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통일한 고려왕조의 창업주

왕건

王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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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877 ~ 943

936년 9월, 황산군(지금의 충청남도 연산)의 마성(馬城). 이곳에서 후백제의 신검(神劍, ?~936)이 고려의 왕건(王建, 877~943, 재위: 918~943)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삼한은 다시 통일되었다. 900년에 견훤이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세워 ‘후삼국 시대’를 연 지 36년 만, 676년에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당나라를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지 260년 만이었다.

그것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 땅 일부를 정복한 형태의 ‘통일’보다 훨씬 완전한 통일이었고, 외세의 힘과도 무관한 통일이었다. 그리고 이로써 다시 하나로 뭉친 한반도는 20세기가 될 때까지 다시는 갈라지지 않았다. 고려 태조 왕건은 어떻게 그토록 보기 드문 왕업(王業)을 세울 수 있었을까.

1 분열과 혼란의 시대에 싹튼 희망

개성 고려박물관에 있는 왕건의 초상.
<출처 : kallgan at ko.wikipedia.com>

왕건은 877년에 한주 송악군에서 사찬(沙湌) 융(隆)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서해 용왕의 딸과 혼인하여 왕건을 낳았기 때문에, 대대로 왕씨 일족의 겨드랑이에는 용의 비늘이 돋아났다는 전설이 있다.

당나라의 황제(숙종)가 왕자 시절 한반도를 유람하다가 얻은 사생아가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라는 전설도 있으나, 왕가의 핏줄을 미화하기 위해 생겨난 전설로 여겨진다.

[고려사]에도 실려 있는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융이 송악의 남쪽에 집을 짓자 당대 도참(圖讖)의 제일인자였던 도선(道詵)이 지나가다가 “이곳에서 성인이 나시리라”라고 외치고는, 융에게 “내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귀띔했다.

도선은 왕건이 17세 되던 해에 다시 찾아와 “너는 장차 왕이 될 운명이다”라고 알리고, 병법과 각종 술법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왕건이 태어났을 때의 신라는 이른바 ‘하대(下代)’에 접어들어 있었다. 통일기의 융성했던 활력과 리더십이 사라진 가운데 중앙은 진골 귀족들끼리 ‘족당(族黨)’을 맺어 왕위를 놓고 아귀다툼을 벌였으며, 지방은 호족들이 중앙에 바칠 세금을 빼돌리고 자체 무장을 하면서 중앙으로부터 독립해나가는 추세가 갈수록 심해져갔다.

이런 추세를 더욱 급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은 장보고(張保皐, ?~846)의 반란과 죽음이었다. 해로를 장악해서 세력을 쌓은 여러 호족을 하나로 통합해 해상제국을 세웠던 장보고가 사망하고 나자, 그의 아래에 있던 호족들이 저마다 독자 행동에 나서면서 지방의 이탈이 더욱 심해졌던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왕건의 가문이었다.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왕건의 가문은 송악 일대를 장악했을 뿐 아니라, 예성강 일대에서 강화도까지 이르는 지역에 튼튼한 세력 기반을 구축했다.

이런 강력한 해군력과 재력을 갖춘 왕건 가문과 임진강 일대를 중심으로 새롭게 세력을 떨치던 궁예(弓裔, ?~918)가 896년에 손을 잡음으로써, 후고구려(고려)는 후삼국 중 가장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었다. 궁예는 융을 금성 태수로 삼고 송악에 도읍한 다음, 갓 스물이던 왕건에게는 송악산 기슭의 발어참성 성주의 직위를 주었다.

2 왕건과 궁예, 두 영웅의 엇갈린 갈림길

왕건은 궁예의 장군이 되어 많은 공로를 세웠으며, 특히 가문이 키워온 수군을 이끌고 한강 유역과 서해안, 멀리 지금의 경상남도까지 공략하여 기세를 떨쳤다.

