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 실현'은 꿈에서만 가능한걸까요?

입력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기고]

[미디어오늘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일, 그 참을 수 없는 애증의 대상에 대하여

나는 6년 차 직장러이다. 내 앞에 앉은 동료는 회사의 권고로 다음 주 퇴사를 한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한 편집자는 회사 몰래 독립출판을 했다는 이유로 무기한 연봉 동결을 선고(?)받고 결국 회사를 관뒀다. 사내의 거의 모든 팀장들은 거의 매일 야근을 하고 거의 모든 주말에 일거리를 싸들고 집에 간다. 시대가 변하고 일의 패러다임이 변해 기회가 분명 늘어나고 있다고 말들은 하는데 정작 내 주변의 '일'의 정의는 여전히 굳건히 한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기분 좋게 회사에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며 사무실을 박차고 나갈 일은 매우 희박하다. 현세에는 힘들고 다음 생에서도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사장님 몰래 업무시간에 구인 사이트에 들락거리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내 퇴직금의 액수를 가늠해보고, 동료의 퇴사 소식을 부러움도 안도감도 아닌 애매한 감정으로 흘겨보고, 동창들은 어떻게 사는지 염탐하듯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훑어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열심히 일한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너무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이 겉모습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퇴근 시각이 넘은 지 이미 오래지만 우리가 여전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눈치 게임을 하는 건 회사에 대한 애사심이 그만큼 높아서가 아니다. '이번 주말 시간 되는 사람 등산이나 할까?'라는 부장님의 허무맹랑한 말씀에 단호하고 진지하게 정색을 날리지 못하는 건 상사에 대한 존경심이 넘쳐나서가 아니다. 평일에 마치지 못한 업무를 싸매고 자발적 주말 특근을 감행하는 건 일에 대한 애정과 애착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이 참을 수 없이 애매한 애증의 대상인 일과 우리는 언젠가는 화해할 수 있을까? 일의 미래에는 어떤 변화와 기회 또는 위기가 놓여 있을까? 그리고 가장 절실한 당사자인 우리 2030세대들은 그러한 변화에 어떻게 대처하고 맞서야 할까? 지난 25일 토요일 낮 2시. 바꿈세상을바꾸는꿈과 LAB2050이 명동 커뮤니티하우스 마실에서 공동 주최한 '2030 일의 미래를 상상하다' 공론장에서는 '일의미래'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 지난 5월25일 오후 을지로입구역 인근에 위치한 커뮤니티 마실에서 LAB2050과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이 함께 주관한 '2030 일의 미래를 상상하다' 공론장이 열렸다. 사진=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제공
▲ 지난 5월25일 오후 을지로입구역 인근에 위치한 커뮤니티 마실에서 LAB2050과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이 함께 주관한 '2030 일의 미래를 상상하다' 공론장이 열렸다. 사진=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제공
2030에게 6시 이후 삶은 일과 달라

2015~2016년 "살고 싶어서 퇴사합니다." 라는 기획 기사를 작성한 송지혜 시사인 기자는 과거와 달리 요즘은 일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이 곧 성공이자 행복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송 기자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 한 대기업에 취업한 청년들이 입사 1~3년 사이에 도망치듯 회사를 나오고 있어요. 그들은 처음에는 자신을 '대기업 직원'이라고 간편히 설명할 수 있는 명함과 많은 월급에 큰 만족감을 느끼지만 이는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죠."

이어 송 기자는 "입사 후 3년 만에 퇴사한 거의 모든 신입 사원들의 공통된 종착지는 퇴근 후 내 삶의 보장이었어요. 그들은 그토록 힘겹게 들어간 대기업을 제 발로 나오며 공기업이나 공무원의 꿈을 꾸는 이유인 셈이죠." 송 기자의 말에 따르면 2030세대의 일은 삶과 분리되어 자신만의 워라밸을 구축하고 모든 스트레스는 일터에서 씻어내는 것이었다.

