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정] 미션 마치고 떠나는 김판곤 위원장 "괜찮은 축구 행정가의 표준을 보여주고 싶었다"

입력2022.02.12. 오전 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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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정 기자 = 2017년 12월 대한축구협회는 김판곤 전 홍콩 국가대표팀 감독을 신설된 국가대표감독선임위원회 위원장(부회장 겸임)에 선임했다. 당시 축구협회는 월드컵 최종예선에서의 우여곡절과 뒤따른 여러 이슈로 '적폐집단'으로 몰린 상태였다. 김판곤 위원장, 그리고 한달 앞서 전무이사로 축구협회에 입성한 홍명보 현 울산현대 감독 모두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의심 속에 변화와 발전을 도모해야 했다. 

러시아월드컵 전까지 김판곤 위원장은 김학범 감독을 23세 이하 대표팀의 사령탑에 선임한 것 외에는 정중동의 모습을 보였다. 협회 내 기술전략 분야를 총괄하며 시스템을 수정했고, 목적성이 분명한 여러 소위원회를 구성해 전문성을 강화했지만 좀처럼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 

김판곤이라는 행정가의 능력이 처음 주목받은 것은 러시아월드컵 이후 파울루 벤투 남자 A대표팀 감독을 선임할 때였다. 당초 목표로 했던 1차 후보군의 감독 선임은 난항에 부딪혔지만, 빠르게 플랜B로 전환했다. 가장 눈길을 모은 것은 벤투 감독 선임을 발표할 당시의 브리핑과 질의응답이었다. 설득력 있는 선임 배경 설명과 질의에 정면 돌파하는 답변으로 중국 슈퍼리그에서의 실패라는, 벤투 감독의 스크래치에만 주목하던 이들의 시선과 생각을 크게 확장시켰다. 

이후에도 여자 A대표팀의 콜린 벨 감독 선임으로 업계에 다시 한번 신선한 활력을 줬다. 그가 선임한 감독들은 모두 계약 기간을 무사히 마쳤거나 수행 중이며, 그 기간 동안 주어진 목표치를 상당 부분 달성했다. 작은 실수와 실패는 있었지만, 그 파도를 이겨내고 목적지에 도달한 데는 각 지도자의 능력만큼 김판곤 위원장과 산하 위원회의 뚝심 있는 역할과 냉정한 판단, 분석도 큰 역할을 했다.

김판곤 위원장은 벤투호의 월드컵 본선행 확정과 함께 4년 2개월여의 대한축구협회 행정가 임무를 마무리했다. 최종예선 일정을 소화하고 국내로 돌아와 자가격리를 하는 동안에는 콜린 벨 감독이 아시안컵 준우승이라는 역대 최고의 성적과 함께 2023년 호주 여자월드컵 출전권을 거머쥐었다. 새로운 도전을 택하고 축구협회를 떠나는 그의 발걸음이 조금 더 가벼워진 이유다. 

미션임파서블로 여겨졌던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김판곤 위원장과 1시간이 넘는 긴 인터뷰를 가질 수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한 제언도 숨기지 않았다. 김판곤 위원장은 11일 오전 말레이시아로 떠났다. 앞으로는 말레이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임무를 책임진다.

- 4년 조금 넘는 축구협회 행정가 업무를 마쳤습니다. 그 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남녀 A대표팀이 마지막에 해준 것 같습니다. 떠나는 시점의 소감이 궁금합니다.
이 자리의 가장 큰 임무는 각급 대표팀의 성과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특히 남자 A대표팀의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 달성과 카타르월드컵 진출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아시아 무대를 통과하는 건 늘 힘든 과제였고, 그로 인해 저 역시 위축된 순간이 있었죠. 벤투호가 최종예선에 들어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본선 진출을 확정함에 따라 그 동안 짊어진 짐을 다 내려놓고 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럴 미션을 해낼 수 있도록 정몽규 회장께서 요소요소마다 큰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좋은 판단과 결단을 내려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벤투 감독과 코치들이 전문성을 발휘하는 것을 넘어서서 일에 대한 정직함, 성실함을 잘 보여줘서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벨 감독도 사상 처음 아시안컵 결승까지 팀을 올려줘서 고맙습니다. 트로피를 들고 올 거라고 믿었는데 마지막이 아쉬움으로 남네요. 하지만 우리 여자 A대표팀을 또 다른 레벨로 올려준 것은 분명합니다. 누구 한 사람을 잘 뽑아서 이렇게 된 것만은 아닙니다. 대한축구협회의 훌륭한 지원에 사람의 전문성이 더해져 가능했던 성과입니다. 위원장으로서 좋은 기억을 갖고 나갈 수 있어 감사합니다.

