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3. '라파 라파' 나비를 부르는 다양한 언어들, 나비에 관해(3)
‘나비’를 총칭하는
‘슈메털링’이라는 말의 울림에는
날개가 둘로 나뉜 존재에 대한
살아 있는 기억이 담겨 있다.
말레이 부족들은 대부분
나비를 ‘쿠푸 쿠푸’ 또는
‘라파 라파’라 불렀는데
두 이름에서는
팔락거리는 날갯짓이 느껴진다.
특히 ‘라파 라파’라는 말에는
공작나비 날개 위의 눈 무늬나
토종 나비의 짙은 날개 뒷면에
흰색으로 적힌 알파벳 ‘C’ 자처럼
생동감 넘치는 아름다움과
넘치는 표현력, 무의식적
창조성이 담겨 있는 듯하다.
나비에 관해(3)
Über Schmetterlinge
- 헤르만 헤세, 1935년
아이건 어른이건 나비 수집가의 입장을 변호할 말이 있다. J. J. 루소 시대 이후에는 나비를 최대한 아름다운 상태로 오래 보관하려고 살아 있는 나비를 죽여 핀에 꽂아 표본화하는 수집가들을 잔인한 야만인으로 바라보는 감상적인 시선들이 많았다. 1750~1850년 사이의 문학작품 속에서는 핀에 꽂힌 나비 표본을 즐기고 경탄하는 사람들을 이상한 좀팽이 정도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시선은 당시에도 일부 터무니없는 편견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엔 더더욱 그러하다. 물론 어른이건 아이건 자연 상태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나비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수집가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조야한 수집가들조차 우리가 나비를 잊지 않는 데, 그리고 많은 지역에서 나비의 진귀한 옛 이름들이 유지되는 데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사랑스런 나비들이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게 된 데에는 그들의 역할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냥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단순히 사냥 기술만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못잖게 사냥감과 사냥감의 서식 환경까지 지키려고 애쓰는 것처럼 나비 수집가들도 당연히 쐐기풀 같은 식물들의 대량 제거와 자연 생태계에 대한 인간의 폭력적인 개입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나비의 개체수를 감소시키는지 가장 먼저 깨닫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간들이 어떤 지역에서 대대적인 정비에 나서게 되면 정작 농업과 정원수에 해를 끼치는 배추흰나비나 다른 생물체보다 좀 더 고결하고 희귀하며 아름다운 생물 종들이 희생되고 사라진다. 진정한 나비 애호가라면 알이나 애벌레, 번데기에만 보호의 손길을 뻗는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에서 가능한 한 많은 종류의 나비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도 힘쓴다. 나도 수년전부터 나비 수집을 포기했음에도 틈나는 대로 쐐기풀을 심어오고 있다.
나비 수집을 하는 소년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열대 지방, 인도, 브라질, 마다가스카르섬에 서식한다는 무척 크고 다채롭고 화려한 나비들에 관한 이야기를 한번쯤 듣게 된다. 개중에는 그런 나비를 박물관이나 수집가들의 집에서 직접 본 사람도 있다. 심지어 요즘에는 유리 케이스 안의 솜 위에 무척 아름답게 표본화한 이국적인 나비를 살 수도 있다. 직접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사진으로 볼 기회도 많다.
젊었을 때 나는 책에서 오월이면 안달루시아로 날아간다는 나비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 번이라도 그 나비를 볼 수 있기를 얼마나 원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친구 집이나 박물관에서 열대지방의 화려하기 짝이 없는 커다란 나비들을 볼 때마다 어릴 적의 그 형언할 수 없는 황홀함이 내 속에서 다시 꿈틀대는 것을 느낀다.
