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

柳成龍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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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 중기 문신.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 권율 등 명장을 등용하여 국난을 극복한 명재상이다.

출생-사망 1542 ~ 1607
본관 풍산(豊山)
이현(而見)
서애(西厓)
시호 문충(文忠)
활동분야 정치, 학문
출생지 경북 의성
주요저서 《서애집》,《징비록(懲毖錄)》

본관 풍산(豊山). 이현(而見). 서애(西厓). 시호 문충(文忠). 의성 출생. 이황(李滉)의 문인. 1542년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柳仲郢)과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퇴계 이황에게서 성리학을 익혔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어 경연검토관 등을 지내고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교리 ·응교(應敎) 등을 거쳐, 1575년 직제학, 다음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584년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동지사(經筵春秋館同知事)를 겸직하였고, 1588년 양관(兩館)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建儲)문제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유성룡 본문 이미지 1
상주 전투 진주 대첩 이순신 명량 김시민 곽재우 한산도 이순신 정인홍 이일 신립 유정(사명대사) 정문부 휴정(선사대사) 이정암 행주 권율 조헌 영규 김천일 고경명 조선 일본 김덕령 김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하였다.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했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 ·경상 ·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 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은 하지 않고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선조에게 대국을 요청하자 그는 우산에 구멍을 뚫어 훈수함으로써 이여송을 무릎 꿇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바둑의 애호가였다. 1995년 9월 특별대국에서 이창호(李昌鎬)와 맞대결한 류시훈(柳時熏)은 그의 14세손이라고 한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서애집》 《징비록(懲毖錄)》 등이, 편서에 《황화집(皇華集)》 《정충록(精忠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