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슈퍼카 중에서 (다른 글들의 인덱스는 여기로 http://blog.naver.com/mockory/107135786)
제 3의 남자 - 이소 그리포 (Iso Grifo)
- 글 福野礼一郎
16~17년 전의 일이다. 아는 사람 중에 이소 그리포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몇번을 웃었던지 모르겠다.
그것은 첫해 등록이 74년인가 75년인 지저분한 자청색 AT차로, 어딘가의 자동차에 미친 부자가 잠시 마음이 혹해서 나고얀가 교토던가 에서 손에 넣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팽개친 물건이었다.
그 지인은 그 차를 '350만엔' 에 손에 넣은 후, 하필 그것을 재고 목록의 맨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혹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한 이면에는 무언가 매니아로서의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쨋든 프로 브로커가 할 짓은 아니었다. 도대체 한창 불황이 극심한 상황인데도 '대식가 아메리칸 V8을 가진 들어본 일도 없는 이탈리아차'에게 누가 과연 1만엔 돈다발을 꺼내들려고 한단말인가?
잔뜩 흥분해서 '700만엔' 이라고 걸어두었던 가격표는 금방 '400만엔'대로 내려가버렸고, 바디에 쌓인 먼지 때문에 페인트색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즈음에 와서는 그냥 농담거리가 되어버렸다.
"여보세요"
"예, 안녕하세요"
"좋은 자동차가 한대 있는데 사지 않겠어요?"
"그리포 이외라면 뭐든 사지요"
우리들은 이 조크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일주일에 한번은 듣지 않으면 컨디션이 나빠질 정도였다. 우리들은 그 그리포 덕에 웃으며 불황이 이어지던 하루하루를 위로하며 지나갔었다.
이소의 이름은 그리포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세타를 만들어낸 메이커로 이름이 높다. 1953년에 독일이 개발한 이 초소형 4륜 리어엔진카는 50년대의 유럽에서 마치 비가 멈출 때 나타나는 개구리처럼 어디선가 등장한 카비넨롤러 (캐빈 스쿠터) 들 중에서 메사슈미트와 함께 가장 성공을 거둔 자동차였다.
원래 이소의 이세타는 55년까지 겨우 3년간 만들어진 것 뿐, 오히려 그 라이센스를 얻어 63년까지 장기간동안 생산한 BMW판 (독일만이 아니고 영국 BMW사에서도 57~64년간 생산) 쪽이 오늘날에는 '원조'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세타를 설계한 것은 항공기나 모터보트, 요트의 설계경험을 가졌으며 자기 자신이 파일럿이기도 한 에르메네지르도 프레티 (Ermenegildo Preti)라는 뛰어난 설계자였지만, 이소사의 보스인 렌조 리볼타(Renzo Rivolta)에게는 '엔진이 등뒤에 있어서 실내소음이 끔찍하게 큰' 것이 불만의 씨앗이 되었고, 그것이 생산을 빨리 종료해버리게 되어버린 중요한 이유였다고 한다.
그럼 그 남자, 이세타에게 생명을 주곤 죽여버린 후, 이소의 이름을 슈퍼 스포츠의 한쪽 편에 남게 만든 아무도 모르는 사나이, 렌조 리볼타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1908년 이탈리아 모데나 시 교외의 데지오라는 어떤 거리에서 8형제 중 5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재가공업을 하던 지방의 이름난 명공(名工) 이었다,.
