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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현대와 5년 재계약을 맺고 남다른 각오로 새 시즌을 준비하는 최철순. 입담의 대가란 소문답게 인터뷰 내내 배꼽 빠지는 웃음을 선사했다.(사진=이영미)>
투지, 헌신, ‘언성 히어로(unseung hero)’를 상징하는 전북 현대의 최철순(31). 소리 없이 강한 남자라는 수식어도 그의 몫이다. 최강희 감독이 믿고 쓰는 수비수이면서 사석에선 최 감독과 ‘맞장’을 뜰 수 있는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
2006년 데뷔 후 2012-2014년 상주상무 시절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전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전북 현대 유니폼 판매 순위 3위라는 걸 연봉 협상 카드로 쓸 줄도 알고, 에이전트 없이 연봉은 물론 FA 계약까지 마무리했다. 체격은 작은 편이지만 근성과 오기는 무한대 급이라 최강희 감독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면서도 가장 많이 혼난 선수이기도 하다.
최철순의 작은 바람이라면 최강희 감독과 함께 응원단 무대에 오르는 것. 최철순이 경기에 나가지 않고 최 감독이 퇴장 등의 이유로 벤치에 서지 못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응원단 석에서 팬들과 함께 응원가를 부르며 최 감독과 ‘오오렐레’ 응원가를 함께 부르고 싶다는 희망사항을 품고 있다.
최근 전북과 5년 재계약을 맺으며 최진철(1996~2008.03)보다 더 오랜 기간 팀에 남는 레전드로 등극한 최철순을 전북 봉동의 클럽하우스에서 만났다.
이동국 덕분에 은퇴 시기 수정
전북과의 5년 재계약이 왜 화제를 모았다고 생각하나.
“계약 기간 때문일 것 같다. 대부분 3년 계약을 하는데 난 5년 재계약을 했니까.”
계약기간 5년은 구단이 아닌 최철순 선수의 의견이었겠다.
“구단에선 그 숫자를 내세울 수가 없다. 내가 제시한 기간이었다. 감사하게도 구단이 내 조건을 받아주셨다.”
왜 5년이었나.
“전북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하자는 의미였다. 프로 데뷔했을 때만 해도 서른다섯 살까지 공 차는 게 목표였다. 그런데 (이)동국 형님 때문에 목표가 수정됐다.”
어떻게 수정됐는지 알고 싶다.
“동국 형님이 서른아홉 살인데도 현역으로 뛰고 계시지 않나. 형님이 건재하게 뛰는 모습을 보며 깨달은 바가 크다. 건강한 몸으로 5년 후 FA 재계약을 이뤄내고 싶다. 동국이 형이 내게 자신감을 심어줬듯이 나 또한 후배들에게 그런 모습으로 비춰지길 바란다.”
FA를 앞두고 일본과 중동 지역의 팀으로 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다는 게 사실인가.
“사실이다. 무시하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J리그에선 3팀 정도가 관심을 보였다. 나 또한 축구 인생에서 한 번쯤은 외국 무대를 경험하고 싶었다. 내가 갖고 있는 축구에 일본의 세밀함을 덧입혔음 했는데 와이프가 정신 차리라고 하더라. 전북에 남아야 선수 생활을 멋지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FA 재계약의 숨은 공로자는 아내이다. 아내 덕분에 구단과 서너 차례 만나고선 사인한 것이다.”
그런데 재계약을 앞두고 구단에 서운해 했다는 얘기가 들리더라.
“원래는 6월 정도에 구단으로부터 얘기가 나왔어야 했다. 그런데 6월이 지나도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약간 서운해지더라. 구단은 여러 가지로 바빠서 계약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고 하지만 마음이 풀리진 않았다. 나중에 감독님이 날 부르신 후 ‘철순이 너는 전북이랑 10년 계약해야 된다’고 말씀해주셔서 조금은 위로가 됐다.”

<최철순이 지금까지 살아남았던 가장 큰 이유는 남다른 생존 전략 때문이었다.(사진=이영미)>
‘패키지’로 고교 진학했던 후보 선수 출신
수비수는 주연보다는 조연을, 스포트라이트의 그늘에 있기 마련이다.