- 벤투 감독은 이별에 대해서 어떤 얘기를 하던가요? 가장 믿는 사람이자, 가장 많이 싸운 사람이 결국 김판곤 위원장 아니겠습니까?
발표 전에 미리 말하기는 곤란했죠. A대표팀 훈련캠프가 진행되는 중에 공식 발표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긴 메시지를 통해 제 상황과 입장을 설명했습니다. 벤투 감독은 누구 한 사람을 의지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지금 A대표팀이 시스템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고, 좋은 선수로 구성했기 때문에 어떤 혼란이나 위기가 쉽게 올 거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평소처럼 쿨하게 새로운 도전에 행운이 있길 빈다는 얘길 하더군요.(웃음) 마지막 시리아전이 끝나고 다시 한번 축하를 받았습니다. 저 역시 쿨하게 본선에 가서 국민들이 기대하는 좋은 결과로 기쁨을 주길 바란다고 답변했습니다. 벤투 감독 성향이 그렇습니다. 깊은 정을 주는 타입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성향 때문에 일을 하는데 있어서 누구 하나로 인한 흔들림이 없습니다. 새로운 위원장이 오면 또 잘 할 거라 생각합니다. 



- 여자 A대표팀은 정말 잘 했는데 결승전 후반전이 아쉬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 감독의 재계약을 할 필요가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은 듯 합니다. (※ 인터뷰 당일 축구협회가 재계약을 발표했다)
선임 후 과정을 보면 벨 감독의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선임된 지 얼마 안 된 짦은 기간 동안 팀의 플레이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며 동아시안컵에서 준우승을 시켰습니다. 올림픽 예선을 치르는 과정에서도 선수들에게 목적을 인지시키고, 훈련 내용의 질을 우수하게 유지했습니다. 한 대회가 끝나고 나서 리포트를 위원회에 설명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죠. 그게 자연스럽게 결과로 나온 게 아닌가 합니다. 벨 감독은 아주 뜨거운, 열정적인 지도자입니다. 결승전 마지막에 너무 아쉬워 하는 모습을 모두가 보셔서 알 겁니다. 저는 경기 후 우리가 기대한 결과를 냈으니 스트레스 받지 말고 즐겼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벨 감독이 한국 축구에 더 공헌해줬으면 하는 기대가 큽니다.

- 2017년 겨울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의 얘기로 돌아가보죠. 해외에서 지도자로 좋은 평가와 성과를 쌓던 중 축구협회의 오퍼를 받고 행정가로 선회했습니다. 결정을 내린 가장 중요한 계기는 뭐였나요?
처음엔 가족들이 상당히 반대를 했습니다. 홍콩 대표팀과도 계속 갈 수 있는 상황이었죠. 한국으로 가면 가족이 저를 위해 희생해야 하고,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양보할 부분이 있었습니다. 도전의 갈림길이었습니다. 사실 행정 업무의 포지션을 대한축구협회가 제안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오퍼를 주신 분이 우리 축구인의 시대에서 상당히 존경받는 홍명보 전무였다는 점이 끌렸습니다. 저하고는 인연도 없는데 제안을 하며 좋은 평가와 얘기를 해준 것에 너무 고무돼 한국행으로 결정을 내렸던 거죠. 밖에서 한국 축구를 바라볼 때 아쉬웠던 여러 부분을 '내가 가서 바꿔보고 싶다, 바꿀 수 있을 거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습니다. 도전해볼만 가치가 있고, 좋은 성과로 사례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뭔가를 바꿀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제게 기대를 하는 분이 존경하던 시대의 리더였다는 점. 그거 때문에 결정했습니다. 

