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들은 죽었는데 가해자들과 경찰은 잘만 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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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03.03. 오후 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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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역배우 자매 사건으로 본 ‘미투’

2009년 8월 28일 한 여성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18층 빌딩에서 몸을 던져 숨졌다. 소희씨(가명·당시 34세)다. 소희씨가 남긴 메모에는 ‘난 그들의 노리개였던 것이다. 더 이상 살아 뭐하겠나’ 등의 내용이 쓰여 있었다. 일주일 뒤 경기도 안양의 한 건물 화단에서 또 다른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소희씨의 동생 소미씨(가명·당시 30세)다.

지난해 11월 30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경찰의 여성폭력 대응 전면쇄신을 위한 공동행동 주최로 열린 ‘여성폭력에 대한 경찰의 부당대응‘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조사과정에서 2차 피해로 고소 취하

어머니 장모씨(66)는 줄초상을 치렀다. 얼마 뒤에는 남편이 뇌출혈로 세상을 등졌다. 이후 장씨는 다리에 힘이 없어 걷지 못했다. 지팡이에 의지해 다녔다. 그렇게 몇 달을 보냈다. 동생 소미씨는 장씨에게 “엄마, 언니가 너무 보고 싶어요. 엄마가 억울함을 꼭 풀어주세요”라고 말했다. 그게 유언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사건은 2004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댄서를 하던 동생 소미씨가 언니에게 “단역배우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소희씨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보조반장 이모씨로부터 성추행과 강간 등을 당했다. 반장과 보조반장 등은 단역배우들을 관리하는 직책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씨는 다른 현장 직원들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이씨가 강간 사실을 알렸다는 것은 다른 가해자들의 발언에서 알 수 있다. 소희씨 경찰 조사 진술과 병원 의무기록사본에 따르면 보조출연자 담당 양모씨는 소희씨를 발로 차고 머리채를 쥐어잡으며 “이OO한테 했던 대로 해보라”면서 소희씨를 강간했다. 이런 식으로 다른 이들에 의한 추행과 강간이 이어졌다. 가해자는 총 12명이다.

성폭력은 3개월 동안 지속됐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했다. 가해자들은 “어디 말하기만 해봐라. 다 소문 나게 해주겠다” “너희 동생과 엄마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장씨는 “소희는 한평생 공부만 한 애라 세상물정을 잘 몰랐다. 사람에 대한 겁도 많았다”고 말했다. 소희씨는 피해사실을 정신과 의사에게 처음 털어놨다. 사건 이후 5개월째였다.

가족이 소희씨를 설득해 고소에 나섰다. 장씨는 “그때 고소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경찰 조사과정에서 벌어진 2차 가해 때문이다. 장씨는 소희씨가 쓴 메모뭉치를 가지고 경찰서에 갔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장씨에 따르면 담당형사는 메모뭉치로 책상을 치면서 “이게 사건이 됩니까? 이거 사건 안 된다”고 수차례 말했다. 메모뭉치가 너덜너덜해졌다.

가해자와 피해자 분리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소희씨 건너 책상에서 가해자들도 조사를 받았다. 대질을 하진 않았지만 장씨는 “무슨 말을 하는지 똑똑하게 들렸다”고 말했다. 가해자들은 합의된 성관계라고 주장했고 특정 성행위를 묘사하기도 했다. 가해자들이 화장실에 가거나 담배를 태우러 갈 때면 소희씨는 몸을 움츠렸다. 2년 가까이 이런 일이 반복됐다.

2년 동안 소희씨는 정신과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장씨에 따르면 경찰에 의한 성희롱도 있었다. “담당형사가 당직을 서는 저녁에 조사를 받으러 간 날이었다. 술 취한 경찰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경찰들이 우리 애 근처로 왔고 그 중 한 명은 ‘12명이랑 잔 사람이 이 아가씨야?’ 이런 말을 했다.” 그 날 조사가 끝난 뒤, 소희씨는 경찰서 앞 차도에 뛰어들었다. 다치지는 않았지만 큰 소동이 벌어졌다.

결국 소희씨는 고소를 취하했다. 소희씨는 당시 진술서에 “더 이상 사건에 대해 신경쓰고 싶지 않다. 고소를 할 때에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당연하고 쉬울 줄 알았는데 조사 받는 과정에서 진실을 밝히기가 힘들고, 다시 그 사건들을 기억하는 것이 참을 수 없어 고소를 취하한다”고 밝혔다. 고소 취하와 함께 조사도 끝났다. 당시 성범죄는 친고죄였다.

