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사랑이 낳은 염세주의

쇼펜하우어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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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쇼펜하우어는 플라톤과 칸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고, 과학 기술적 세계관을 반성하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지었다. 한때 공포와 망상에 사로잡혀 기이한 행동을 했었지만, 《부록과 보유》라는 책으로 주목받았다. 그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랑과 비판 정신을 가졌던 염세주의 철학자였다.

“삶은 맹목적인 의지일 뿐이고 세계는 근원적으로 악하며 인생살이는 결국 고통일 뿐이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가치를 즐기고자 한다면, 그대가 먼저 세계가 가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 젊은 쇼펜하우어에 대한 괴테의 충고

삼류 철학자?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큰 흐름에서 본다면 메이저급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계를 무대에 비유한다면, 주연배우이고 싶어했지만 결국 밤무대 가수 수준에서 삶을 접어야 했던 사람에 가깝다고 할까?

그러나 쇼펜하우어를 이 정도 철학자로 보기에는, 그의 대중적인 유명세가 너무 크다. 그는 자신을 ‘철학의 숨겨진 황제’라고 생각했으며 후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실 그는 철학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철학자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정작 철학을 전공하는 이들 중에는 그의 사상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드물다.

오히려 쇼펜하우어는 철학 사상보다는, 엽기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기이한 행동과 돌출적인 언행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철학자이다.

용서할 수 없는 귀찮은 녀석

쇼펜하우어는 1788년 2월, 유럽 북쪽의 단치히(발트 해에 닿아 있는 폴란드 북부의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네덜란드계였다.

아버지는 크게 성공한 사업가였고 어머니는 나중에 작가로 알려질 만큼 예술가 기질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단다. 스무 살 정도의 나이 차와 상인과 예술가 기질의 차이를 생각해 볼 때 그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쇼펜하우어의 이름 앞에는 보통 염세주의자라는 말이 붙는다. 사람들은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사람들을 극도로 혐오했던 그의 태도가 원만하지 못한 가정 분위기와 어머니와의 잦은 불화에서 출발했으리라 추측하곤 한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 대해 처음부터 그다지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 뒷날 그에게 ‘너는 용서할 수 없는 귀찮은 녀석이며 함께 살기가 몹시 힘들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조차 했다.

현실주의자 아버지는 쇼펜하우어를 자신의 뒤를 이을 개방적이고 활달하며 세계시민적인 사업가로 키우려고 노력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아르투르(Arthur)라는 세례명을 지어 주었다. 유럽 어느 나라에서나 이 이름이 똑같이 아르투르라고 발음되기에 사업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또, 그는 어린 쇼펜하우어가 세계라는 큰 책을 배우도록 프랑스와 영국 등지로 보내 외국어를 익히고 고급문화를 직접 보고 느끼게 했다.

쇼펜하우어는 이 기회를 통해 각국의 언어와 귀족적 품성을 익혔을 뿐 아니라, 평생 동안 지속된 보통 사람을 혐오하는 태도도 갖추게 된 듯싶다.

1799년, 열한 살의 쇼펜하우어는 랑게 사립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장차 상인이 될 학생들을 교육하는 곳이었다.

쇼펜하우어는 상업보다는 인문학에 더 흥미를 느껴 김나지움에 가고 싶어했다. 아버지는 상인에게 인문학 공부는 필요 없다고 여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의 결심이 너무나 굳었기에, 결국 아버지는 김나지움 진학과 견문을 쌓기 위한 유럽 여행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다. 단, 장차 상인이 된다는 전제 아래서 말이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쇼펜하우어는 2년간의 유럽 여행을 선택했다.

그리고 뒷날 그가 회고하듯 ‘고전과 희랍어 · 라틴어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젊은 시절의 2년을 쓸모없이 보낸 뒤에’ 함부르크로 돌아와(당시 쇼펜하우어 일가는 독일 함부르크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 친구 가게에서 상인 일을 익히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충실하게 커 가고 있던 셈이다.

그러다 1805년, 아버지가 상점 창고에서 떨어져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죽음은 자살로 추정되었다. 당시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우울증과 점점 악화되는 귀머거리 증세로 고통 받았다.