- 김학범 감독 선임으로 첫 미션을 수행했습니다. 현재 호평 받는 감독 선임 프로세스가 처음 적용됐던 케이스입니다. 당시 커리어 저점(※2017년 광주FC에 중도 부임해 강등 경험)에 있던 50대 후반의 지도자였죠. 근거가 확실치 않았다면 많은 반대에 직면할 수 있었습니다. 
첫 선임인 만큼 그 과정부터 제가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김학범 감독은 사전정지작업부터 상당히 공을 들였습니다. 당시 김학범 감독 외의 후보들도 각각의 축구 성향을 알아내기 위해 정말 많은 경기를 보고, 분석하는 일을 소위원회 위원들과 했죠. 당시 김학범 감독은 광주에서 강등을 당한 게 마지막 커리어였던 건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넓고, 길게 그 분이 감독으로서 맡은 팀의 경기를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볼수록 경기를 지배하고, 능동적인 축구를 하고, 전방에서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는 수비를 확인할 수 있었죠. 상대 실수를 유발하는 방법을 명확하게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대표팀이 지속적으로 가져가야 할 철학과 맞는 지도자고, 저런 방법론이 23세 이하 대표팀에서 발휘된다면 퍼포먼스는 다르게 나올 수 있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름값과 이미지만 갖고는 김학범 감독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보여지는 이미지의 호오 때문에 선임 과정에서 반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죠. 인터뷰를 통해 제가 확인한 것을 기반으로 실제로는 이렇다는 걸 내부에 공유하며 많이 설득했습니다. 그런 사전 작업을 김학범 감독 외의 다른 후보에게도 적용해서 진행하니까 자신감이 생겼고, 언론과 팬들을 상대로 설명을 드릴 때도 명확한 근거로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첫 선임이다 보니 협회에서 힘을 실어주신 것도 있었습니다. 사실 그건 다 김학범 감독이 이후 결과를 내서 빛이 난 겁니다.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 과정은 다 허망해질 뿐입니다. 

- 김학범 감독과도 근 4년 가까이 함께 했습니다. 아시안게임, U-23 챔피언십 다 우승을 했는데 마지막 올림픽이라는 미션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김판곤 위원장이 도쿄까지 함께 했다면 좀 더 높은 위치로 갔을까요?
성적이란 건 여러 변수가 겹칩니다. 그 부분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제가 거길 갔다고 해서 메달을 딸 거라는 얘긴 함부로 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상식적으로 볼 필요는 있겠습니다. 올림픽을 목표로 해서 감독을 선임하고 팀을 운영하고 긴 시간 준비를 해 왔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꽃을 피우는지 확인하는 무대가 지난 7월이었죠. 메달 획득을 기대하고, 그걸 위해 4년을 함께 해 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제가 티비 중계로만 먼발치서 보고 있었다는 부분은 조금 후회가 남네요. 성과를 내기 위해선 감독은 지원받을 수 있는 지원을 최대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있어야 할 사람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 부분을 반면교사했으면 좋겠습니다. 