[고려사]에는 성인이 된 그의 용모를 가리켜 “눈이 부리부리하고, 이마는 넓고 툭 튀어나왔으며, 턱이 살쪘다. 목소리가 우렁찼다.”라고 표현했는데, 당시로써는 임금에게 어울리는 관상을 모두 열거하다시피 한 것이므로 이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아무튼 단지 “부잣집 도련님”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과 지도력이 있었던 듯하다.

913년(?)에는 덕진포에서 견훤(甄萱, 867~936)의 수군과 일대 대결을 펼쳤는데, 왕건은 화공을 써서 후백제 수군을 격파하고, 견훤이 간신히 목숨만 구해 도망치게 했다고 한다. 계속해서 반남현을 공격해 물싸움에 능숙하다고 ‘수달’이라는 별명이 붙은 견훤의 애장, 능창을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다. 이렇게 궁예는 왕건의 활약에 힘입어 견훤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했다.

여름 6월에 궁예(弓裔) 휘하의 사람들이 마음이 홀연히 변해 태조(太祖: 왕건)를 추대하였다. 태조 왕건의 즉위를 설명한 [삼국사기] 옥선서원본.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IKH.DB-sg_012r_0040_0040)

그러나 중앙의 분위기가 심상찮게 바뀌고 있었다. 궁예는 본래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지은 국명을 904년에 마진(摩震)으로, 911년에는 태봉(泰封)으로 고쳤으며 수도도 개경(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겼다.

이는 나라가 넓어지고 왕건 등의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궁예가 권력을 확실하게 장악하려고 추진한 변화였다. 수도를 옮겨 왕건의 본거지에서 빠져나왔을 뿐 아니라, 자신을 말세에 나타나 개벽을 이룩한다는 미륵의 화신이라 일컫고, 국호도 불교적 의미가 짙은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궁예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접고 스스로를 신라 왕실의 후예라 하면서, 금성(경주)을 “멸도(滅都)”라고 부르며 자신이야말로 타락한 신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창시할 구세주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힘이 커진 호족과 장수들을 반역죄로 처형했다.

왕건도 여기에 말려들어 하마터면 죽을 뻔하였으나, “내 관심법(觀心法)으로 보니 네가 반역을 꾀했다”라는 궁예의 힐문에 오히려 “그렇습니다. 제가 감히 역모를 꾸몄습니다. 죽여주십시오.” 하자 궁예가 정직해서 용서한다며 벌은커녕 상을 내렸다고 한다.

가까스로 모면했지만 언제 궁예의 손에 숙청될 지 모르는 일, 게다가 고려를 세운 절반의 지분이 있다고 여기는 상황에서 궁예가 독재의 길을 치달으니, 그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밖에 없었다. 왕건은 홍유ㆍ배현경ㆍ신숭겸ㆍ복지겸ㆍ박술희 등과 모의하여 918년에 궁예를 내쫓고 스스로 고려의 주인이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왕건은 쿠데타에 반대하며 궁예에게 충성하려 했으나, 홍유 등이 간곡하게 부추기고,부인 유씨가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포악한 임금을 없애는 일은 예부터의 일이다”라며 손수 갑옷을 가져와 남편에게 입혀 마지못해 거사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아마도 이는 왕건을 미화하려고 나중에 만들어진 말일 것이고, 실제로 왕건은 거사에 앞서 수도에 “왕건이 왕이 된다”라는 참언까지 퍼뜨리며 적극적으로 쿠데타를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궁예가 쫓겨나 죽은 다음 이흔암ㆍ환선길ㆍ진선 등의 반란이 꼬리를 물었고, 옛 백제 지역으로 고려에 복속해오던 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한꺼번에 후백제에 투항한 점을 보면 “궁예가 포악해서 널리 민심을 잃었고, 왕건이 대신 왕이 되자 온 나라가 한마음으로 환호했다”는 기록은 현실과 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로써 4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왕건은 한동안 흐트러진 기강과 민심을 바로잡고, 북방의 위협(당시 발해가 쇠퇴하며 거란이 새로운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에 대비하느라 통일전쟁에서는 한발 물러서 있게 되었다. 그 사이에 견훤의 후백제가 기세를 올렸다.