또한, 부부 갈등으로 심각하게 괴로워했단다. 이 사건으로 쇼펜하우어와 어머니 사이도 결정적으로 틀어져 버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를 비판했다.

아버지가 고독하게 지내는 동안 어머니는 연회를 베풀었다. 또한 아버지가 극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동안 어머니는 즐겁게 지냈다. 그것이 여인들의 사랑이다.

어머니와의 잘못된 관계 때문인지 그는 여자를 경멸하여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여자란 불행의 근원이며 참된 감정이나 이해력을 가지지 못한 존재라고 보았다.

그의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멍청한 세상과 인간의 고통에 대해 끊임없이 한탄해 대는 아들 쇼펜하우어를 견디지 못했다.

어머니는 연회에 참석한 거물급 손님들과 진저리 나게 불쾌한 논쟁을 벌이는 아들 때문에 늘 조마조마했다.

그녀에게 아들은 ‘언짢은 밤과 악몽을 가져다주는 사람’일 뿐이었다. 마침내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어머니는 누이동생을 데리고 아예 아들이 살고 있는 함부르크를 떠났고, 쇼펜하우어는 2년 동안 더 그곳에 남아 아버지의 사업을 정리했다. 그러고 나서 바라던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신과 같은 플라톤, 경탄할 만한 칸트

1809년, 스물한 살의 젊은이 쇼펜하우어는 비로소 대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철학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원래 괴팅겐 대학 의학부에 들어가 의학 공부를 하던 중, 칸트 연구가인 슐체1)의 강의에 감동을 받아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된다.

그는 슐체를 통해 ‘신과 같은 플라톤과 경탄할 만한 칸트’의 사상을 알게 되었고, 플라톤과 칸트는 그 뒤 평생토록 그를 인도하는 두 별이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진짜 세계인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방일 뿐이며 진정한 지식은 이데아를 아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플라톤을 통해, 쇼펜하우어는 진정한 진리를 알려면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계를 넘어 세상의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리고 칸트에게서는, 우리의 지식과 삶에 대한 태도는 외부 세계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거나 결정되지 않으며, 주체인 인간 의식과 태도에 따라 달라짐을 알게 되었다.

쇼펜하우어 특유의 우울함이 예전에는 일종의 정신 질환 같았다면, 이제 두 철학자의 사상을 만나면서 염세주의 사상이라 할 만한 것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이 호기심 많은 젊은이는 괴팅겐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2년 뒤 그는 피히테와 슐라이어마허2)가 이름을 날리던, 사상의 중심지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갔다.

이미 자신의 철학 체계가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한 이 오만한 젊은이에게 그들의 사상은 그다지 감동을 주지 못했던 듯하다.

그는 피히테의 정열적인 애국 연설을 듣고 프랑스에 대항하는 조국 해방 전쟁3)에 참여할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전쟁을 피해 여러 곳을 떠돌다가 1813년 예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쇼펜하우어의 박사 학위 논문 <충족 이유율의 네 가지 근거에 관하여>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 논문을 주의 깊게 읽은 소수의 사람 중에는 대문호 괴테4)도 있다.

괴테는 쇼펜하우어와의 첫 만남을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학식이 깊고 업적이 많은 젊은 쇼펜하우어 박사의 방문은 나를 흥분시켰고 서로 배움에 도움이 되었다.’라고 회상했다.

이 대가는 여러 점에서 쇼펜하우어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젊은 염세주의자에게 다음과 같은 적절한 충고를 던져 주었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가치를 즐기고자 한다면, 그대가 먼저 세계가 가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최악의 상황

이 염세주의자는 그 뒤로도 세상을 밝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세상이 더 어둡고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인도 철학에 깊은 감동을 받아 이것을 자신의 염세주의 철학에 접목시키려 했다. 1818년, 수년간의 연구 끝에 그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을 내놓았다.

그는 이 책이 ‘세계라는 수수께끼의 진정한 해결책이며 전적으로 새롭고 독창적인 사상으로서 이후 수많은 책들의 원천이 될 것임’을 장담했다.