- 벤투 감독 선임 과정은 후일 얘기했다시피 상당히 힘든 과정이었고, 스트레스도 많았습니다. 혹시 그 당시 못하다한 선임 뒷이야기가 있을까요?
솔직히 제가 처음 목표로 삼았던 후보의 감독님들은 우리 팬들이 좋아할만한 커리어와 지명도가 있었습니다. 그런 여론의 바람을 알았고, 미팅을 위한 스케줄을 잡으면서 한번 스크래치는 났어도 정말 능력 있고 팬들이 좋아할 이름값을 지닌 분들을 데려오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어떤 축구를 해 왔는가, 지금은 어떤 축구를 하고 있는가 면밀히 봤습니다. 그러나 가장 힘든 건 그 분들이 다 안 됐다는 점입니다. 하나, 둘 리스트에서 사라지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웃음) 한 분은 거의 다 됐는데 막판에 뒤집었고, 다른 한 분은 우리가 조건이 못 미치니까 아예 만나주지도 않더군요. 그 1차 과정이 다 실패로 끝나니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벤투 감독이 지금 잘 했기 때문에 다행이지만, 만일 실패했다면 그 당시 상황이 계속 저를 괴롭혔겠죠. 시간이 부족했고, 압박도 많았습니다. 한, 두번 미팅해서는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 벤투 감독도 결국은 한국에 와서야 어떤 캐릭터인지를 우리가 파악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제가 다음 감독 선임까지 갔다면 그 시간이 좋은 도움이 됐을 겁니다. 굳이 직전에 가는 게 아니라 사전에 교감을 하고, 그 대상에 대한 데이터가 충분히 쌓여서 미팅을 하고 협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겐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한 건 확실했지요. 하지만 다음 감독 선임 때도 후임자가 시간에 쫓기는 상황이 되면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 A대표팀 감독은 한 나라 축구 시스템의 만인지상같은 존재다 보니 국민들이 일희일비 할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죠. 그래도 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월드컵을 온전히 한 명의 사령탑으로 준비하고, 치를 수 있게 됐습니다. 
대표팀 감독은 상당히 효율적인 준비 과정이 필요합니다. 일타강사처럼 딱딱 해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대표팀은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은 짧고, 국민들의 기대는 크죠. 그래서 독이 든 성배입니다. 정몽규 회장님의 의지가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만큼은 한 감독으로 월드컵을 치러야 한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주셨습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 과거 월드컵처럼 과정에서 사령탑이 바뀌고, 본선에서 시행착오를 겪는 건 안 된다고 봤습니다. 이번처럼 어떤 팀을 상대해도 굴곡 심하지 않은 우리가 바라는 안정적인 폼이 나오는 팀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아시안컵 때 의구심이 있었고, 월드컵 2차 예선 북한과 레바논전 무승부로 그게 더 커졌습니다. 하지만 동아시안컵(EAFF E-1컵)에서 국내 선수로만 일본을 압도하며 우승하는 걸 보며 의구심이 어느 정도 해소됐죠. 그 이후에도 언론과 팬들은 의심을 가졌지만, 전문가의 입장에서는 코로나로 인해 1년 가까이 대표팀이 서로 만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2020년 딱 두 차례 평가전을 했는데 그때 하필 코로나 확진자가 나와 난리가 났습니다. 그 이전에 준비한 것이 연동도 안 되는 상태에서, 작년 3월 일본으로 국내 선수 위주로 원정을 갔던 것입니다. 그때의 패배는 안정적이고 좋은 경기력을 보일만한 환경이 아니라고 이해를 했습니다. 6월과 9월 사이에도 주축 선수들이 프리시즌이다 보니 최종예선 첫 경기에서 폼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0월, 11월은 완전히 달랐죠. 모든 선수가 리그에서 계속 경기를 뛰니 경기 감각이 완전히 올라왔고 우리의 지속적인 사이클에서 좋은 폼이 나왔습니다. 시즌 사이클의 문제로 인해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지 우리 코칭스태프의 역량 문제는 아니라는 결론이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벤투 감독이 준비를 잘 해줘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반대로 그건 국내 감독의 약점이기도 하죠. 언론과 여론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외국인 감독은 본인 신념대로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A대표팀이 흔들릴 때 위원회가 조언과 권고도 하지만, 벤투 감독 본인도 이성적으로 설명을 잘 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를 차분하게 설명합니다. 그렇게 서로 설득을 하는 과정이 계속됐습니다. 벤투 감독은 제게 항상 얘기했습니다. "나는 확신이 있다. 우리 코칭스태프를 믿는다. 그 믿음이 있어서 전진한다." 그게 흔들림 없이 잘 나갔습니다. 정몽규 회장께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벤투 감독에게 힘을 실어줬습니다. 그래서 좋은 결과, 그리고 상당히 의미 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한국 축구사상 한 번도 한 명의 감독으로 월드컵을 다 치르지 못했었죠. 이제 카타르에서 꽃을 피우는 과제만이 남았으니 축구협회와 벤투 감독이 잘 협력해 그것마저 해 내길 바랍니다.