3 마침내 통일의 새 아침은 찾아오고

하지만 왕건은 한반도 통일의 대업에 한시도 관심을 잃지 않았다. 새로 왕이 된 그는 후백제, 신라와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지 선택해야 했다. 궁예는 말년에 견훤과 친하고 신라를 압박하는 정책을 취했다.

견훤은 왕건도 이를 계승하기를 바랐고, 그가 즉위하자마자 사신을 보내 즉위를 축하하며 진귀한 선물을 주었다. 반면 신라는 2년 뒤에야 겨우 사신을 보낼 만큼 고려와 왕건을 불신했다.

그러나 왕건의 선택은 신라였다.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져서 군사적으로는 아무 힘도 되지 못하던 신라를 껴안고, 강국 후백제에 등을 지는 선택은 짧게 보면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실제로 927년의 팔공산 전투에서는 왕건이 직접 신라를 도우려 나섰다가 견훤에게 대패하고 간신히 목숨만 구해 달아나기도 했다.

그러나 왕건은 보다 장기적인 전망을 했다. 비록 부패와 분열로 힘을 못쓰고 있지만, 그래도 신라에는 많은 인구와 강력한 호족들, 그리고 천년 왕실의 전통과 문화가 있었다. 장차 통일 한반도를 다스리려면 신라 호족들의 지지와 신라 왕실의 후광을 얻을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왕건은 신라를 위해 후백제와 싸웠을 뿐 아니라 동해안을 통해 침공하는 북방 민족을 쫓아내주는 등 백방으로 신라를 도왔다.

그리고 기록에는 다소 모호하게 적혀 있으나, 928년에 견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신라를 돕는 명분은 중국 춘추시대에 제환공이나 진문공이 주나라 왕실을 도운 대의와 같다”고 밝힌 점을 보면 적어도 한동안은 신라의 왕을 주군으로 받들기까지 했던 것 같다.

이처럼 물심양면으로 약해진 조국을 도와주니, 백제의 복수를 한답시고 쳐들어와 왕을 죽이고 왕비를 범하며 역대 왕들의 능묘를 약탈했던 견훤에 비해 왕건이 신라인들에게 어떻게 비쳤을지는 뻔히 짐작할 수 있다.

군사적 재능에 비해 정치적 식견이 모자랐던 견훤은 “적 중에서 약한 쪽을 먼저 쓰러트린다”는 병법에 따라 신라를 치고, 자기가 뽑은 사람으로 신라 왕을 삼고는 일부러 포악한 행위를 벌였다. “이렇게 하면 공포에 사로잡혀 감히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는 계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수법은 공포에 싸인 쪽에서 대안이 없을 때나 유효한 법. 천년 왕국 신라의 자존심은 견훤의 폭풍이 아니라 왕건의 햇빛 앞에서 저고리 고름을 풀었다.

930년에 고려군이 고창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이기고 마침내 힘에서도 우위를 보이자, 신라의 경순왕(敬順王, ?~978)은 왕건에게 항복을 결심한다. 후백제는 고창 전투 이후 점점 위세가 기울더니, 935년에 견훤의 아들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금산사에 유폐하고 왕위에 오르는 사변이 생긴다.

가까스로 탈출한 견훤은 고려에 망명해 자신이 세운 후백제 타도에 앞장섰고, 같은 해에 마침내 신라가 정식으로 고려에 흡수되었다.

왕건은 오랜 라이벌 견훤을 상보(尙父/尙甫: 왕이 아버지와 같을 정도로 극히 존경하는 신하)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접하고, 경순왕도 경주의 사심관으로서 계속 경주를 다스리게 하고는 그의 조카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여 장인 대접을 하는 등 화해와 통합에 주력했다.