그러나 출판업자는 더 많은 인세를 요구하는 쇼펜하우어에게 ‘이 책은 안 팔려서 파지나 되지 않을까 두렵다’고 공격했다. 이 비판은 현실이 되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그 자체로는 매우 의미 있는 책이다. 당시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이 세계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구조로 되어 있으며, 학문은 이것을 드러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서 인간은 점점 더 행복해지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대로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는 결코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으며,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 움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 인간의 신체도 객관화된 의지일 뿐이다. 자연과 인간을 움직이는 의지는, 비록 겉으로 볼 때 그 차이점을 잘 알 수 없지만 원리적으로는 모두 같다. 의지란 곧 충동과 욕망을 뜻한다.

식물이 자라고 돌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아래로 떨어지고, 동물이 살기 위해 투쟁하는 것, 이 모든 것은 합리적인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따라 맹목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인간을 포함해 세상 모든 것들은 자신의 충동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 충동과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의지(욕망)는 인간과 세계의 본질이므로, 채우고 또 채워도 여전히 생겨난다. 인간은 그렇게 충족되지 않는 욕망 때문에 늘 고통을 받는다.

따라서 그는 삶은 맹목적인 의지일 뿐이고 세계는 근원적으로 악하며 인생살이는 결국 고통일 뿐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세상 만물 중에 오직 인간만은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간만이 자신의 의지에 무작정 따라가지 않고, 스스로 그것을 억제해야 한다고 결심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충동과 욕구를 거스르는 철저한 금욕 생활을 해야 한다. 그때에만 바다와 같이 고요한 영혼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과학과 산업의 발달로 더 많은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면 인간은 점점 더 행복해지리라 믿었던 과학 기술적 세계관에 대한 최초의 반성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무명의 신출내기 철학도의 주장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자신의 사상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던 쇼펜하우어는 서른두 살에 베를린 대학 강사로 채용된 뒤, 그 당시 시대정신이라 일컬어지던 헤겔과 정면 대결을 시도했다.

한낱 사강사의 신분으로, 큰 인기를 끌던 헤겔 교수가 강의하는 시간대에 자신의 강의 시간을 넣은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상이 필요하며 결국엔 자신이 이성의 철학자 헤겔을 누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비참하게도, 쇼펜하우어는 결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헤겔의 강의실은 여전히 북적거린 반면, 그의 강의실은 텅 비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한 명의 학생도 남아 있지 않아 스스로 강의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 실패를 자기 사상의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세계의 원동력을 이성으로 파악하는 헤겔의 사상은 ‘절대적으로 허풍스런 헛소리에 불과한 철학’이며 ‘정신병자의 수다이고 요술쟁이의 주문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또 이번 실패는 ‘자신의 등장으로 위기감을 느낀, 밤에 늑대로 변하는 것같이 사악한 교수들의 모함과 방해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는 이토록 심각하게 헤겔을 공격하며 고민에 빠져 있었지만, 헤겔은 정작 이런 그에게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점점 더 울적해져서 공포와 망상에 사로잡혔다. 이발사가 면도칼로 자신을 해칠지 모른다고 생각해 절대로 면도를 하지 못하게 했고, 잘 때도 권총을 옆에 두고 잤다는 등의 유명한 엽기적 행동들은 이 당시 일화들이다. 모든 것이 쇼펜하우어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기회가 된 헤겔의 죽음

1831년 함부르크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헤겔이 죽었다. 헤겔의 죽음은 쇼펜하우어에게 기회가 되었다. 그는 콜레라를 피해 프랑크푸르트로 갔다가 그곳에 정착했다.

이때부터 쇼펜하우어는 비로소 성공의 달콤함을 맛보게 된다. 헤겔이라는 이성 중심 사상의 큰 나무가 사라지면서, 그동안 여기에 가려 소외되어 왔던 사상들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그 대표적인 인물로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고 거의 광신적인 추종자들이 나타나기까지 했다.

그는 이러한 성공에 매우 만족했으며 자신의 명성을 보도한 기사를 자세히 읽고 되씹으며 즐거워했단다. 이 염세주의자는 말년에 와서 비로소 낙관주의자처럼 즐거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의 성공은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아닌, 사상 전체로 본다면 부록에 가까운 얇은 책 한 권에서 시작되었다.

책 제목도 《부록과 보유》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이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되어 있다.

