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부유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모딜리아니, 그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선천적으로 쇠약한 몸을 가지고 세상에 나와 평생 동안 늑막염, 폐결핵, 폐렴 등 갖가지 병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를 진료했던 의사들은 그의 쇠약한 몸과 병 때문에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날 언제나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그를 좋은 병원에서 진료받게 해 병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하지만 모딜리아니가 10대가 되었을 때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집안은 가난해지기 시작했고, 그의 병도 다시금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사업 실패 이후 뇌졸중으로 아버지까지 돌아가시면서 그는 부모님의 손을 떠나 외할아버지에게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모딜리아니의 외할아버지는 평소 예술에 흥미를 가졌던 모딜리아니가 그림을 계속해서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병마를 이겨내며 계속해서 미술을 배워갔고 20대에는 베네치아 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해 나갔습니다. 모딜리아니가 그의 연인 잔 에뷔테른을 만난 건 30대가 넘어서의 일입니다.
화가로서 활동하던 모딜리아니가 미술을 공부하는 뛰어난 학생이었던 잔 에뷔테른을 만난 건 파리의 한 카페에서였습니다. 수려한 외모의 모딜리아니를 본 잔 에뷔테른은 그에게 첫눈에 반해 그의 주변을 늘 서성였습니다. 얼마 후 둘은 한 조각가의 소개를 통해 정식적으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고 모딜리아니 또한 잔의 눈빛에 반해 둘은 애틋한 연인 사이가 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했지만 모딜리아니의 건강은 언제나 둘을 방해했습니다. 모딜리아니의 병세가 악화되어가자 둘은 니스 지방의 해변가로 요양을 떠났고, 그곳에서 둘만의 시간을 가지며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둘의 사랑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곧 아이가 생겨났지만 그들의 생활고와 모딜리아니의 병세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잔의 부모는 가난에 힘들어하는 딸을 걱정해 두 사람의 사이를 때어 놓으려고 노력했고 잔을 친정으로 데려갔습니다.
잔까지 떠나 버린 모딜리아니는 삶을 포기라도 한 듯 술과 마약으로 방탕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런 불안한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뛰어난 초상 화가였음에도 스스로를 모델로 그리진 않았던 그가 자신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두껍고 붉은 코트를 입고 푸른 목도리로 몸을 싸맨 그는 오른손에 팔레트를 들고 거울 속 자신 스스로를 응시하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그리며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모딜리아니가 죽음에 가까워져 가자 그의 지인들은 그를 급하게 자선병에 입원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하지만 1920년 1월 24일, 모딜리아니는 결핵성 뇌막염으로 35세 나이로 침대 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모딜리아니의 소식을 듣고 정신없이 뛰어온 잔은 차갑게 식어버린 그의 모습을 보고 넋 나간 듯이 서있었습니다. 그리곤 그를 으스러질 듯이 껴안고 짐승같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고통스러운 울음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울음을 멈춘 잔은 모딜리아니에게 마지막 입맞춤을 하고 나서야 그의 곁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잔은 결국 모딜리아니와 죽음마저 함께하기로 결심하고 그가 죽은 지 2일 후인 1월 26일 4층 창문으로 뛰어내려 21세 나이로 자살하고 맙니다. 슬픔 속에 자살을 선택한 잔은 이미 8개월 된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잔은 모딜리아니의 죽음 소식을 듣기 전 남긴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 속에의 잔은 가슴에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난다면 그와 영원히 함께 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비극적인 결말을 맺은 둘의 사랑이 세상에 전해졌고,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재평가 받게 되면서 그의 그림 값은 1000배 가까이 올라 더욱 둘의 죽음을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