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재

측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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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량계 측우기

1442년에 서운관에 설치되었던 측우대(보물 제843호 관상감측우대). 가로 92, 세로 58, 높이 68cm의 화강석제. 상면에 지름 16.5, 깊이 4.7cm의 둥근 구멍에 측우기를 안치하였다. 사진에 보이는 측우기와 그 옆에 놓인 자는 모조품이다.(기상청 소장)

강우량을 측정하려면 빗물을 받는 그릇(受雨器)과 그 안에 괸 물의 깊이를 재는 자(量尺), 그리고 그릇을 안치할 수 있는 적절한 높이의 받침대(臺)가 있어야 한다.

측우기(測雨器)는 이와 같은 세 가지 부품을 갖춘 우량계(雨量計, rain gauge)로서 조선 세종시대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명되어 실용화되었다. 보통은 빗물 받는 그릇을 ‘측우기’라 불렀다.

우량을 헤아려 농사 등에 활용하는 제도는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일찍부터 시행되었다. 그러나 우량계로써 장기간 기록을 남긴 것은 전근대에는 조선조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세종시대의 측우기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며 오로지 부품의 하나인 받침대가 남아있다.

그래도 다행히 헌종 3년(1837)에 제작된 ‘금영측우기’가 남아 있어 세종 측우기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 이번 호에서는 발명과 실용사례를 통해 측우기는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겠다.

2 기우제와 측우기

이문원 측우기 받침대. 대리석 받침대의 4방에는 [측우기명(測雨器銘)]이 새겨져 있다. 왼쪽 벽면에 보이는 액자는 대의 4방에 새겨진 측우기명 탁본이다. 금영측우기를 복제하여 대 위에 안치하였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올해는 104년만의 가뭄으로 서울지방의 5, 6월 강우량이 예년의 10분의 1에도 못 미쳤다. 국민 모두가 갈망하던 비가 6월 29일 밤부터 내렸는데 30일 오전까지 대략 100mm가 내려 완전 해갈에는 미흡해도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올해와 상황이 비슷했던 조선조 정조 6년(1782) 5월(음력)로 되돌아 가보자. 조정에서는 대신들을 삼각산과 목멱산(남산)에 보내 첫 번째 기우제(祈雨祭)를 지냈고, 두 번째는 용산강에서 치렀다. 이어 5월 22일에는 우사단(雩祀壇)에서 임금이 세 번째를 지낸다.

이날 임금은 일산(日傘)도 바치지 않은 채 밤새워 기도하고, 연(輦)을 물리치고 보여(步輿)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감옥에 들러 의금부에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고 환궁하였다.

신시(申時 -오후 3시)부터 비가 내렸고, 관상감에서 “측우기의 수심(水深)이 1촌 5푼입니다.”고 보고하였다고 5월 23일 [정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다음 날 정조는 규장각 신하들에게 이문원(摛文院-규장각) 앞에 측우기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직제학 심념조(沈念祖)에게는 명문을 짓고, 직제학 정지검(鄭志儉)에게는 글씨를 쓰도록 하여 넉 달 뒤에 완성되었다.

측우대 사방에 새긴 명문 가운데 마지막 구절을 읽어보도록 하자.

“....... 1분1촌을 상상해서, 백성들의 사정을 알 수 있다. 적으면 가물까 보아 염려하고, 많으면 홍수에 상할세라. 이로부터 언제고, 적당하기만 비노라.” 훗날 규장각 검서 박윤묵(朴允黙)은 이 명문을 읽고 “..... 어진 임금의 하늘 공경하시는 뜻을 알고 싶다면, 돌에 새긴 신하의 명을 살펴보시라”는 시 한 수를 남겼다.

