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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조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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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5. 18:54762 읽음

여행의 안도 

여행에서 가장 안도하는 순간은 종일 걷고 돌아다니다 낯선 숙소에 체크인을 무사히 하고, 너무 비좁지 않은 방에 들어와 짐을 풀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켰는데, 망설임 없이 따뜻한 물이 쏟아질 때다. 

언어도 낯선 도시에서 어렵게 찾아간 카페가 휴무일 때, 도무지 들어가고 싶지 않은 숙소를 예약한 내가 원망스러울 때, 갑자기 비가 쏟아져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했을 때. 여행 중 만난 무수히 안 좋은 상황에서도, 따뜻한 소낙비 같은 샤워의 시간이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깨끗한 침대에 몸의 힘을 쭉 빼고 누우면 불안이 녹아버린다. 다음 날, 여행을 잘할 힘이 또 생겨나는 것이다. 

선물 같았던 출장 
인도네시아 발리 아야나 리조트 풀 빌라 

첫 해외출장, 밤늦게 숙소에 도착했을 때, 이런 숙소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카트를 타고 빌라 앞에 덩그러니 남겨졌고,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문을 여는 순간, 반짝거리는 공간이 그곳에 있었다. 작은 풀이 딸려 있었고, 화장실과 욕실은 고급 대리석으로 마감했으며, 널찍한 침대는 구름을 떼어 온 것 같았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좋으련만, 수영복을 챙겨왔어야 했나? 혼자 누리기엔 아쉬운 숙소였다. 아침에 깨어나 숙소 밖을 나오니, 끝이 보이지 않는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 이후의 출장에선 이만큼의 숙소에서 머무른 적은 없다. 하지만 출장을 늘 즐겁게 생각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숙소는 그렇게 내 마음속에 특별하게 저장되어 있다. 

산꼭대기 나무로 지어진  
태국 치앙마이의 뱀푸 트레킹 호텔 

분명히 일정표엔 호텔이라고 써져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가이드의 말을 듣고 그 호텔로 들어섰을 때,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3시간 산을 타고 온 곳은 나무로 지어져 바람이라도 한차례 불면 쓰러질 것 같은 오두막이었다. 전기는 들어오지 않고(휴대폰 충전기를 왜 들고 왔을까?), 물은 차가웠다. 와이파이는 진작에 터지지 않았다. 이곳에서 1박을 할 수(버틸 수) 있을까.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금방 어두워졌고, 별 달리 선택은 없었다. 여행자들과 작은 불빛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카레를 끓이고, 장작불을 때서 맥주를 마시며 몸을 녹였다. 소곤소곤, 산속에서 말소리가 곤충 소리와 섞였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는데, 바람 솔솔 들어오는 딱딱한 매트 위에서 곧 잠에 빠져들었다. 이른 아침 깨어나니, 나무 틈으로 빛이 새어들었고, 여행자들의 코 고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닭 우는소리가 더해져, 부스스 숙소를 나왔다.  
숙소 아래로 운무가 껴 있었다. 마치 비행기 창으로 내려다보는 풍경 같았다. 그렇게 꾸역꾸역 하루를 보냈고, 앞으로 이런 숙소를 만나기 힘들 거란 생각에 아쉬움마저 들었던 곳. 온몸이 굳어져서 잠들었던 그 낯섦의 순간이 무엇인가 불안함이 감지될 때 마다 생각나곤 한다. 하지만 곧 잠이 들었던 것처럼, 내 불안함도 잔잔해질거란 걸  알게 되었다.  

도시를 기억하게 하는 공간 
태국 치앙마이 차이요 호텔 

나무로 헐겁게 지은 호텔에서 내려와 그날 묵은 곳은 치앙마이 구시가지에 있는 작은 부티크 호텔이었다. '오늘은 제대로 씻을 수 있겠지?' 호텔에 들어서는 순간 창가로 흘러들어온 빛이 조명이 되어 주었다. 푹신한 침대와 긴 나무 테이블, 감성적인 인테리어가 더해져 마치 갤러리에 온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하루 만에 이렇게 차이나도 되는 거야?' 짐을 풀고 거리로 나섰다. 실컷 돌아다니다, 숙소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집은 아니었지만, 낯선 거리 위에서 이런 안도감이 들다니! 좋은 잠을 자면 일찍 깬다. 조식을 천천히 먹고, 3일 동안 매일 아침 엽서를 썼다. 다이어리엔 나를 향한 긴 편지도. 이렇게 산뜻한 공간에선 무엇을 생각해도 밝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 엽서들이 친구들에게 착착 도착하고, 집으로 돌아와 어느 날 펴본 다이어리의 글이 들어오는 순간, 나는 좋은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숙소에서 아침마다 퍼져나갔던 쌀국수 냄새와 오후의 향기로운 볕, 고운 나무결의 가구들이 치앙마이를 기억하게 하는 한 편의 이미지가 되었다. 

글·사진 박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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