“난 항상 팀에 필요한 선수가 되고 싶었다. 공격수들이 수비의 부담을 덜 수 있도록 내가 더 많이 뛰어다니려 했다. 그래야 공격수들이 좋은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제대로 ‘닥공’ 축구를 하려면 수비수의 희생이 필요했다. 골을 많이 넣어야 팬들도 경기장을 자주 찾는다고 믿었다. 그라운드에서 희생을 앞세운다면 그 밖에선 팀의 활력소라도 된 듯 분주하게 움직였다. 선수들과 대화도 많이 나누고 지쳐 있는 선수가 보이면 등 한 번 토닥여 주고 감독님이 맨투맨 마크를 원하시면 부지런히 뛰어 다녔다. 그런 부분을 재계약으로 보상받은 기분이다. 무엇보다 팬들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며 행복했다. 나도 스무 살 때는 이재성보다 인기가 많았는데(웃음). 결혼하고 나니까 아줌마 아저씨들이 내 팬이 됐다. 팬들도 선수의 연륜 따라 움직이는 것 같다.”
2006년 프로 데뷔할 당시의 최철순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나.
“아무 것도 모르고 ‘뛰어만’ 다녔던 선수였다. 열심히만 하면 축구로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도 있었고. 그러나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데뷔한지 얼마 안 돼 피부로 느꼈다. 매년 좋은 선수들이 영입돼 왔다. 그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게 정말 힘들었다. 거의 대표팀에서 뛸 만한 실력의 선수들이 들어오니까 해마다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것 같다. 솔직히 감독님한테 불만도 많았다. 날 계속 강하게 몰아붙이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살아남았다. 전북에선 살아남는 게 이기는 거다.”
별명이 ‘최투지’ ‘최짤순’이다. 축구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근성과 투지가 넘쳤던 선수였는지 궁금하다.
“중학교 3년 내내 벤치만 지켰다. 벤치도 못 지킬 때는 관중석에서 선수들 영상을 찍기도 했다. 영상을 촬영하다 보면 그라운드를 밟고 뛰는 선수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신)영록이가 한 학년 아래였는데 영록이 플레이도 영상으로 많이 담았다. 경기에 뛰고 싶어 다른 선수들보다 한 시간 일찍 훈련을 시작했고, 한 시간 더 훈련하다 뒤늦게 잠들었다. 그래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진학은 잘 하는 선수의 ‘패키지’로 운 좋게 올라갔다. 이번에는 방법을 바꿨다. 감독님이나 코치님들의 시선을 연구해보니 훈련할 때 앞에 있는 선수들 보다 뒤쪽에 있는 선수들한테 더 눈길을 많이 주시더라. 앞의 선수들은 원래 잘하는 선수라고 생각해서인지 거의 쳐다보지를 않으셨다. 그걸 파악한 다음엔 항상 뒤에 섰다. 뒤에서 죽기 살기로 열심히 했다. 덕분에 연습 경기 때 스타팅 멤버로 나가게 됐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희열이 느껴졌다. 고교 시절의 추억 중 감사할 일은 감독님이 날 ‘패키지’로 대우하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패키지로 왔어도 똑같은 기회를 주셨고 그 안에서 선택하셨다.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있다.”
어떤 아쉬움인가.
“고교시절 기본기, 패스하는 법 등을 잘 배웠더라면 최강희 감독님으로부터 덜 혼났을 것이다. 당시 내가 했던 훈련은 줄넘기, 타이어 끌기, 달리기 등이 대부분이었다. 축구의 기술적인 부분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프로 데뷔 후 부족한 실력으로 적응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22, 23세 때 J리그에서 이적 관련 오퍼가 들어왔을 때 실제 가고 싶어 감독님께 말씀드린 적도 있었다. 당시 감독님이 ‘철순아, 내가 다 만들어 줄게. 걱정하지마’라며 만류하시더라. 그런데 거짓말이었다. 지금까지 안 가르쳐주신다(웃음). 내가 크로스 실력이 부족한 건 감독님 탓이다. 그때 도와주시겠다고 해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최강희 감독한테 어느 정도로 혼이 났었나. 인터뷰 기사가 나올 때마다 혼난 얘기가 많이 소개되던데.
“수비적인 부분에서 가장 많이 지적을 받는다. 감독님은 종종 맨투맨 수비를 지시하는데 선수 따라 다니다보면 경기가 끝날 때가 있다. 그때 꼭 질타를 받는다. 우리 팀은 협업이 잘돼 있다. 감독님이 선수를 혼내면 코치님들은 사랑을 듬뿍 퍼준다. 코치님들한테 혼나면 감독님이 사랑을 주시고. 나 또한 승기 등 다른 선수들이 혼나면 내가 사랑을 많이 준다. 그래야 팀이 ‘예뻐진다’고 믿는다. 수비수는 패했을 때 가장 먼저 비난을 받는 포지션이다. 욕먹는 건 두렵지 않다. (최강희) 감독님한테만 욕 안 먹으면 된다. 아마 내가 욕을 안 먹게 되면 은퇴할 시기가 도래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감독님이 그만두실 때가 됐거나(웃음).”