예를 들면 소년 시절 아폴로모시나비를 처음 보면서 느꼈던 숨 막힐 것 같은 황홀감이 그것이다. 나는 기적 같은 나비들을 볼 때면 비애감마저 감도는 그런 황홀함과 동시에 시인이랄 것도 없는 내 인생 한가운데에서 괴테가 느꼈던 경탄 속으로 한걸음 다가가고, 순간적으로 마법 같은 환희와 경건함, 삼매경에 빠져들곤 한다. 심지어 전혀 가능한 일이라 여기지 않았던 일이 훗날 내게 일어났다. 대양을 건너 뜨거운 낯선 해안에 내린 뒤 악어가 득실거리는 큰 강을 따라 열대숲을 지나가면서 열대 나비들을 살아 있는 상태로 관찰한 것이다. 이로써 어린 시절의 꿈은 상당수 이루어졌고, 이 성취와 함께 일부 꿈은 시들해졌다. 그러나 나비의 매력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로 이끄는 이 작은 문,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고상하고 손쉬운 길은 좀처럼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페낭에서 나는 살아서 날아가는 열대 나비를 처음 보았고, 쿠알라룸푸르에서는 그중 몇 마리를 처음으로 잡기도 했다. 수마트라섬에서는 바탕하리 강가에 잠시 머무는 동안 정글에서 천둥 번개와 함께 미친 듯이 쏟아지는 빗소리를 밤새 들었으며, 낮에는 숲 속에서 난생처음 보는 초록색과 황금색, 그리고 보석 같은 색으로 빛나는 낯선 나비들의 자유로운 유영을 관찰했다. 나중에 이 나비들은 핀에 꽂히거나 유리 케이스 안의 표본 상태로 다시 본 적이 있지만 그중 어떤 것도 밖에서 볼 때만큼 흥분되고 매력적이며 신비롭지 않았다. 나비들이 살아서 빛과 그늘이 어른거리는 숲 속을 날아다닐 때면 날개 색조차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기로 살아 숨 쉬는 듯했고, 비행은 그 자체로 다채로운 표현과 비밀스러움으로 넘쳤으며, 날개는 움직일 때마다 새로운 색으로 되살아나는 듯했다. 이런 장관은 호기심에 그저 밋밋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순간적으로 사냥꾼처럼 숨어 있을 때 기적처럼 다가왔다.
어찌됐건 나비를 그렇게 잘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동물이건 식물이건 색이 있는 대부분의 생물은 아무리 표본을 잘해도 죽고 나면 아름다움을 잃어버린다. 꽃이 좋은 예이지만, 그 하나로 부족하다면 사냥꾼이 막 총으로 잡은 새의 깃털을 살펴보라. 한나절 뒤에도 깃털에는 파랑, 노랑, 초록, 빨강이 남아 있지만 그 위에 이미 죽음의 싸늘한 입김이 내려앉으면서 무언가가 없어진 느낌이다. 아직 색이 어른거리지만 광채는 나지 않는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무언가가 사그라지고 소멸된 듯하다. 그에 비해 나비와 많은 종류의 딱정벌레는 그 차이가 훨씬 적어서, 죽은 뒤에도 다른 동물들보다 화려한 색이 훨씬 오래 보존된다. 심지어 곤충이나 빛, 특히 햇빛만 잘 차단하면 수십 년도 보존할 수 있다.
당시 내가 여행한 지역의 말레이 부족들도 자기들만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나비 이름을 갖고 있었다. ‘나비’를 총칭하는 ‘슈메털링’이라는 말의 울림에는 날개가 둘로 나뉜 존재에 대한 살아 있는 기억이 담겨 있다. 오래된 독일어 단어 ‘츠비슈팔터’와 ‘피팔터’, 그리고 이탈리아어의 ‘파르팔라’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말레이 부족들은 대부분 나비를 ‘쿠푸 쿠푸’ 또는 ‘라파 라파’라 불렀는데 두 이름에서는 팔락거리는 날갯짓이 느껴진다. 특히 ‘라파 라파’라는 말에는 공작나비 날개 위의 눈 무늬나 토종 나비의 짙은 날개 뒷면에 흰색으로 적힌 알파벳 ‘C’ 자처럼 생동감 넘치는 아름다움과 넘치는 표현력, 무의식적 창조성이 담겨 있는 듯하다.
신비로운 나비들의 그림을 모아놓은 이 화첩(헤세가 추천하는 화첩의 나비 그림은 본 연재에 삽입된 그림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나비을 살펴보다 보면 여기저기서, 아니 곳곳에서 인식과 경외심의 전 단계인 크나큰 경탄에 사로잡힐 것이다.
3화 끝.
4화로 이어집니다.
- 헤세가 들려주는 나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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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문예출판사
발매 2016.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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