렌조는 두명의 형들과 함께 공장을 이어받아 28세일때 토리노의 부호의 딸 마리온 바베리와 결혼했다. 마리온의 아버지는 토리노에서 중공작기계의 제조회사를 경영하고 있어서 그 영향으로 렌조도 기계제조업의 경영에 강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제노아의 어떤 작은 냉장고를 만들고 판매하는 회사에 주목했다. 제 1차 세계대전 후 불황으로 이탈리아 공업계는 큰 타격을 받았지만 '어떤 불황이라도 먹을 것을 거를 리가 없지않은가?' 라면서 '냉장고 만은 팔리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41년에 렌조는 종업원 50명정도였던 이 회사, '이소데모스 (Isothermos)'를 사들여 사장의 자리에 앉았다. 이것이 이후 이소의 직접적인 모체가 된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 남은 렌조와 이소사는 전쟁이 끝난 후 곧 스쿠터 생산사업으로 업종전환을 꾀했다. 때아닌 스쿠터의 큰 붐에 영합한 결단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소의 스쿠터는 매력적 디자인 덕에 성공을 거두고 업계에서 메이저로 거론될 정도까지 급성장을 이루었다. 이세타의 개발을 에르메네지르도 프레티에게 의뢰한 것은 이 후의 일이다.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렌조 리볼타는 의욕과 향상심을 가진 사나이였다. 머리가 명석하고 시기를 기민하게 파악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혼란기에 중고 트렉터의 판매로부터 시작해 볼로냐에서 일어선 페르치오 람보르기니와 너무나 같은 경우였다.
그리고 60년대 초두에 두 사람은 우연하게도 동시에 슈퍼카 비즈니스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사실 널리 알려진 람보르기니에 관한 '전설' 에는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이소' 버전이 존재한다. 모노의 책(モノの本)에 의하면 렌조 리볼타도 마찬가지로 일개 야인에서 부터 성공을 거두곤 페라리를 사서 품질에 분노하고, 엔초 페라리에게 면회를 요구하곤 거절을 당해서 결국에는 자신이 슈퍼카 만들기에 나선 사나이, 로 되어있다.
렌조 리볼타가 그 때 몇대의 페라리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 때 이탈리아에 우후죽순처럼 출현한 '자수성가 부호'들 사이에서는 페라리를 사는 것이 일종의 '유행' 이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에 걸쳐 페라리의 시판차 비즈니스는 이상할 정도의 성장을 거두어, 판매실적은 5년 동안 540%나 성장했다. (56년에 81대에서 61년에는 441대) 전쟁 이후의 혼란을 틈타 기업을 급성장시켰을 정도의 민완 경영자라면 사들인 자동차에 불만을 토로하려고 제조처따위에 아무생각 없이 가기 전에, 비즈니스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생각에 잠겼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소 S.p.a.의 치프 엔지니어였던 피에르루이지 라치 (Pierluigi Raggi) 라는 기술자는 59년이 끝나갈 무렵 렌조 리볼타 본인에게서 초고급 GT의 생산에 관한 아이디어를 듣게 되었다.
렌조의 안테나에 걸린 것은 한사람의 인물과 한대의 자동차에 였다.
죠토 비잘리니 (Giotto Bizzarrini).
61년이 저물 무렵 페라리 내부에서 일어났던 그 유명한 '반란' 에 연루되어 회사를 떠나게 된 설계자였다. ......그보다도 저 250GTO를 '도면도 그리지 않고 2주만에 만들어냈다' 라고 호언한 사나이, 라고 말하는 쪽이 이해하시기 쉬울지도 모른다. 독립하여 설계사무소 (Prototipi Bizzarrini SrL) 를 연 이 이름난 설계자에게 렌조는 곧바로 고문계약을 의뢰한다.
너무나 기묘하게도 거의 같은 때에 비잘리니는 람보르기니사와도 계약을 주고받아, 초대 치프 엔지니어로서 람보르기니 350GTV의 설계를 개시하고 있었다. 이 때 3자간에 계약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비잘리니의 페라리 퇴직의 시기 ('반란'이 일어난 시기) 와 이소/람보르기니 양자와의 고문계약채결의 타이밍 (양자의 슈퍼 카 비즈니스로의 참가 결단 시기) 가 거의 오버랩 되어 있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그 때 렌조의 촉각에 걸려 들어온 것은 개발중이었던 고든 기블 GT라는 영국제 프로토타입 스포츠카였다. 스페이스 프레임 샤시의 프론트에 콜벳용인 시보레 V8 엔진을 탑재한 전형적인 유로 & 아메리칸 하이브리드카로, 디자인과 코치워크는 토리노의 베르토네가 맡고 있었다. 렌조는 자사가 만들어야 할 슈퍼카의 참고용으로 한대의 고든 프로토타입 구매를 타진하고 (정말로 이례적으로) 쾌히 승락을 받았다.