소희씨의 생전 병원의무기록사본. 이하늬 기자

담당 경찰로부터 성희롱당하기도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경찰의 2차 가해는 소희씨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장애인인 강모씨(28)는 지난해 11월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열린 ‘경찰이라니 가해자인 줄’이라는 기자회견에서 남자친구에 의한 성폭력을 신고하자, “장애인이면 어차피 장애인끼리 결혼해서 살텐데, 결혼할 사이인 남자친구와 좀 싸웠다고 신고를 하면 되겠느냐”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한국여성의전화 등 424개 단체로 구성된 ‘경찰의여성폭력대응전면쇄신을위한공동행동’이 당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경찰은 ▲스토킹 피해자에게 “예뻐서 좋겠네”라고 말하는가 하면 ▲성폭행을 신고하러 간 사람에게 “왜 저항을 못해? 아가씨 보니까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던데”라고 말했고 ▲“왜 여자 혼자 그 시간에 술을 마시고 돌아다녀요” 등의 발언을 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12년 통계를 보면 성폭력 고소를 한 피해자 25%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었다고 답했다.

이는 각 경찰의 인권 감수성에서 비롯되는 문제라고만 보기 어렵다. 이선경 변호사는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지적했다. 현행법은 ‘상대의 의사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높은 강도의 폭행이나 협박’을 강간의 구성요건으로 한다. 이 변호사는 “피해자 의사에 반하지만 폭행이나 협박이 없는 경우, 형사처벌을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조사과정에서 2차 가해가 될 수 있는 질문이 나올 수 있는 이유다.

형사처벌에 실패할 경우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으로 가야 한다. 장씨도 그 절차를 밟았다. 자매가 세상을 등진 이후, 장씨는 가해자 12명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청구했다. 1억원 및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는 내용이었다. 결과는 가해자들의 승리였다. 죄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재판부는 “강간 내지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이나 강제추행 등의 성폭행을 당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패소 이유는 공소시효 만료였다.

이제 법적으로 장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루하루를 술로 보냈다. 그러다 생각한 것이 ‘폭로’였다. 장씨는 ‘강간하고 살인한 자들이 아직도 반성하지 않고 있다. 내 두 딸의 영혼이 하늘을 맴돌고 있다’고 쓴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시작했다. 피켓에는 가해자들의 실명도 쓰였다. 최근 벌어지는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와 비슷한 양상이다.

1인 시위는 며칠 가지 못했다. 가해자들이 장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기 때문이다. 명예훼손은 사실을 적시한 경우도 처벌 받을 수 있다. 장씨도 처벌을 각오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장씨의 손을 들어줬다. 나아가 부언(附言)에는 이렇게 쓰였다. “이 법원은 피고인과 두 딸이 겪은 일련의 사건에서 공권력이 범한 참담한 실패와 이로 인해 가중됐을 그들의 극심한 괴로움을 보며 깊은 좌절과 슬픔을 금할 수 없다.”

장씨는 “이 판결 덕에 조금은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가해자가 형사와 민사 모두에서 죄를 인정받지 않았음에도 명예훼손에서 어머니가 이긴 건 상당한 성과”라며 “비슷한 맥락에서 성폭력 사건이 입증부족으로 무죄판결에 선고된다고 해도 자동으로 고소인이 무고로 처벌받는 것은 아니다”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문제가 다 해결된 건 아니다. 가해자들이 마치 없던 일처럼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단죄’의 영역이 아니다. 이들에 의해 발생하는 또 다른 가해를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실제 가해자 12명 중 다수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기획사들과 계약을 맺고 단역배우를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한 가해자는 이후에도 성폭력을 일삼았다는 증언이 나왔다.

소희씨가 생전에 남긴 기록. 이하늬 기자

“가해자의 세상 복귀는 쉬운 거 같다”

이런 문제의식은 다른 피해자들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다. 한 유명 래퍼에게 폭력과 원치 않는 성관계를 당한 피해자는 “가해자가 유명한 사람이라서 처음에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신고하지 않으면 다른 피해자가 또 생긴다는 말에 신고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 해당 래퍼는 피해자가 아닌 대중을 상대로 한 사과를 SNS 계정에 올린 다음 공연 등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에 피해자는 “가해자의 복귀는 정말 쉬운 것 같다. 너그럽게 봐준다”고 말했다.

2016년 10월, 성추행이 폭로된 안모 작가도 비슷한 사례다. 폭로 당시 안 작가는 가해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안 작가는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지난해 말에는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을 받은 아트쇼에서 신작을 발표했다. 성추행 피해자는 “적어도 정부라면 그런 사건이 있었던 사람에게 지원을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종운 변호사는 이런 사회 분위기를 두고 ‘사회적 처벌’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소희씨 자매 사건처럼 혐의는 있지만 법적으로 처벌 받지 못한 경우라 해도 사회적인 분위기가 바뀌면 가해자의 복귀는 물론이고 또 다른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해자가 아무렇지 않게 복귀하는 모습은 ‘성폭력, 별거 아니구나’라는 인상을 주기 쉽다.

박 변호사는 “특히 최근 미투 운동의 경우, 사건이 일어난 지 한참 지나 공개된 것들이 많다. 이런 것들은 형사로 입증하기가 어렵다. 형사에서 입증하지 못하면 민사에서도 질 가능성이 높다”며 “그렇기 때문에 형사처벌 대상이냐 아니냐의 방향이 아니라 사회적인 처벌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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