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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를 축소한 대동여지전도

도판의 지도는 전체 22층 가운데 13층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원래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흑백의 목판 인쇄본인데 독도의 편리를 위해 채색을 가미하였다.

『대동여지도』는 22첩으로 구성된 절첩식 지도이다. 즉,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120리 간격으로 구분하여 22층을 만들고, 동서로 80리 간격을 한 면으로 했는데 두 면이 한판으로 구성되어 각 층의 판을 병풍식으로 접어 첩으로 만든 것이다. 지도의 앞부분에 방안 크기가 수록되어 있어, 『대동여지도』도 『청구도』처럼 매방 10리의 방안 격자가 그려진 대형 전도가 지도제작의 기본도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열람의 편의를 위해 방안 격자를 제거하였고 『청구도』와는 달리 지도 외곽의 방안 눈금도 없다. 대신에 지도 안에 그린 도로망에 10리마다 표시를 함으로써 거리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청구도』에서는 남북 29층 100리 간격으로 구분하여 지도 전체의 남북 거리가 2,900리이지만, 『대동여지도』는 2,640리로서 전체 길이에 차이가 있다. 이는 판목을 절감하기 위해 제주도와 남해안 사이의 빈 공백을 압축시켜 줄인 것과 관련이 있다. 『대동여지도』는 전통적인 지도제작의 모든 성과를 결집한 지도로 평가되는데 다른 지도에 비해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먼저 양식적인 면에서 지적할 수 있는 점은 각 층의 지도를 열람과 휴대에 편리하도록 절첩식으로 만든 점이다. 『청구도』는 책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상하의 연결관계를 파악하기가 힘든 단점이 있다. 그러나 『대동여지도』에서는 위아래의 층을 연결시켜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지역의 연결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대동여지도
김정호(金正浩), 1861년, 목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지도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청구도』에서 보이는 번잡한 지지적인 주기를 없애 지도와 지지를 분리시키고 있다. 이는 『대동지지』와 같은 지지를 별도로 저술하여 지도와 같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목판본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필사본에서처럼 복잡한 글자나 그림을 그리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가능한 한 지도상에 표시된 다양한 사상들을 간단한 기호로 표시하는 것이 더욱 필요했는데, 김정호는 이러한 측면을 궁구하여 그 결과 지도표(地圖標)라는 독특한 범례를 고안하였다. 영아(營衙)·읍치(邑治)·성지(城池)·진보(鎭堡)·역참(驛站)·창고(倉庫)·목소(牧所)·봉수(烽燧)·능침(陵寢)·방리(坊里)·고현(古縣)·고진보(古鎭堡)·고산성(古山城)·도로(道路) 등과 같은 다양한 내용이 간략한 부호로 표현되었다. 특히 도로는 단선으로 그려져 하천과 혼동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직선으로 표시했고 10리 간격마다 표시를 함으로써 거리를 파악할 수 있는 축척의 기능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대동여지도』의 표현 양식상에서 가장 특징적인 점으로 지적되는 것이 산지의 표현이다. 산도(山圖)에서 사용되는 산의 표현방식을 응용하여 개별 산봉우리를 그리지 않고, 끊어짐이 없이 산줄기를 연결시켜 그렸다. 이는 우리나라 지도제작의 특징으로서 전통적인 자연인식 체계이기도 하며, 풍수적 사고가 반영된 것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산지 표현에서는 이렇게 연맥을 강조하는 표현뿐만 아니라 산줄기의 험이(險夷)에 따라 산줄기의 굵기를 달리하여 그렸으며 특정 산들을 강조하여 산세를 표현하였는데, 이를 '산악투영법(山岳投影法)'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산계의 표현은 기본적으로 하계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는 것으로 하천을 가르는 분수계는 평지에 가까운 경우라도 산줄기로 표현되고 있다.

이처럼 『대동여지도』는 당대까지 이어져온 지도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표현방식을 가미하여 제작되었는데, 행정·군사적 목적의 실용성뿐만 아니라 판화적인 예술미까지 갖추고 있는 조선시대 지도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 목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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