▲ 지난 5월25일 오후 을지로입구역 인근에 위치한 커뮤니티 마실에서 LAB2050과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이 함께 주관한 '2030 일의 미래를 상상하다' 공론장이 열렸다. 사진=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제공
청년, 여성, 비정규직에 중심에 있는 2030세대

한국여성노동자회 활동가 레나는 자신의 알바 경험담을 근거로 삼아 '청년, 여성, 비정규직'에 대한 기성 사회의 편협한 시각과 내재화된 배제의 실상을 고발했다. 레나는 "아파트 소독 알바를 했어요. 하루 300~500세대 가정에 소독약을 뿌리러 다니며 심각한 성희롱에 노출되거나 안전을 위협받았어요. 젊은 여자가 왜 이런 일 하냐는 말도 많이 들었고 심지어 도둑으로 몰린 적도 있었어요. 그 때마다 만약 내가 여성이 아니었다면? 내가 청년이 아니었다면? 내가 비정규직이 아니었다면? 라며 끊임없이 물어봤어요.

이어 레나는 "2000년대부터 빠르게 확산된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관이 사회의 가장 취약계층인 '청년이자 여성이자 비정규직인' 노동자에게 일터의 모든 위험과 비용을 전가하는 형태로 노골화되었어요. 그리고 그 억압과 차별은 지금도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라며 청년, 여성, 비정규직에게 처해지는 심각한 문제의 원인을 진단했다. 레나는 이러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간편한 방법은 '나의 노동 경험을 타인과 이야기하고 공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직장 내 갑질, 방관하는 당신도 가해자일수 있다

갑질119는 2017년 11월 오픈채팅방을 열었다. 그리고 고작 1년 사이에 무려 2만 2000건의 갑질 신고를 접수했다. 그러나 갑질119의 총괄스탭인 오진호씨는 이토록 수많은 갑질 사례를 보았지만 여전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갑질'인지 헷갈린다고 말했다. 오 스탭은 "직장 내 갑질이 대놓고 이루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오히려 지속적이고 일방적인 괴롭힘, 차별적 대우, 부당한 처우가 조직 안에서 은밀하고 비가시적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더 많아요. 가장 큰 문제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그것을 직장 문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이에요. 직장 내 갑질은 이미 우리 일의 시스템 안에 대단히 정교하게 녹아들어 있는 것 같아요." 라며 문제를 지적했다.

실제 갑질119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직장인 10명 중 4명 이상이 갑질을 경험했으며 대표적으로 '취업정보사이트 채용정보가 실제와 다르다,' 나 '시간 외 수당을 지급 받지 못하거나 일부분만 지급한다.' '휴게공간, 연차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없다.' 등도 갑질 사례로 제시되었다. 더 큰 문제는 불합리한 대응을 받았을 때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참거나 모른 척 했다(41.3%)는 점이다. 그들이 참거나 모르는척 한 이유는 나아질 것 같지 않아서(65.5%)와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아서(34.1%)였다. 이에 대해 오 총괄스탭은 직종별 모임을 강화해 일종의 '대나무숲' 같은 공론장을 활성화하자고 제안했다. 노동자 간 소통과 교류만으로도 갑질의 횡포에 저항할 수 있을 거라는 점을 강조했다.

정상적인 삶이 뭔가요? 그게 가능한가요?

'일의 미래' 공론장에 모인 2030 청년들은 이른바 '정상 이데올로기'에 강한 문제의식을 보였다. 예를 들어 "남자 나이 XX살이면 취업도 하고 장가도 가야지", "여자가 XX살을 넘어 애를 못 낳으면 제대로 된 삶이 아니다" 등의 삶의 프로세스가 정상이고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있다는 인식 자체가 문제라는 점이다.