- 공동의 목표를 위해 일한 파트너로서 벤투 감독은 어떤 사람입니까?
두 가지 얘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 일적으로는 상당히 직업 정신이 투철한 사람입니다. 성실하고, 정직합니다. 일적으로는 자기의 영역을 누구에게 침범당하지 않으려는 강력한 자기 보호 본능이 있습니다. 그런 고집과 소신으로 살아왔고 그것 때문에 경질 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대한축구협회는 그런 캐릭터를 인정해줘서 하모니가 이뤄졌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 톱 레벨의 지도자는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감독으로서의 레벨은 스탠다드입니다. 달리 말하면 일을 제대로 하려면 최소한 벤투 감독처럼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선수들이 경기를 치러내고, 전략적인 소통을 하는 것이 됩니다. 그 기본을 충실히 해 준 지도자입니다. 둘째를 얘기하면, 대신 인간적으로는 진짜 일 외의 부분을 알기 어렵습니다. 굳이 가까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3년 넘게 일적으로만 대화했습니다. 차가운 면도 있었고, 단호하게 부정할 때는 놀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는 정(情)으로 대면하는 게 아닙니다. 일을 잘 해야 하고, 그걸 해 내면 존중받습니다. 조금 아쉬운 점은, A대표팀 감독인만큼 한국 축구의 빅 브라더는 되지 못한 부분입니다. 제가 부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왕이면 K리그도 좀 챙겨주고, 감독들과 소통도 하며 영감을 주면 좋겠다고. 그러니 본인이 "그거까지 신경쓰긴 어려우니 내 일에만 집중하겠다"고 솔직하게 얘기하더군요. 사실 그것까지 해줬으면 금상첨화였지만, 우선순위는 본업이 맞습니다. 본업을 못하면서 지도자 교육 챙기고, 유소년 챙기고, K리그 챙기는 건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벤투 감독에게는 어떤 불만도 없습니다. 

- 확고한 철학으로 팀의 컨셉을 만들고, 양질의 훈련 프로그램으로 선수들을 설득시키고, 기자회견 등의 코멘트를 통한 마인드셋으로 전체의 동기부여를 높이는 일련의 과정이 훌륭했던 감독입니다. 만일 벤투 감독이 떠난다면 다시 이런 지도자를 쉽게 찾을 수 있을까요?
벤투 감독보다 나은 월드 클래스 감독은 세계에 많습니다. 그 감독들도 이 정도 역량은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독이 한국에 올 수 있느냐가 고민이죠. 유럽이라는 세계 축구의 본무대에서 먼 아시아까지 와서 4년을 할 의지를 뭘로 설득할 것인가가 숙제입니다. 대표팀 감독의 중요한 능력이 결단력, 그리고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입니다. 그런 사람을 찾아내는 작업은 쉽지 않겠지만, 잘 하면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고 봅니다. 축구 시장의 흐름은 빠릅니다. 지도자가 짧은 시간 큰 성공을 거두지만 금세 실패합니다. 좌절하고 스크래치 나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런 사람 중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는 이도 있죠. 잘 찾으면 됩니다. 아주 특별한 사람을 찾기보다 대표팀 감독이 지녀야 할 역량을 고루 갖춘 평균 이상의 인물을 찾으면 됩니다. 과거 우리가 접촉했던 많은 감독들이 이 레벨 이상이었습니다. 그 이후 시간이 흘렀고, 이번 월드컵을 치르면서 또 좋은 지도자가 도전 의지를 보일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축구 감독의 본업입니다. 그게 잘 돼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한국 축구 구조상 대표팀이 흔들리면 전체가 흔들립니다. 본업을 잘 할 수 있는 지도자를 데려오는 것, 그걸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 콜린 벨 감독은 그 전 후보자의 선임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고, 그걸 교훈 삼아 빠르게 찾은 인물입니다. 역시 여자 축구 전체에 좋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 여자 축구에 새로운 변화, 획기적인 전환점이 필요했던 시기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욕구를 수용할 만한 인물을 모셔올 수 있었죠. 결국 벨 감독도 같은 과정을 거쳤습니다. 우리의 기준을 설정하고, 여러가지를 체크하고, 만나서 대화를 나누며 평가하는 프로세스의 결과물입니다. 벨 감독은 프랑크푸르트라는 최강 수준이 아닌 팀을 여자 축구 유럽 챔피언으로 이끌었습니다. 아일랜드 대표팀 감독으로서 덴마크와 비긴 경기도 주목했습니다. 만나서 얘기할 때는 현대 축구에 대한 지식이 상당했죠. 대한축구협회의 철학을 얘기할 때 그 반응이 빠르고 정확했습니다. 대한축구협회의 철학과 환경 속에서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우리 여자 A대표팀이 평가전을 할 때 미국으로 초대했고, 그때 대화를 나눌 때 수준 높은 지도자라고 확신했습니다. 태도도 좋았습니다. 지금도 더 잘 하고 싶어 하고, 많은 것을 요구하는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한국 축구에 대한 사랑도 외국인이지만 매우 깊습니다. 훈련 때 보여주는 능력과 방법 모두 신선했고요. 선수들 반응이 좋았습니다. 물론 외국인 감독이니 한국 문화와는 다른 성향, 인식으로 인해 피곤한 부분도 있을 수 있죠. 하지만 대한축구협회는 그걸 포용하려고 하는 조직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앞으로 여자축구는 유럽과 아프리카가 점점 강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경쟁력이 더 높아져야 합니다. 이번처럼 호주를 잡고, 일본과 비기고, 중국을 상대로 2골 차로 앞서갈 정도로 수준이 올라왔다면 가능성이 높죠. 앞으로 벨 감독 체제라면 더 잘할 것이라 기대합니다. 