2008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최진철 선배처럼 전북을 떠올리면 기억되는 선수로 남고 싶어요”라는 내용이 있더라. 어느 정도는 이뤄낸 것 아닌가.
“거기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다.”
최진철 전 감독과 툭별한 인연이 있다고 들었다.
“내가 ‘방졸’이었고 그분이 ‘방장’이었다. 처음 룸메이트를 이룬 날 해프닝이 있었다. 난 평소 잠을 일찍 자는 편이다. 그분은 치료를 받으러 다른 방으로 가셨고 난 기다리다 졸린 나머지 먼저 잠이 든 것이다. 다음날 일어나서 일을 보고 돌아오니 내 짐이 방 밖으로 나와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가긴 했는데 그때부터 굉장히 무서운 이미지로 각인됐었다. 그라운드에서도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들었다. 베테랑 선수의 눈에는 신인인 내가 부족한 것 투성이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그분의 일상을 관심있게 지켜봤다. 자기 관리면에서는 최고였다. 경기장에 나갈 때, 경기에 들어가기 전의 자세가 다른 선수들과 차이가 있었다. 거친 플레이를 펼치면서도 강약 조절을 할 줄 알았다. 대단한 선배였고, 그런 선배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어 영광이었다.”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알 아인(아랍에미리트)과의 2016 AFC(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장면.(사진=전북 현대)>
월드컵 출전? 대표팀에 도움 되는 게 우선
허정무 감독 재임 시절이던 2010년 1월 9일 잠비아와의 A매치 평가전을 통해 국가대표팀 데뷔를 이뤘다. K리그에서 정상급의 수비 실력을 자랑했지만 대표팀과는 큰 인연을 맺지 못했다. 또 대표팀에 발탁됐다고 해도 K리그에서처럼 자신감있는 경기력을 선보이지 못했다.
“데뷔전이었던 잠비아와의 A매치를 요하네스버그 란드스타디움에서 경험했다. 남아공월드컵 본선 대회를 앞두고 평가전을 남아공에서 치른다는 의미가 컸다. 그런데 잔디가 미끄러운 나머지 제대로 수비를 하지 못했다. 2-4 대패를 했는데 경기 결과를 떠나 내용이 너무 아쉬웠다. 대표팀 데뷔전이라 잔뜩 긴장한 나머지 내가 할 수 있는 경기를 펼쳐내지 못했다. 새삼 느낀 건 대표팀과 소속팀의 축구 스타일의 차이였다. 평가전 결과로 팬들의 비난을 많이 받았지만 나 또한 배운 점이 많았다.”
지난해 11월 열린 콜롬비아와 세르비아 전에선 좋은 평가를 받았다. 콜롬비아전에서는 손흥민에게 날카로운 침투 패스로 도움을 기록했고 이재성과도 좋은 호흡을 보이며 활발한 오버래핑을 선보이기도 했다. 물론 우측면에서의 부정확한 크로스 연결은 계속 지적받는 부분이다.
“대표팀은 공간으로 정확히 찔러주는 크로스를 요구하지만 소속팀에선 (이)동국이 형, 김신욱한테 맞춰주는 킥을 하는 터라 그 차이에 완벽히 적응하지 못했던 탓이다. 크로스 세기를 조절하지 못했고 날카로움도 부족했다.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러시아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뛰고 싶은 마음이 클 것 같은데.
“내가 뛰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월드컵은 내 욕심을 내세우기 보다는 내가 대표팀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선수라면 당연히 그 무대에 서보고 싶겠지만 내 마음은 거기까지이다.”
K리그 통산 330경기에서 뛰었고 3골, 17어시스트를 기록 중이다. 3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골은 어느 경기에서 인가.
“내가 수원전에서 프로 데뷔 6년 만에 첫 골(2011년)을 터트렸고 상주 상무 시절 경남전(2012년)과 전북 복귀 후 수원 FC를 상대로 세 번째 골(2016년 역전골)을 터트렸다. 수원전 데뷔골은 골을 넣었다는 기쁨보다 내가 막아야 했던 염기훈한테 골을 먹어 감독님한테 혼났던 기억이 더 크다. 감독님은 ‘염기훈 잡으라고 했더니 왜 골을 넣었느냐’고 말씀하시더라. 골 넣고 욕 먹은 선수는 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팀 입장에선 염기훈한테 골을 안 먹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감독님의 말씀을 충분히 받아들였다. 감독님이 종종 농담처럼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다. 상주 상무가 아닌 전북에서 넣은 2골은 내가 잘해서 넣은 게 아니라 상대팀 수비수가 도와준 것이라고. 나에 대한 평가는 정말 인색한 분이다.”

