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구석 과학사](10) 칼륨은 틀리고 포타슘으로 써야 맞다?

입력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대한화학회가 칼륨을 포타슘으로 바꿔 쓸 것을 제안한 지 1년여가 지났지만, 국립국어원에서 인정하는 표준어는 여전히 칼륨이고, 전국의 농민들은 여전히 ‘가리비료’를 쓰고 있다.

1971년 질소비료를 농민에게 배급하는 모습. 비료의 주성분에 대해 과학계는 ‘칼륨’으로 부르기로 했지만 농민들을 익숙한 ‘가리’라는 이름을 여전히 선호했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옛 글월을 읽다 보면 낯선 낱말들에 시선이 턱 걸리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다. 지금은 쓰지 않는 과학용어 같은 것들도 흥미롭다. 특히 일본식 용어가 광복 후에도 한동안 남아서 혼란을 일으키는 것들이 있는데, ‘초산’이 대표적이다. 오늘날 ‘초산’이라고 하면 대부분 식초의 원료인 아세트산, 즉 초산(醋酸)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문헌에서 초산은 아세트산 말고도 오늘날의 질산을 가리키기도 한다. 질산칼륨은 옛날부터 한자문화권에서 초석(硝石)이라고 불렀고, 그것을 원료로 만드는 질산도 초산(硝酸)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한편 오늘날 우리가 황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원료가 유황(硫黃)이므로 유산(硫酸)이라고도 불렸다. 이밖에도 만병에 즉효가 있는 ‘빨간 약’의 대명사 ‘옥도정기’는 요오드팅크(iodine tincture)의 일본식 한자 표기다.

이런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은 단순히‘알아두면 쓸데없는’ 지식 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용어의 변천과정에는 한국 과학의 역사가 담겨 있다. 한국이 과학을 어디서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어디에서 영향을 받고,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창문과도 같은 것이 과학용어의 역사다.

독일식 발음를 밀어낸 미국식 이름

일본이 근대화학을 배워온 창구는 당시 화학이 가장 발달했던 독일이었으므로 일본을 통해 들어온 원소와 화합물의 이름도 대부분 독일식이었다. ‘가리’나 ‘옥도’ 같은 이름은 독일어 원소 이름을 일본식 발음에 가깝게 한자를 빌려 표기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일본식 용어는 광복 후 순화되어서 독일식 발음에 조금 더 가까운 한글 표기로 대체되었다. 가리는 칼륨으로, 옥도 또는 옥소는 요오드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렇게 순화되었던 과학용어들은 어느새 새로운 과학용어에 밀려났다. 대한화학회가 2016년 화합물 명명법을 개정하면서 한때 초산가리였던 질산칼륨은 다시 ‘질산포타슘’이 되었다. 요오드팅크는 ‘아이오딘 팅크처’라고 부를 것을 권장한다. 이제 나트륨은 소듐(sodium)이, 칼륨은 포타슘(potassium)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름이 아예 바뀐 것은 아니지만 읽는 방식이 바뀐 원소들도 많다. 요오드는 아이오딘이 되었고, 티탄은 타이타늄, 게르마늄은 저마늄, 망간은 망가니즈가 되었다. 이미 100년 가까이 써온 용어들을 버리고 새 용어를 채택하게 만들 정도로 강한 외부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전 세계 과학계를 평정한 미국과 영어의 힘이었다.(소듐과 포타슘은 각각 나트륨과 칼륨을 부르는 영어식 이름이다.)

한국 과학기술이 척박한 토양에서 출발하여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해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부단히 해외와 접촉하며 선진과학을 열심히 익힌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일본으로, 미국으로, 독일로 많은 과학도들이 유학을 떠났고 광복 후에는 미국 유학이 크게 늘어났다. 미국에서도 인정받는 위치에 오른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이 1960년대 후반 이후 귀국하여 연구와 교육의 질을 높임으로써 한국은 소위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의 모범으로 꼽을 만한 눈부신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화를 통한 빠른 발전에는 피할 수 없는 대가가 따랐다. 한국의 과학문화는 전반적으로 미국의 영향이 압도적이고, 한국 과학계는 미국 과학계에 지나치게 동조화된 경향이 있다. 모든 과학기술 용어가 영어를 따라가는 것은 그 두드러진 징후다. 위에 소개한 화학용어 개편의 출발점도 ‘미국에 유학가거나 영어로 논문을 쓰면 용어를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학교 교육 단계에서부터 미국식 용어를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인식이었다.

과학교육의 목표를 어디에 둘 것인가

미국 과학이 전 세계를 선도하고 영어가 만국의 학술 공용어가 된 지금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첫째, 미국이 첨단 과학기술 연구를 선도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전 세계의 과학기술자들 중에는 영어가 아닌 언어로 연구하는 이들이 더 많다. 한국 과학계 전체가 영어로만 학술활동을 하다 보면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여지를 줄여버릴 우려가 있다.

둘째, 과학교육의 목표를 어디에 두느냐도 중요한 문제다. 화학계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용어를 개편한 것은 연구자로 성장할 학생들의 장래를 염려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중·고등학교의 과학교과서까지 연구자로 성장할 학생들을 우선 배려하여 짜야 하는가? 전문연구자의 길을 가지 않을 더 많은 학생들에게 독일식 용어인지 미국식 용어인지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이에 대해 한국의 과학계는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 같다. 화학계가 일본식 용어를 철저하게 미국식 용어로 바꾸는 방향을 선택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물리학계와 수학계는 일본식 용어를 순우리말 용어로 바꾸는 모험을 감행했다.

한국물리학회에서는 1995년 ‘전기장’을 ‘전기마당’으로 바꾸는 등 과감한 실험을 했고, 여기에 대해 논란이 끊이지 않자 현재는 전기장과 전기마당 두 가지를 모두 표준 용어로 인정하고 있다.

과학용어의 문제는 과학계 안에서 합의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대한화학회가 칼륨을 포타슘으로 바꿔 쓸 것을 제안한 지 1년여가 지났지만, 국립국어원에서 인정하는 표준어는 여전히 칼륨이고, 전국의 농민들은 여전히 ‘가리비료’를 쓰고 있다. 아직 ‘칼륨비료’도 입에 익지 않은 이들이 ‘포타슘비료’를 쓰게 될 날은 언제 올 것인가? 또한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만든 ‘나트륨 줄이기 운동본부’는 과연 언제 ‘소듐 줄이기 운동본부’로 이름을 바꿀 것인가?

화학계에서 미국식으로 용어를 개편한 것은 화학계 내부의 합의를 따른 것이고, 충분한 명분이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과학에 관련된 일이라고 모두 과학자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현대사회에서 과학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삶의 본질적인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학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일은 그 길에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


© 주간경향 (weekly.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향신문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생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