또한 이에 앞서 926년에 발해가 멸망하자, 그 유민들을 받아들여 최고의 대우를 했다. 실로 삼국시대 이래 한민족의 여러 갈래가 고려라는 큰 틀 안으로 융합하게 된 것이다. 그 대업의 종지부는 936년에 왕건과 견훤이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신검을 공격, 마침내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찍혔다.

4 초기 왕권의 안정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펴다

가야산 해인사를 창건하였다.(802년 8월)[삼국사기]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IKH.DB-sg_010r_0040_0190)

왕건은 전란에 지친 백성을 다독이고 쉬게 하는 정치를 펼쳤다. 고구려의 진대법을 본떠 흑창(黑倉)을 설치해 빈민을 구제했으며, 조세를 크게 낮췄다.

그리고 궁궐이나 의복 등을 검소하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의 모범을 보였다. 이는 수나라 문제나 송나라 태조처럼 오랜 전란 끝에 천하를 통일한 군주들이 보통 행하던 일이었다.

그러나 왕건은 수문제나 송태조가 전혀 하지 않았던 일도 했는데, 바로 숱한 정략결혼이었다. 그는 29명이나 되는 부인을 맞이하여 34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것은 왕건은 세력 기반이 비교적 미약했고, 고려라는 나라 자체가 ‘호족 대연합’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이었다.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신라의 구 왕실도 포함하는)들과 혼인으로 동맹을 맺고, “지금은 당신이 일개 지방의 지배자일 뿐이지만, 만약 당신의 딸이 낳은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 천하의 2인자로 올라선다”라는 미끼를 주어 그들의 충성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이는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궁예나 견훤처럼 허무하게 나라를 잃지 않을 수 있었으나, 나중에 필연적으로 왕위 다툼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과연 왕건이 죽은 후에는 왕위를 노린 갈등이 한동안 그치지 않았고, 유력한 호족들이 왕권을 넘보는 일도 벌어졌다.

왕건은 왕권 강화를 위해 종교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궁예를 본받아 파괴된 절을 개축하고 새로 많은 절을 지었으며, 연등회와 팔관회를 국가적 행사로 치르게 해서 ‘불교를 수호하는 왕실’의 이미지를 심었다.

또한 도참설도 활용했는데, 자신의 탄생과 즉위가 ‘정해진 운수였다’라는 설화를 퍼뜨린 외에도 이른바 ‘훈요 10조’에서 “지금 세워진 절들은 도선국사가 풍수지리에 맞춰 정해 놓은 것이므로, 후대에 함부로 더 세우거나 줄이지 마라”라고 지시한 점도 그 예다.

신라 중기부터는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이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고 절을 세우는 일이 많았다. 그것은 곧 중앙 권위의 약화를 의미했으므로, 왕건은 도참설을 빌미로 지방 세력들이 마음대로 절을 세우는 일을 억제했던 것이다.

5 ‘훈요 10조’의 8조는 조작되었거나, 곡해되었을 수 있어

왕건의 정책 중에서 실책으로 여겨지는 일도 없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훈요 10조’의 제8조에서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바깥은 배역(背逆)할 지세이니 이곳 사람을 기용하지 마라”라고 한 점이다. 차현을 차령산맥으로, 공주강을 금강으로 본다면 오늘날 전라도의 거의 전 지역이 소위 배역의 땅에 포함된다.

이는 오늘날까지 문제가 많은 지역감정의 원조격이 아닌가?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생을 한반도의 화해와 통합에 힘쓴 왕건이 이런 유훈을 남겼다고? 그래서 ‘훈요 10조’는, 적어도 이 8조는 왕건이 쓴 것이 아니고 조작되었다는 설도 나왔다.

실제로 왕건의 신하 중에도 전라도 출신이 적지 않았고(‘훈요 10조’를 태조에게 전해받았다는 박술희 역시 전라도 출신이었다), 이후에도 고려 왕조에서 전라도 출신이 차별받은 흔적이 별로 없음을 볼 때 ‘조작설’에 무게가 실린다.

