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깔때기에 집단창작···美서 차린 ‘소설공장’ 매출 25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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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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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1인 창작의 성역일까. 뛰어난 작가 1명의 고뇌와 사색이 아니라, 흥행을 보장하는 데이터와 공동집필 시스템으로 소설을 대량생산할 수 있다면 어떨까.

글로벌 웹소설 플랫폼 '래디쉬'의 이승윤 대표가 16일 서울 중구 중앙일보 사옥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오소영 인턴

영문 웹소설 플랫폼 래디쉬(Radish) 얘기다. 래디쉬는 한국 웹툰·웹소설 플랫폼의 미리보기형 소액결제(기다리면 무료지만, 돈을 내면 다음화를 미리 볼 수 있는 모델) 방식에 할리우드식 집단 창작, 게임업계의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문화를 결합했다. 래디쉬의 하루 매출은 약 1억3600만원. 1년새 25배가 뛰었다. 가장 인기있는 소설은 월 7~8억원을 벌어온다.

래디쉬는 최근 카카오페이지와 소프트뱅크벤처스 등으로부터 약 760억원을 투자받았다. 이진수 카카오페이지 대표, 이준표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 김상헌 전 네이버 대표가 이번에 래디쉬 사외이사로 선임됐다.

이승윤(30) 래디쉬 대표를 지난 16일 서울 중구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이 대표는 "게임과 TV드라마를 만들다가 미국의 출판시장에 뛰어든 사람들이 래디쉬의 대부분"이라고 소개했다.
이 대표 자신은 저널리즘에서 먼저 출발했다. 2012년 영국 옥스퍼드대학 재학 시절 학생 자치기구 '옥스퍼드 유니언'에서 동아시아인 최초로 회장에 뽑혀 이름을 알렸다. 이후 런던에서 크라우드펀딩 기반의 저널리즘 스타트업 '바이라인'을 창업했다. 좋은 보도로 돈도 벌고 싶었다는 그는 2016년 웹소설 시장에 눈을 돌려 래디쉬를 창업했다. 이듬해엔 네이버웹툰의 투자를 받기도 했다.

2016년 서비스 시작 이래 '래디쉬'의 일 매출 증가세 [사진 래디쉬]

데이터로 거르고, 공장식 생산

Q : 미국에서 웹소설에 도전한 이유는.
A : 영미권 모바일 웹소설 시장의 잠재력이 크다고 봤다. 미국은 장르형 오락소설 시장이 음악 시장의 2배다. 쉽게 예를 들면 J.K.롤링이나 댄 브라운, 스티븐 킹 같은 인기 작가의 자산 가치가 비욘세나 마돈나의 2~3배쯤 된다. '문학' 하면 순수문학을 떠올리는 국내와는 환경이 다르다. 그런데 이런 큰 시장에 모바일과 프로 작가의 연재를 전제로 한 웹소설 분야에서 압도적인 플랫폼이 없었다.


Q : 래디쉬만의 차별화 전략은.
A : 할리우드식 '집단 창작'을 웹소설에 적용했다. 메인작가, 줄거리 PD, 문장만 쓰는 보조작가 등 분업화한 작가진이 공장처럼 빠르게 다음 에피소드를 생산한다. 작가 개개인에게 비싼 고료를 주느라 정작 플랫폼은 돈을 많이 못 버는 한·중·일 콘텐트 서비스의 약점을 보완했다고나 할까. 에피소드 하나는 보통 영어로 2000단어 안팎의 짧은 분량이다. 일일 TV드라마를 만들던 프로 작가들이 쓰는데 방송분야 최고상인 에미상(Emmy Award)을 받은 베테랑도 많다. 다른 하나는 데이터다.


Q : 데이터는 어떻게 활용하나.
A : 연재작을 정할 때 '데이터 깔때기' 공식을 쓴다. 다양한 컨셉 테스트→10회 파일럿 후 대박감이면 빠르게 100~200회 생산→초대박감이면 매일 3~5편씩 연재하는 모델이다. 각 단계마다 클릭률 같은 데이터를 유효한 지표로 본다. 모바일 게임을 만드는 방식과 비슷하다. 1화도 여러 버전으로 만들어서 A/B테스트(대조실험)를 한다.

글로벌 웹소설 플랫폼 '래디쉬'의 이승윤 대표가 16일 서울 중구 중앙일보 사옥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오소영 인턴
1년새 코어층 기반 30배 성장
래디쉬는 지난 1년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여름 1억원 남짓이었던 월 매출은 1년 만에 약 30억원이 됐다. 월간 이용자 수는 약 70만명이지만 매출로는 아마존의 오디오북인 오더블에 이어 미국 도서앱 2~3위다. 경쟁사인 커뮤니티형 웹소설 앱 '왓패드'는 아마추어 작가를 기반으로 월간 이용자 수가 수천만명에 달하지만, 매출 순위는 8~10위에 그친다. 빠른 연재에 능숙한 프로 작가진의 힘이다.