- 개인적으로는 김판곤 위원장을 영웅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해외의 기준으로 본다면 일 잘 하는 보통의 행정가,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김판곤 위원장 같이 일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국 축구 행정과 대표팀도 더 나아질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고맙습니다. 그 의견에 절대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1998년에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20년간 지도자를 하고 이 자리로 왔습니다. 과거 한국에서 행정하고, 결정권을 지닌 분들로부터 평가를 받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분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해주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벤투 감독을 스탠다드라고 표현했는데, 저도 행정가로서 스탠다드 정도의 일을 한 사람입니다. 이 정도는 해야 일 좀 한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축구 행정가의 표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부분을 보여주기 위해 지난 4년 간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특별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진 않습니다. 대신 노력한 것을 인정받는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했던 일과 수립한 프로세스가 K리그에도 적용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사실 이 정도는 특별한 일도 아닙니다. 팀이 좋은 방향과 위치로 가려고 한다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감독을 뽑는다면 이 정도 노력과 과정은 기본으로 이뤄져야 맞습니다. 특별한 감독을 뽑지는 않더라도 그 프로세스를 거친다면 기본에 근거한 인물을 택하는 게 가능해집니다. 실수나 실패할 확률이 준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팀은 리스크 매니지먼트를 해야 하는데, 그 위험을 줄이는 게 사전정지작업과 프로세스입니다. 그 과정이 정직하고, 투명하고, 객관적이고, 공정해도 축구는 결과를 100% 장담할 순 없다. 하지만 실패할 확률은 훨씬 줄일 수 있겠죠. 