이소의 치프 엔지니어인 피에르루이지 라치에 의하면 고든 기블차에 가장 감명을 받은 것은 오히려 컨설턴트인 비잘리니였다고 한다. 그는 거기에 탑재되어 있던 시보레 327CID (5358.6cc) 엔진의 포텐셜을 높이 평가하고, 이소 프로젝트에 그것을 쓰도록 강하게 추천했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비잘리니는 람보르기니를 위해 3.5리터의 올 알루미늄제 60도 V12 엔진을 설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또한 언뜻 보기에 이해가 가지 않는 어드바이스였지만, 아마도 비잘리니는 미국제 '소형' V8 엔진의 길이가 짧은 패키지, 저중심성 (OHV는 DOHC보다 오히려 저중심이다) 이 샤시 레이아웃의 자유도를 대폭으로 넓혀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후에 그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레이싱 스포츠카를 설계하던 때에도 아메리칸 V8의 채용에 집착했다는 것은 그것을 어느정도 뒷받침해준다.
람보르기니의 치프 테스트 드라이버였던 윌리엄 월레스도 "당시의 이탈리아 숙련공의 자금은 매우 저렴하여, 엔진 부품을 다른 메이커에서 만들도록 하거나 미국제 엔진을 굳이 수입하는 것 보다 오히려 자사 내에서 만들어버리는 쪽이 더 싸게 먹힐 정도였다" 라고 술회하고 있으므로, '저렴하고 손쉽기에 아메리칸 V8을 썼다' 라는 상투적인 이야기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렌조의 이름을 건 제 1호차, 이소 리볼타는 이렇게 하여 비잘리니의 어드바이스를 기초로 피에르루이지 라치의 설계를 통해 완성되었다.
휠 베이스 2700mm의 덩치 큰 2도어 쿠페로, 시보레 327CID엔진은 앞차축 중심에 앞쪽 끝 기통열을 걸치듯 한 위치 (흔히 말하는 '프론트 미드쉽') 에 탑재하고, 보그워너 T10 4단 트랜스미션을 통해 후륜을 구동하는 FR방식이다.
비잘리니는 설계를 함에 있어서 튜블러 래더프레임 구조를 채용할 것을 시사했으니 이 점에 대해서는 렌조가 간섭하여 생산성 향상을 이유로 라치가 설계한 강판용접구조의 플랫폼 샤시를 채용했다. 평평한 플로어팬을 폐단면의 사이드실, 센터 터너르, 프론트 벌크헤드로 지지하는 흔한 구조로, 대부분의 파츠는 단순한 프레스 성형에 의해 만들어졌다.
62년 6월 27일에 Bresso의 있던 이소 S.P.A.에서 발매된 리볼타는 연간 2,000대를 목표로 생산을 개시했다.
리볼타는 그러나 '슈퍼카' 와 비슷한 자동차였다곤 하더라도 결코 스포츠카는 아니었다. 비잘리니는 당초부터 강하게 2좌석 스포츠카의 개발을 추천해왔었지만 렌조 리볼타는 순수한 스포츠카의 비즈니스에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물며 레이싱카를 설계, 레이스에 참전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렌조의 부친이며 이소사의 숨겨진 자문역이었던 피에로는 스포츠카 비즈니스의 가능성에 영감을 가지고 있어서, 결국은 아버지가 회유역을 맡아 스포츠카 프로젝트는 사내에서 공공연히 이야기되기에 이르렀다.
비잘리니와 라치의 브레인스토밍이 시작되었다. 비잘리니는 당연한 듯이 '2시터 미드쉽 레이아웃' 을 주장했지만, 피에르루이지 라치는 절대 사장이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참 엔지니어인 라치는 렌조 리볼타 사장이 쾌적성을 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베스트셀러 차인 이세타의 생산을 그만둬 버렸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동차 역시 리어엔진이었다.
라치는 대안으로 리볼타의 샤시를 25~3cm 단축하여 2시터 FR 스포츠카로 한다는 극히 평범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이 때 비잘리니의 반대의견을 라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정도 차체가 더 짧은 GT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GT에 지나지 않는다" 라구요."