Q : 코로나19의 영향은 아닐까.
A : 물론 그 영향도 있다. 하지만 성장률이 본격적으로 뛴 건 (코로나19 본격화 전인) 지난해 11월부터다. 코로나19가 길어지면 우리도 좋을 게 없다. 돈을 많이 내는 헤비 유저에 40대 여성이 많은데 자녀가 집에 머물면 이들이 웹소설을 볼 시간이 줄어든다.


Q : 이용자에 비해 매출이 높다.
A : 웹툰은 다수가 소액을 내는 상품이라면 웹소설은 소수의 '하드코어' 독자가 고액을 결제하는 상품이다. 웹소설 한편을 1000회까지 읽으면 1인당 30~40만원을 내는 셈인데, 애독자 상위 3~4%가 매일 30~50회씩 읽는다. 그래서 작품을 '빨리' 공급하는 게 중요하다.

영문 웹소설 플랫폼 '래디쉬'의 대표작. 가장 인기 많은 작품의 월 매출은 7~8억원 가량이다. [사진 래디쉬]

"오락 문학도 하나의 장르"

Q : 히트작이 뭔가.
A : 판타지 로맨스를 그린 '톤 비트윈 알파(Torn Between Alphas)'와 '억만장자의 대리모(The Billionaire's Surrogate)'다. 열 달이 안 된 작품들인데 누적 조회수가 각각 5200만회, 5700만회, 누적 매출이 46억원, 24억원이다. 매일 5편, 3편씩 내보내고 있고 현재 1000회, 600회 이상 연재됐다.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이 등장하는 판타지 로맨스, 여고생·여대생 주인공의 1인칭 시점 소설이 잘 된다.


Q : 웹소설은 지나치게 가볍다는 시선이 있다.

A : 영화나 게임에 작품성을 중시하는 인디영화, 인디게임이 있고 재미와 상업성을 중시하는 오락영화, 오락게임이 있듯 소설도 마찬가지다. 재미가 목적인 오락 문학도 중요한 장르다.

영문 웹소설 플랫폼 '래디쉬'는 다양성을 중시한다. 작품 속에 다양한 인종 캐릭터를 출연시키고 #BLM(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지지 성명에도 적극 참여한다. 사진은 퀴어 퍼레이드 기간에 올린 성소수자(LGBTQ) 지지 글. [사진 래디쉬]

래디쉬의 가파른 성장 뒤에는 TV 드라마업계와 게임업계에서 성공을 경험해본 경영진이 있다. 최고콘텐트책임자(CCO)와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맡고 있는 수 존슨 ABC방송 전 부사장과 신종훈 카카오페이지 공동창업자가 대표적이다. 이 대표는 "CEO는 비전과 전략만 제시하고, 전문 분야는 최고의 인재에게 전권을 준다"는 경영 철학을 갖고 있다.

글로벌 웹소설 플랫폼 '래디쉬'의 사외이사로 선임된 이진수 카카오페이지 대표, 김상헌 전 네이버 대표, 이준표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 모두 이승윤 대표와 3~7년 이상의 오랜 친분이 있는 인물들이다. [중앙포토]

"소설은 모든 IP의 원점"

Q : 큰 투자를 받은 이유가 뭘까.

A : 소설은 모든 지식재산(IP)의 원점이다. 대박 IP만 나온다면 영화·드라마·게임·만화 어떤 것으로든 만들 수 있다. 우린 IP를 100% 소유한다. 현재 누적 IP가 8700여 개다. 집단 창작을 도입한 건 2018년, 데이터 깔때기 모델을 만든 건 겨우 지난해다. 이제 시작이다.


Q : 투자금은 어디에 쓰나.

A : 스케일업(성장)을 위한 채용에 쓸 예정이다. 회사가 1년간 비정상적으로 팽창하는 동안 직원 수는 그대로였다. 마케터 2명이 IP사업을 다 떠맡은 수준이었고 인사팀도 없었다. 제시 머레이 전 NBC유니버설 콘텐트전략 부사장과 앰버 앤더슨 폭스넥스트(20세기 폭스가 만든 게임 개발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영입을 기점으로 콘텐트·마케팅·디자인 인력을 충원할 생각이다.


Q : 앞으로의 계획은.
A : 주력 장르인 로맨스 외에도 호러·미스터리 등 여러 장르에서 월 매출 10억원짜리 히트작을 10개 이상 만들고 싶다. 최종적으론 오리지널 IP를 영화·드라마·게임·만화화하는 것이 목표다. 미국에서 더 안착한 후엔 영어 소설이 통하는 유럽, 남미 진출을 생각 중이다.

김정민 기자 kim.jungmin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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