- 4년 간 긍정적인 변화와 결과물을 남겨두고 가지만, 이게 황금거위의 마지막 알이 아니라 한국 축구를 계속 발전시키는 계기, 즉 씨앗이 돼야 하겠죠?
이 부분은 한국 축구의 향후 발전을 위해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해 마지막으로 제언을 하고 가려고 합니다. 기술위원장 혹은 전력강화위원장은 테크니컬 디렉터로서 기술, 전략 분야 전반의 결정권자가 돼야 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감독 선발에만 가두는 건 맞지 않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사람을 잘 뽑는 것이지만, 그것도 결국은 한 파트입니다. 그 다음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가 진짜 중요합니다. 철학을 기준으로 대표팀 안에서 벌어지는 훈련이나 경기를 지속적으로 체크하고 리포트를 받고, 감독과 소통해야 합니다. 여기 와서 가장 공을 들인 건, 국가대표 선수의 성장 구조 정립이었습니다. 13세와 15세의 골든에이지 프로그램에서 올라온 그룹, 16세, 19세, 23세, 그리고 A대표팀까지 가는 각 연령대의 과정을 잘 정립해야 합니다. 가령 16세 대표팀은 A대표팀처럼 공을 차면 안 되죠. 그 나이대는 한 번 더 시도하고,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해야 합니다. 연령대가 올라가면서 세련미가 더해져야 합니다. 그걸 매니지먼트 해야 한다. 우리가 키운 좋은 선수들이 경험을 통해 계속 성장하며 A대표팀에 왔을 때 상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하는 팀의 일원이 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총괄하는 감독이 그 역할을 잘 수행하는지 지켜보고, 치열하게 토론해야 하는 게 테크니컬 디렉터의 정확한 직업입니다. 그 요구를 듣지 못하면 감독으로부터 그걸 끌어내야 합니다. 만일 감독이 그 능력이 안 된다면 새로운 사람이 필요하겠죠. 그 매니지먼트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선수를 선발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합니다. 그런 장기적인 세대를 준비하는 시스템이 중요했고, 저의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계획을 갖고, 지도자들이 수행하면, 가서 모니터링하고, 그걸 리포트하고 피드백하고, 그걸 기반으로 다시 계획을 수정하는 사이클 매니지먼트가 중요합니다. 그런 높은 수준이 위원장에게 요구됩니다. 위원장이 감독을 선임하고, 선수를 관찰하는 건 매우 기초적인 부분입니다. 그걸 위해서는 임무를 위한 권한이 주어져야 하고, 그 영역에 대한 존중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모든 연령의 대표팀이 안정적으로 발전해서 A대표팀이 지속적으로 흔들림 없이 성과를 냅니다. 솔직히 저는 감독을 잘 뽑은 것보다 이런 보이지 않는 부분을 바꾼 것에 더 자부심을 갖고 떠납니다. 벤투 감독에게도 리포트를 요구했습니다. 처음에는 시큰둥했죠. 그런데 그 리포트 과정을 통해 자신들이 좋아진 것을 느꼈나 봅니다. 그 뒤에는 벤투 감독과 코치들이 그걸 즐겼습니다. 하나의 대회, 예선과 같은 사이클이 끝나면 리포트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니까 문제점을 찾고 수정을 해서 자기 정리를 통한 발전을 하게 된 겁니다. 지금은 벤투 감독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콜린 벨, 김학범 감독 역시 잘했습니다. 그게 됐으니까 각급 대표팀이 잘 된 겁니다. 감독 1명이 모든 걸 다 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위원장도 영감을 주고 방향을 제시하고, 중심을 잡아줘야 합니다. 한국 축구가 어떤 방식으로 이길까를 고민하고, 각급 대표팀의 문제를 찾고 수정하도록 조정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려면 권한이 필요합니다. 권한이 없는데 말을 들을 리 없습니다. 이 자리는 정말 중요합니다. 그 중요성만큼의 권한이 주어지길 바랍니다. 

- 향후에도 다시 돌아와서 행정가로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4년 간 행정가로서는 평가를 받을 기회를 받았고, 아쉬움은 있지만 잘한 부분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온다면 그때는 우선 지도자로 평가받는 기회를 얻고 싶습니다. 홍콩에 있을 때 감독으로서의 능력과 자질이 있다고 자신했고, 그렇게 평가를 받아 클럽과 대표팀에서 감독을 했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대표팀 감독을 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나름 새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감독으로서 인연이 잘 안 맞았습니다. K리그 무대에서도 한번 역량을 평가받고 싶습니다. 그 이후에는 행정에 집중해서 더 노련해진 모습을 보여드리겠다는 계획도 있습니다. 힘을 갖고 결정할 수 있는 자리라면 행정가도 다시 도전해보겠습니다.

사진= 대한축구협회 제공
서호정 기자 goalgoalso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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