리볼타의 기본을 이용한다는 전제에 대해서도 비잘리니는 '파워트레인의 위치를 앞차축 후방으로 더 낮추고', '중심을 낮추며', '중량이 나가는 물체를 차체 중앙 가까이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배치'하는 것에 집착하고 얽메어서, 그것을 나중에 단축 샤시 판에서 해보자고 하던 라치와 격론을 일으켰다고 한다.
둘은 결국 각각의 제도기를 향해 머리를 돌려버리고 이소의 스포츠카 설계는 두동강으로 분리되어 버렸다.
이소 그리포 GL350
가장 처음의 초기형 그리포 GL350. 스타일링은 죠르죠 쥬지아로가 베르토네에 있던 당시에 손을 댄 것으로, 그 때 그의 작품에서의 전형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깊은 곡면을 가진 프론트 / 리어 윈도우를 로드카에 채용하는 것은 당시 (63년) 생산이술로 본다면 단단히 마음을 먹고 도전한 것이다. 포르쉐가 911 타르가를 발매한 것은 이 후 4년 뒤였다.
이소 그리포 A3C
1963년 토리노 쇼의 베르토네 스탠드에 장식되어 있던 이소 A3그리포. 죠토 비잘리니의 '대항책' 이다. 이후 본인의 손에 의해 '비잘리니 GT 스트라달레' 라는 이름으로 소수 시판되었다. 그리포에 비해 낮은 차고, 짧은 휠베이스를 주목할 것. 패키징은 동시기의 FR차로서는 가장 앞서있으며 현대에도 충분히 통용될만한 것이었다. 이것이 본래 '그리포'가 되었어야 할 자동차였을 것이다.
라치의 설계는 2450mm의 휠베이스 속에 충분한 풋 룸과 헤드룸을 갖는 콥피트를 레이아웃한 것으로, 이것을 가지고 라치는 금방 사장 렌조의 승인을 받아냈다.
기본 설계도는 그대로 스타일링과 코치웍을 맡은 베르토네에게로 전달되었다.
한편 비잘리니는 같은 휠베이스를 가지면서도 엔진 마운트 위치를 더 뒷쭉으로 치우치게 하고 낮은 콕피트와 짧은 프론트 오버행을 가진 리볼타 베이스의 FR차를 설계하여 렌조에게 제안한다.
결국 사태를 못견디고 뜻을 굽힌 것은 렌조 리볼타였다. 그는 "양쪽 프로젝트를 승인" 했던 것이다.
63년 10월 27일, 토리노 쇼 회장에서 그 2대가 공개되었다.
베르토네 스탠드에는 라치 설계에 의한 컴포트판이 '이소 A3/L그리포' 라는 이름으로, 또 이소의 자사 스탠드에는 비잘리니 설계에 의한 순수 스포츠카판 '이소 A3그리포'가 각각 놓여졌다.
베르토네에서 코치워크를 받은 라치판 A3/L (샤시 No. 001) 이 '차기생산형 로드스포츠카' 로 소개된 것에 대하여 모데나의 스포츠카즈 S.P.A. 가 코치워크를 맡고 리볼타의 프로토타입 비잘리니 SrL에서 마무리지은 알루미늄을 두들겨 만들어진 채 전시된 비잘리니판 A3 (이후 구별을 위해 A3/C라고 불린다. 출품차는 샤시 No. #BO201)는 '그리포 레이싱 버전' 으로 공개되었던 것이다. 렌조는 라치안을 자사에서 생산화하는 것과 동시에 비잘리니의 설계에 대해서는 생산, 판매, 레이스 출장 등의 권리를 일절 비잘리니 본인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이 성가신 문제를 마무리지었다. 비잘리니는 그리포에 대한 고문료를 모두 잃어버리는 대신, 그 교환조건으로 자신의 작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이 이후에 이소 그리포. 비잘리니 GT라는 각기 다른 이름으로 판매되게 되는 형제차의 전말이다.