참가자들은 "사실 2030세대에게 아이를 낳고 집을 장만하는 것 자체가 평범한 흙수저에겐 사실상 불가능한데 '정상'이라는 허울뿐인 환상을 좇아 스스로를 착취하고 비하하는 악순환으로부터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 는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이런. 정상 이데올로기가 일터의 열악한 환경과 부당한 대우는 은폐하고선 문제의 원인을 청년 개인에게 전가하는 기성세대의 그릇된 관념에 명분을 제공한다는 점 역시 지적했다.

또 청년들은 '공동체'라는 단어를 대안으로 특히 많이 언급했다. 일 하는 노동자들이 공동체와 커뮤니티를 만들거나 참여함으로써 동료들과 끊임없이 연결함으로서 즉 자신들의 고충을 소통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비정규직이 일터에서 겪는 다양한 어려움과 차별 대우 등에 대해 공론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커뮤니티 어플'을 개발하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 지난 5월25일 오후 을지로입구역 인근에 위치한 커뮤니티 마실에서 LAB2050과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이 함께 주관한 '2030 일의 미래를 상상하다' 공론장이 열렸다. 사진=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제공
교육이 노동을 담보하지 않아… 노동교육의 필요성

공교육의 변화도 대안으로 나왔다, 현재 우리 사회의 노동을 병들게 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대부분 어린 시절 제도권 교육 안에서 자신도 알게 모르게 체화되고 내재화된다는 것이다.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내근직-파견직, 원청-하청에 대한 무분별하고 무지한 오해가 그것이다. 이러한 노동의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어떤 배경에 의해 탄생했고, 그것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중고등학교 때부터 충실히 교육한다면, 적어도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은 대부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라고 청년들은 전망했다.

또한 노동 인권에 대한 교육을 청소년 때부터 배울 수 있도록 확대하거나,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직업이 있고 일의 모양새가 다채로운지에 대해 고등학교 때부터 배울 수 있도록 제도화하자는 의견도 돋보였다. 특히, 성장과 확장만이 전부가 아닌, 정의로운 노동을 지향하고 실천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그리고 평등한 노동권에 대해 미래사회를 이끌 청소년들에게 충실히 교육할 것을 강조했다.

차별금지, 기본소득 등 법과 제도를 바꿔야

제도적으로는 국회 계류 중이거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 간의 갈등에 의해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다양한 제도권의 법안들의 조속한 처리를 통해 노동 문제를 해결하자는 의견도 많았다. 대표적으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과 억압을 법의 힘으로 제한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청년 계층이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서도 안정적으로 직업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기본소득법'을 강화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더불어, 아직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노동의 다변화에 맞춰, 다양한 근무 형태의 노동을 보호할 수 있는 법안을 신속히 개발해 불법의 사각지대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지적 역시 있었다. 사회의 관심을 얻지 못하고 있는 비정규직 관련 법안의 대대적인 정비에 대한 주문 역시 같은 맥락에서 제기되었다.

이밖에도 매우 다채로운 대안이 제시되었는데, bit.ly/일의대안 링크를 타고 들어가면 총 8개조에서 내놓은 일과 노동의 미래에 대한 대안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한 참가자는 "비록 완전하고 완벽한 답안은 아니었을지라도, 청년 자신의 문제를 청년 자신이 직접 목소리를 모아 대안을 제시하는 과정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문제에 대한 이해와 다양하고 창의적 대안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라고 참가 소감을 밝혔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가 수두룩하고 해결되지 않은 채 표류 중인 난제가 사회적 정의를 가로막고 있다. 특히 일 문제는 청년 의제의 가장 가운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청년이 겪는 일의 문제는 결국 청년이 스스로 나서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의 원인을 지적하고 궁극적으로 그것에 대한 대안들을 도출해 지속적으로 사회에 전달해야 한다. 그래야 바꿀 수 있다.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미디어오늘 바로가기] [미디어오늘 페이스북]
미디어오늘을 지지·격려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Copyright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사회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주요뉴스해당 언론사에서 선정하며 언론사 페이지(아웃링크)로 이동해 볼 수 있습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