대도 열광한다"고 했다. 또 "유튜브 세대인 10대에겐 '재미'가 콘텐츠 선택의 가장 큰 기준인데, 재미만 따지면 고전 시트콤을 따라올 만한 게 없다"고도 했다.

시트콤 방영 때 주 시청자였던 지금의 30~40대에겐 추억 되감기다. 'X세대'인 SBS 이슬기 차장은 "아들이 중학교 1학년인데 유튜브에서 시트콤을 보면서 '예전 아이들은 뭐 하고 노나' 하며 본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순풍'에서 미달이가 '포켓몬 빵' 사는 걸 보고 '저게 뭐야?' 하고 물어봐서 답해줬어요. 그런 식으로 요즘 세대와 소통도 하게 되네요. 저는 자연스럽게 시트콤 즐겨 보던 20대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고."

당시 등장했던 배우들이 다시 재조명되기도 한다. '순풍 산부인과'에 미달이 엄마로 출연했던 박미선은 지난 2일 '순풍'의 인기에 힘입어 그때 분장으로 광고 촬영을 했다고 인스타그램에 알렸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총조회 수가 1억뷰를 넘겼을 때, 이 시트콤에 출연했던 오현경·정보석이 tvn '인생 술집'에 게스트로 나왔다. 방송에서 오현경은 "초등학생들이 나를 이현경이라고 부른다"며 신기해했다. 오현경은 극 중 이순재 딸로 나와 이름이 '이현경'인데 요즘 애들한테는 이현경으로 더 유명하다고 했다.

가족, 원초적 재미… 사라진 웃음을 찾아서

한국형 시트콤의 특징은 '가족형 시트콤'이란 점. 많은 에피소드가 밥상머리에서 이뤄진다. 40대 시트콤 팬인 김모씨는 "1인 가구도 많아지고, 구성원도 다들 바쁘게 살다 보니 식구끼리 함께 밥 먹는 풍경이 사라진 지 오래"라며 "대가족이 식탁에 모여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묘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자극적 소재가 은근히 많다는 점도 옛 시트콤에 빠지게 하는 이유 중 하나. 대중문화 평론가 정덕현씨는 "과거 시트콤에선 외모 비하나 가학적, 피학적 소재를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며 "시청자 항의와 방송 심의 등으로 요즘엔 이런 소재를 방송에 쓰기 힘들어졌지만 여전히 원초적 웃음을 원하는 이가 많다"고 했다. 지금이라면 소위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 때문에라도 넣지 못했을 에피소드가 곳곳에 보인다.

실제로 순풍 산부인과에선 미달이가 엄마 생리대를 자전거 팔 보호대로 쓰거나 포경 수술 에피소드가 적나라하게 나온다. 김병욱 PD는 "지금은 시청자 파워가 세서 시청자 입맛에 따라 스토리가 바뀌는 세상"이라며 "나는 연출자의 권리를 주장하고 저항한 마지막 세대였던 것 같다"고 했다.

한 방송 관계자는 "레전드가 된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 순재'도, '웬그막'에서 시아버지 노구(신구)와 며느리 박정수의 피 튀기는 갈등도 지금 방영했다간 SNS에서 난리가 날 것"이라며 "남녀 주인공 이야기에도 데이트 폭력이라고 비칠 만한 게 많아 시청자 항의가 폭주할 게 뻔하다"고 했다. 김영규 MBC 디지털랩장은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어른들이 해리, 신애에게 하는 행동이 아동 학대 아니냐는 댓글이 달린다"며 "과거와 현재의 시각차를 보여준다"고 했다.

요즘 초등생도 좋아하는 미달이는 이젠 28세… 공중파 다시 출연하고 유튜브 채널 운영

"미달이 언니라며 댓글 달아요"




미달이도 곧 서른이다.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순풍)의 박미달 역을 맡은 배우 김성은<사진>은 올해 28세. 최근 순풍산부인과의 '역주행'에 힘입어 브라운관에 다시 등장하고 유튜브에서는 개인 채널도 운영한다.

지난달 11일 김성은은 KBS 예능 '해피투게더'에 출연해 미달이 시절 이야기를 전하며 포털사이트 실시간 인기 검색어 2위까지 올랐다. 같은 달 26일에는 SBS 공식 유튜브 채널 'SBS NOW'에 등장해 '순풍'을 함께 보며 시청자 질문에 실시간으로 답했다. 그녀는 "방송 섭외도 늘어났고, 중·고등학생이 내가 올리는 유튜브 영상에 '미달이 언니'라는 댓글을 남기기도 한다"고 했다.

김성은은 "가족 중심의 에피소드들이 옛 시트콤의 강점"이라고 했다. '미달이의 노래자랑 대회' 등 온 가족이 나오는 에피소드가 '순풍' 중에서도 100만 이상의 높은 조회수를 기록중이다. "1인 가구가 늘어난 지금은 보기 어렵죠. '순풍'에는 미달이 같은 어린아이부터 10대 학생, 20대 직장인 40~50대 중년, 60대 할아버지가 전부 나와요. 의찬이를 키우는 싱글 대디, 처가살이를 하는 밉상 사위 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거죠."

미달이는 잔꾀를 부리는 캐릭터로 사랑받았다. 그녀는 "당시에는 웃긴다는 생각 없이 진지하게 연기했다"고 했다. 미달이뿐 아니라 출연자 모두 극중에서는 웃음기 없이 고군분투한다. "그런 모습이 되레 웃기는 거죠. 우리 사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은 너무 힘든데 나중에 돌아보면 웃음이 나오잖아요. 보시는 분들도 자신의 모습이 투영돼 더 유쾌해하시는 것 같아요."

지금의 초등학생들은 그녀를 봐도 미달이인지 모른다고 한다. 가끔은 어른들에게 '언제 이렇게 컸느냐'며 대견하다는 말도 듣는다. "영상 속에서는 또래인 미달이가 지금은 이모뻘이 됐네요(웃음).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철없이 떼쓰고, 숙제를 안 해 혼나는 어린 미달이로 남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김미리 기자 miri@chosun.com] [이영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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