그리포 A3/L (로드카) 는 생산화를 위한 개발을 통해 '이소 그리포 GL350'라는 이름으로 65년부터 느긋한 생산에 들어갔다. 'GL350'이란 탑재하는 시보레 327CID 엔진의 출력에서 따온 이름인데, 65년에 만들어진 8대의 GL350에는 실제론 압축비 11.25, 카터제 4벨브 기화기 1기인 340bhp판 (6000rpm) 사양이 탑재되었다.
이듬해 66년부터는 이것에 압축비 11.5, 홀리제 4벨브 1기로 350bhp판 (5800rpm) 로 변경하여 명실공히 350가 되었다. 이 시점에서 출력을 300bhp로 억누른 저압축비 (10.5) 사양의 300GL도 추가되었다.
이들의 스펙은 65~66년 당시 콜벳 스팅레이에 탑재되던 327엔진과 기본적으로는 같지만, 아우토스트라다에서의 초고속 연속테스트로 유온상승, 유압저하 등의 트러블이 속출한 탓에 오리지널의 2배의 용량을 갖는 알루미늄제 오일팬, 특제 오일쿨러, 자사개발된 강화현 컨로드 와 메인 베어링 캡 볼트 (4볼트형) 이 장착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때때로 발생하는 냉각수 누수라든가 유압저하 (어느쪽이든 강철 블럭의 응력뒤틀림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골치를 썩었고, 결국 출하된 엔진 모두는 한번 완전 분해하여 체크한 후 8시간의 벤치운전 (전개 전부하 30분을 포함) 을 해본 후 탑재되었다고 한다.
66년의 'Autocar'지에 의하면 그리포 GL350의 동력성능은 눈부신 것으로, 0-60mph를 6.9초에 달리고 최고속도 262km/h를 기록했다. 이 0-60mph 기록은 사실 퍼스트기어 만으로 달성한 것이었다.
그리포는 당시 세계최속급의 스포츠카, 페라리 275GTB와 정면승부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판매는 66년 97대 (GL300 34대, GL350 63대), 67년 62대 (마찬가지로 각각 15대, 47대) 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실력은 전혀 평가받지 못했다.
그리포는 그 후 GL365, 타르가바디를 거쳐 68년에 '그리포 7 Liter'를 등장시킨다. 콜벳용 427CID (6998cc) 빅블럭 V8을 탑재한 슈퍼 버전으로, 출력 390bhp, 299km/h의 최고속을 호언했다. (67~70년까지 65대 생산)
71년에는 프론트 마스크를 페이스리프트한 시리즈II 그리포가 발매되었다. 시리즈II의 바리에이션은 327엔진 (300bhp/350bhp) 의 'IR8', 7리터 엔진 (427은 400bhp, 454는 390bhp) 사양의 'CanAm' 및 그리포S (타르가 사양) 가 있다.
72년이 되자 327/427/454 모두 고압축비 버전의 공급이 (미국 배기가스 규제때문에) 끊겨버렸기 때문에 그리포는 포드제 351CID (클리브랜드)로 엔진을 바꾸었다. (포드 엔진차는 모드 34대)
어찌되었든간에 그리포의 생산이 연간 100대를 넘어서는 일은 한번도 없이 (가장 좋았던 66년에 98대) 73년 가을의 석유 쇼크와 함께 그 운명은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다. 8년간 만들어진 그리포는 프로토타입도 포함하여 총 402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 165대가 GL350/365, 77대가 GL300, 타르가는 시리즈I과 시리즈II를 합쳐 겨우 17대밖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리포와 함께 이소 자체도 생산중지로 내몰리게 된다. 짧은 역사 동안 만들어진 이소의 차 (리볼타, 그리포, 피디아, 렐레) 는 모두 1,669대였다.
전후의 이탈리아에서 한세대만에 성공을 거둔 두사람의 인물은 결국 슈퍼카라는 비즈니스에 뛰어드는 것에 의해 석유쇼크라는 예상치 못한 경제타격을 받고 어이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렌조 리볼타와 페루치오 람보르기니의 그 삶에는 세상의 모든 비즈니스맨이 한번은 꿈꿔본 야망에 가득차 있다. 누구도 그것을 비웃을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