그러나 이는 조작이라기보다 잘못된 해석에 따른 오해일 뿐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차현’은 차령산맥이 아니라 충청남도에 있었던 고개 이름이고, 공주강은 금강이 아니라 공주 어귀를 흐르는 강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왕건이 특정 지역을 차별하도록 유언을 남긴 것은 사실이나, 그 대상은 전라도가 아니라 충청남도의 공주를 중심으로 하는 비교적 좁은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이 지역 일대의 호족들이 왕건 즉위 후 반발하여 후백제에 투항했을 뿐 아니라 이흔암ㆍ환선길ㆍ진선 등도 모두 이 지역과 그 주변 출신의 인물들로 반역을 꾀했으므로, 왕건으로서는 “반역의 고장”으로 볼 만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후 한동안 이 지역 인물들은 높은 벼슬을 할 수 없었다. 좁은 지역일망정 포용하기보다 배격하는 유훈을 남긴 점은 그리 칭찬할 수 없지만, 겨우 이룩한 왕업이 혹시라도 반역으로 물거품이 될까 노심초사했던 늙은 왕이 후손들에게 남긴 노파심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으리라.

6 왕건의 외교적 실책, 만부교 사건

또 한 가지 ‘실책’은 942년의 ‘만부교 사건’이다.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며 낙타 50마리를 선물로 가져왔는데,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라 하여 사신들을 가두고, 낙타들은 만부교 밑에 매어두어 굶어 죽게 만들고 말았다.

평생 온화한 정책을 펼쳤던 그가 왜 신중해야 마땅할 국제 관계에서 이토록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이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인, 14세기에 제26대 왕 충선왕이 “태조께서 대체 왜 그러셨을까?”하고 당대의 석학 이제현에게 묻자 “태조의 신묘하심은 제가 감히 꿰뚫어볼 수 없습니다. 본래 먼 나라의 진귀한 동식물을 애호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라서, 낙타들을 버리신 것일 수도 있겠지만…….”이라고 대답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그래도 외국의 선물인데 돌려주면 그만일 것을 그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처치했어야 할 지는 의문이다. 당시 고려가 북진 정책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거란과는 우호적 관계로 나갈 수 없었다는 분석도 있으나,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굳이 모욕을 주며 물의를 빚을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7 이 땅에 오고간 수많은 지도자들 중, 그를 능가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왕건은 943년 5월에 병에 걸렸고, 67세의 왕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주변의 신하들에게 “나는 죽는 일을 집에 돌아가는 일처럼 여기고 있다. 슬퍼할 것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 신하들이 울음을 참지 못하자, 잠시 정신이 든 왕건은 “생명이 덧없음을 모르느냐?”라고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잠시 뒤 숨이 끊겼다고 한다.

왕건과 신혜왕후를 모신 현릉. 개성에 있다.
<출처 : kallgan at ko.wikipedia.com>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착한 일 하기를 좋아했다. 자기 생각을 미루고 남의 생각을 존중하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예의를 지켰다. 모두 천성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민간에서 자라 어렵고 험한 일을 두루 겪었기에 사람들의 참모습과 거짓 모습을 모두 알아보았고, 일의 성패도 내다보았다. …… 재주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았고, 아랫사람이 가진 힘을 모두 쏟을 수 있게 도왔으며, 어진 사람을 취할 때와 간사한 사람을 쫓을 때에 주저함이 없었다.”

왕건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약 40년 뒤, 최승로(崔承老, 927~989)가 성종에게 ‘시무 28조’를 올리며 그 서두에 태조부터 경종에 이르는 다섯 임금의 평가를 적었는데, 거기서 왕건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태조 왕건, 그는 모두가 자신만을 내세우는 세상에서 남을 돌아볼 줄 알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싸움 속에서 평화와 타협의 비전을 보았다. 물론 그에게도 결점은 있고, 실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땅에 오고간 수많은 지도자 중, 그를 능가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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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일2010. 0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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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규진 서울교육대학교 교수,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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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선환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s://blog.naver.com/fartzz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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