<제대 후 전북에 복귀한 최철순과 그를 열렬히 환영하는 응원단의 플래카드.(사진=전북 현대)>
에이전트 없는 선수의 협상 전략
그런데 에이전트를 두지 않았다는 게 사실인가. 이번 FA 재계약도 에이전트 없이 구단과 직접 협상을 벌인 건가.
“그렇다. 그동안 내가 혼자 해왔다. 그냥 내가 하는 게 편하다. 구단과 돈 얘기를 하면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을 쌓았다.”
협상의 노하우가 생겼다는 의미인가.
“없다면 거짓말이다(웃음). 연봉 협상은 주로 단장님과 하기 마련이다. 나보단 구단이 선수랑 직접 돈 얘기를 주고받는 걸 불편해 한다. 덕분에 이전에 계셨던 이철근 단장님과는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다.”
점점 연봉 협상 스토리가 궁금해진다.
“한 번은 협상하러 단장님 방으로 들어갔다가 구단의 제시액을 듣고 조용히 일어나 내 겉옷을 벗어 단장님 의자에 걸어 놓고 나왔다.”
그건 어떤 메시지였나.
“전북에 남겠다는 표시였다. 구단의 제시액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전북에는 남고 싶다는 여지를 보인 것이다. 다음에 또 와서 이 옷을 갖고 가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데 추운 겨울 날씨라 옷 벗어 놓고 나와선 한참을 떨었던 기억도 있다.”
혹시 에이전트 수수료 때문에 직접 협상을 하는 건가.
“전혀 아니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단순히 비용 절감 때문만은 아니다. 구단과 직접 상대하면서 구단의 경영 상태, 운영 마인드를 상세히 배울 수 있었다.”
연봉 협상을 하려면 자료가 필요할 텐데 그런 자료는 누가 만들어 주나.
“내가 하는 것도 있고 유니폼 판매 등은 구단 직원이 도와준다. 한 번은 경기장에 내 유니폼을 입고 오는 관중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체크한 적도 있었다. 물론 구단 직원이 도와줬다(웃음). 그런 자료들을 토대로 단장님과 협상에 나섰다.”
정말 재미있는 얘기다. 구단과 연봉 협상을 벌이는데 구단 관계자가 협상 자료 도움을 주고. 최철순 선수를 ‘전북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겠다.
“구단도 내가 이 팀을 떠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런 도움을 주는 것이고 나 또한 떠날 마음이 없기 때문에 구단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12월 22일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 발표한 연봉 순위에서 5위까지 공개된 명단을 보니 모두 전북 선수들이더라(김신욱 15억4000만 원, 김진수 14억6000만 원, 신형민 11억1000만 원, 이동국 9억9056만 원, 이재성 8억4450만 원 순이었다). 최철순 선수는 전체 몇 위에 해당될 것으로 예상하나.
“5위에서 멀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까지만 답하겠다(웃음).”
최철순은 자신의 축구인생 중 최고의 순간으로 2016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1,2차전에서 오마르 압둘라흐만을 완벽하게 봉쇄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어낸 일을 꼽았다. 최철순은 2차전 최우수선수(MOM)에 선정된 바 있다.
그래서 최악의 순간도 물었다. 최철순은 마지막까지 같은 최 씨, 최강희 감독을 떠올렸다.
“다른 건 없고 맨투맨 못한다고 혼났을 때, 솔직히 힘들었다. 감독님이 경기 앞두고 특정 선수를 거론하면서 그 선수를 잘 잡으면 자신의 연봉에서 얼마를 떼어 주겠다고 농담처럼 말씀하셨는데 올시즌에는 고질적인 단점인 크로스 어시스트 5개 기록하고 맨투맨 수비를 잘해서 감독님한테 정정당당히 요구할 것이다. 감독님 연봉의 절반을 내달라고.”
인터뷰 내내 큰 웃음을 선사한 최철순이었다. 축구인생에서 수술 경험이 한 번도 없다는 최철순. 그가 그라운드 밖에서 얼마나 철저히 자기 관리를 해나가는지 짐작되는 부분이다.

<전북 팬들 한테 최철순의 존재는 빛이고 소금이다. 레전드를 대우할 줄 아는 전북 구단의 배려와 이해, 그런 구단을 믿고 따르는 선수, 또 그런 선수를 뒷받침해주는 감독, 코칭스태프들. ‘원클럽맨’은 선수 혼자만의 노력으로 절대 이뤄질 수 없는 단어라는 걸 보여준다.(사진=이영미)>
<전북 봉동=이영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