이 책의 성공으로 사람들은 거꾸로 그의 대표작을 읽게 되었고 비로소 쇼펜하우어가 하나의 사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1860년 쇼펜하우어는 일흔두 살의 긴 삶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이렇게 장수했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죽음에 대한 지나친 공포와 망상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는 죽음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안전과 건강에 지나치리만큼 신경 썼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을 때까지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죽지 않은 상태로 매장되지 않을까 두려워한 그의 유언에 따라 장례식조차 죽은 지 며칠이 지난 다음에야 치러졌을 정도였다.

높은 기대치가 염세주의를 낳다

쇼펜하우어가 죽은 지 15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는 그토록 증오했던 헤겔보다는 한참 낮은 평가를 받는 철학자이다.

헤겔 같은 대철학자를 메이저리그의 간판 투수로 본다면, 쇼펜하우어는 마이너리그에서 갓 올라와 간판 투수를 상대로 기습 번트를 성공시킨 타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번트가 경기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정작 번트를 댄 본인은 실력보다는 끊임없이 일으키는 스캔들 때문에 더 유명한 그런 선수 말이다.

그의 염세주의는 앞으로도 주요한 철학 사조가 되기는 힘들 듯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가 함축하는 중요한 의미 하나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인간에 대한 극도의 혐오는 역설적으로 인간이면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높은 기대치에서 나온다는 점 말이다.

염세주의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비판 정신에 바탕을 두어야만 의미가 있다.

숱한 비난과 조롱에도 쇼펜하우어는 단순한 기인이 아닌, 현대 사상과 문명에서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철학자로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사상 내면에 깊이 깔린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 때문이다.

원전 속으로

가로막는 장애가 없는 한, 강물은 조용히 흘러가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나 동물도 의지라는 장애물이 없다면 삶을 의식하지 않고 생명을 느끼지 않은 채 그냥 흘러갈 것이다.

우리가 무엇에 주목하고 또 그것을 생각하는 까닭은 우리의 의지가 장애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중략)

건강할 때 우리는 몸에 대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구두가 작아 발을 죄면 그 아픔은 금방 느낀다.

또, 사업이 순조로울 때는 별 생각이 없지만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작은 일에도 신경이 쓰인다. 이처럼 편안함과 행복은 우리에게 소극적이지만 괴로움은 적극적이다. (중략)

이를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다면, 남을 잡아먹는 동물의 쾌감과 남에게 잡혀 먹히는 동물의 불쾌감을 견주어 보면 될 것이다.

- 《부록과 보유》 1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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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는 서양의 대표 철학자 40명의 생애를 살펴보며 사상의 흐름과 철학의 핵심 개념을 ...더보기

  • 지음
    안광복 철학박사, 교사

    철학박사, 현 중동고 철학교사.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철학자를 꿈꾸던 시절도 있었지만, 불안한 미래가 두려워 교사가 되었고 1996년부터 중동고 철학교사로 고등학생들에게 철학과 논리적 사고를 가르치고 있다. 학교에서 고민거리를 들고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철학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함께 고민을 나누고 응원을 보내고 있다. 저서로는 『철학, 역사를 만나다』,『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철학의 진리나무』,『소크라테스의 변명, 진리를 위해 죽다』,『청소년을 위한 철학자 이야기』가 있고, 연구물로는『플라톤 '소피스트'의 비존재 논의 고찰』,『교양과목으로서의 논리학 개선 방안 연구』,『논술형 평가의 실제』,『통합 교과적 독서 교육 방안 연구』『열일곱 살을 위한 인생론』등이 있다. 또한 청소년 철학과 비판적 사고에 관한 글을 여기저기에 쓰고 있다. 『철학, 역사를 만나다 : 세계사에서 포착한 철학의 명장면』은 2,000여 년에 걸친 철학의 주요 장면을 세계사와 함께 읽어나가는 기회가 된다. 현재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인 철학의 기능을 재발견하고 플라톤의 이상 국가와 춘추 전국 시대부터, 프랑스 혁명과 마르크스의 시대를 거쳐, 니체의 초인 사상과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에 이르기까지, 2천여 년에 걸친 철학의 주요 장면을 세계사와 함께 살펴보고 있다. 그림과 사진을 적절히 배치하여 역사적 배경을 보다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을 뿐 아니라 각 장의 말미에 별도의 코너를 배치하여 본문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철학자의 생애와 에피소드 등을 실어 두어 독자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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