측우기는 백성에게 기쁨을 주려는 임금의 마음이 담긴 그릇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때 만든 측우기의 받침대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3 측우기의 발명

측우기는 누가, 왜 만들었을까? 이 물음의 답은 [세종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세종 23년 8월 18일의 기사를 보자. “호조에서 건의하기를, 각도 감사가 우량을 보고하도록 하는 법(轉報雨澤 - 중국 고대의 上雨澤)을 시행 중이나 흙의 건조하고 습한 성분이 같지 않고, 흙속으로 빗물이 스며 든 깊이(入土淺深)도 알기 어려우니 서운관에 석대를 놓고, 높이 2척, 지름 8촌이 되는 쇠그릇을 주조하여 석대 위에 올려놓고 빗물을 받아, 관원으로 하여금 자로 수심을 재어 보고하게 하고, ......”.

이 내용은 지금까지 시행해온 호미나 보습으로 땅을 파서 빗물이 스며든 양을 감각적으로 알아서 임금에게 보고하는 제도를 개선하여 서운관에 우량계를 놓고 측정하여 보고하도록 법을 일부 개정하자는 건의이다.

눈에 띄는 대목은 높이 2척, 지름 8촌이 되는 쇠로 만든 원통형 우량측정 기구를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보다 앞서 같은 해 4월 29일 실록의 기사에 “......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간 푼수를 땅을 파고 보았었다.

그러나 정확하게 비가 온 푼수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고인 푼수를 실험하였다. ......”란 내용이 들어있다.

측우기 발명의 아이디어가 세자로부터 나왔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 실험결과를 바탕으로 서운관에서 시제품을 제작하여 호조에 보내 앞서의 건의가 올라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해 5월 8일 호조에서 다시 우량을 측정하는 건(測雨事件)에 대하여 건의하는데, 요약하면, “쇠를 주조하여 [빗물을 받는] 그릇을 만들어 측우기라 부르고, 높이는 1척5촌, 지름은 7촌, 서운관에 석대를 놓고 그 위에 측우기를 안치한다.

비가 그친 다음에 관원이 주척(周尺-세종조 1척은 20.7cm)으로 괸 물의 깊이를 잰다. 비 오고 갠 일시, 수심의 척‧촌‧분수를 상세히 기록하여 즉시 보고하고 기록해 둔다......”라고 하여 측우기의 실용과 강우량 보고를 제도화 하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측우기의 크기는 시제품보다 약간 작아졌고, 주척으로 수심을 재는 측우법이 확정되었다. 실험을 거쳐 높이 2척, 지름 8촌의 철제(청동제) 시제품이 만들어지고, 시제품은 실용화 연구 단계에서 크기가 줄어들었다. 이로서 수우기, 자, 받침대로 구성된 측우기가 발명되어 실용화 되었다.

측우기 사용으로 종래 감각적인 강우량 보고제도 제도가 척(尺)‧촌(寸)‧분(分)을 단위로 10진법을 써서 측정하는 정량적인 측우제도로 혁신되었다.(종래의 전보우택 제도가 폐지된 것은 아니다) 세계 기상학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 한양에서 일어난 것이다.

4 영조의 측우기 복원

조선 초기와 중기의 전란을 겪으면서 유실된 측우기와 측우제도는 영조 46년(1770) 5월에 복원되어 구한말까지 지속되었다. 이보다 앞서 영조 16년(1740)에는 세종조의 포백척(布帛尺) 유물을 바탕으로 표준 척도기가 새로 제작되었다.

이것이 ‘경신신제척(庚申新製尺)’이다.『실록』을 근거하여 수우기의 크기는 세종 조의 것과 같게 청동재질로 만들었다. 수심을 재는 자는 빗물 받는 그릇보다 길어야 잡고 측정하기에 편리하므로 주척 2척으로 만들었다[대나무로 만들었을 것이다]. 석대는 포백척(49.2cm)으로 높이 1척, 남북의 너비 8촌, 돌로 대를 만들고, 그 위에 깊이 1촌 되게 둥근 구멍을 파고 측우기를 안치하였다.

아래 그림에 보이는 영영(嶺營)측우대에 새겨진 제작일이 “乾隆庚寅五月 造”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측우기는 [영조실록]46년 5월 1일의 기사와 상통된다. 복원 후 첫 번째 측우는 영조 46년 5월 13일 “밤 2경부터 해 뜰 때까지 비가 내렸는데, 측우기의 수심은 2촌(약 4.14cm)이었다”고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영조는 실록에 적힌 대로 측우기를 석대 위에 설치한 것은 “하늘을 공경하는 성왕의 뜻(欽敬之聖意)”이라 여겼다.『문헌비고』에 등재했음은 물론 영조의 일대기(行狀)에도 실었다.

영영(嶺營)선화당(宣化堂) 측우기 사진. 일본인 기상학자 和田雄治가 인천측후소 뜰에서 촬영한 것임. 측우대 앞 뒷면에 ‘測雨臺’라 석각되어 있으며, 앞면에 ‘乾隆庚寅五月 造’(건륭경인5월 조)라고 새겨 1770년 5월에 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현재 받침대(가로 37, 세로 37, 높이 46, 상부에 지름 16, 깊이 4.3cm의 구멍이 파여 있다.)만 남아있다.(보물 842호 대구 선화당 측우대)(기상청 소장)

5 다시 측우기란 어떤 의미인가?

금영측우기. 헌종 3년(1837)에 제작된 것으로 이 측우기를 이용하여 기록한 18년간의 측우기록이 [각사등록(各司謄錄)]'충청도편'에 남아있다. 和田雄治가 일본으로 가져 간 것을 1971년 반환 받은 것이다.(보물 561호). 둘째 단 원통에 “錦營 測雨器 高一尺五寸 徑七寸 道光丁酉製 重十一斤”이라 새겨있다. 높이 1척5촌(약 31cm), 지름 7촌(약 14.5cm), 헌종 3년(1837) 청나라 도광(宣宗)17년 제작, 무게 11근(6.2kg)임을 알게 해준다. 맨 아랫단 바깥 바닥에 “入番通引 及唱 次知 使令”이라 새겨 감영의 근무자들이 당번으로 관측하였음을 알게 해준다. 통 안에 괸 물의 깊이를 재기에 편리하도록 3단으로 포개서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和田雄治는 물의 깊이를 재는 주척 1척이 20.7cm라는 기록을 남겼지만 자는 유실되었다.

측우기는 발명-개발-법제-유실-복원의 역사를 간직한 과학문화재이다. 이것은 우량측정 말고도 또 다른 용도로도 쓰였다. 현재까지 역사, 천문학, 농업과 기상학사 방면에서 이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많이 이루어졌으나 당시의 상황에서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알아보려는 실증적인 조사와 연구는 보기 드물다.

정인지(鄭麟趾)는 <세종 영릉신도비문> 가운데 과학기술 업적을 나열하면서 ‘측우기’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라도 과학,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적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 발행일2012. 10.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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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화재재단 한국문화재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문화재의 보호 · 보존 · 보급 및 활용과 전통생활문화의 계발을 위하여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http://blog.naver.com/fpcp2010

  • 남문현 자격루 연구회 이사장

    연세대학교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제어공학과 생체공학으로 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UC버클리에서 박사 후 과정을 이수하고 초빙교수를 지냈다. 1976년부터 건국대학교 전기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그동안 상허기념도서관장과 박물관장을 역임하였다. <한국의 물시계>로 1996년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 과학기술도서상 저술상(과학기술처)을 받았으며, 1999년에 사단법인 한국산업기술사학회를 창립하여 회장을 역임하였다. 미국 전기전자학회 역사위원, 산업자원부의 산업기술개발 및 기술기반 조성사업 평가위원과 과학기술부의 국립과학관 추진위원회 전시전문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문화재위원을 역임하였다. 현재 월간 문화재(한국문화재재단 발행) 고정 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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