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냉면 마니아다. 외모와 달리 요란스럽지도, 유난하지도 않은 그녀와 냉면은 많이 닮았다. 면 애호가 안현모의 슴슴함.
여름이면, 냉면이다. 차가운 육수와 찰진 면발의 유혹을 참기 힘든 계절이 여름이다. 서리 낄 정도로 냉기 가득한 스테인리스 스틸 사발에 담긴 차가운 육수와 동그랗게 말려 육수 위로 솟은 면, 육수를 우려내며 삶은 편육, 소탈하지만 알차게 입맛을 돋우는 고명들. 냉면이야말로 천국의 여름 음식이다. 양손으로 사발을 들어 육수를 입 안 가득 담아 쭉 들이켜면 더위는 순식간에 평양까지 달아난다. 한 모금 더 들이켜 특유의 담백함과 심심한 맛까지 느낀다면 뒤이어 혀 전체를 은근히 감싸는 감칠맛으로 이어진다. 동치미 막국수는 어떤가. 손수 뽑은 메밀에 양념장이나 명태식해를 올리고 여기에 동치미를 몇 국자 자작하게 부어서 비빈 다음 후루룩 한입에 빨아들이면 입 안에 매콤하게 삭힌 동해의 여름 맛이 감돈다. 이런 면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이가 있다. 바로 안현모다.
전직 기자이자 현직 동시통역사,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라이머의 아내이기도 한 안현모는 면 예찬론자다. 면이라면 냉면이든 막국수든 메밀국수든 딱히 가리지 않는다. 당연히 파스타나 라면, 우동도 그녀의 면 범주에 포함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먹는 면이 냉면이다. 계절에 상관없이 사시사철 즐긴다. 여름에는 매일 먹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그녀다. 어린 시절에는 함흥냉면밖에 몰라서 함흥냉면집에 거의 매일 가다시피 했다. 평양냉면을 알게 된 건 기자가 된 이후이다. SBS 기자 시절 을밀대를 알게 되면서 기자 선후배와 냉면 크루로 냉면집을 탐방했다. “좋아하는 음식이 같다 보니 서로 더 끈끈해지죠.” 보도국 기자들에게 끈끈한 유대 관계는 과도한 업무나 스트레스를 지탱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녀는 취재가 끝나고 시간이 생기면 사내 냉면 마니아들과 근처 냉면집에 들렀다. 가장 자주 가는 곳은 을밀대였다. 서울시청 출입 기자 시절이었다. 여름이면 점심시간마다 오래된 벽돌 건물에 허름한 간판의 마포 을밀대에 줄을 서서 기다리곤 했다. 참고로 마포 을밀대는 점심시간이면 본관과 별관 사이 골목으로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서 자기 차례가 오기를 한 시간씩 기다리곤 한다. “어렸을 때 먹던 냉면이 함흥냉면이었다면 커서는 을밀대 평양냉면이었어요. 마니아끼리는 아는 주문 방법도 있죠. ‘거냉’이라고 하죠.” 거냉은 ‘거의 차갑게’를 줄인 말이다. ‘거냉양많이’라고 하면 ‘거의 차갑게 면 사리 많이 주세요’라는 의미다. 안현모도 거냉양많이 스타일이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 남김없이 먹는다. 여자가 그 양 많은 걸 시원하게 잘 먹는다고 선배들의 예쁨도 많이 받았다. “원래 육수에 살얼음을 띄워 나오는데 얼음 때문에 면이 너무 질겨지니까 살얼음을 빼고 거의 차갑게 먹는 거예요. 그럼 아, 을밀대 좀 왔구나, 라고 생각하는 거죠. 저는 그런 재미로 취재를 다녔어요. 시청이나 경찰서를 출입하는 일이 반복되면 일상이 재미없잖아요.” 좋아하는 곳을 꾸준히 방문하는 스타일이라 을밀대를 너무 자주 가서 생긴 일화도 있다. 여름에 한 시간씩 너무 자주 줄을 서는 바람에 발등이 타서 신발 자국이 났다. 시청 출입 시절이라 주로 실내에서 근무해 햇볕에 탈 일이 없는데도 발등의 신발 자국이 선명해 주위에서 을밀대 때문에 탄다고 놀림받을 정도였다. 한곳을 주로 가는 이유가 있다. 조금만 냉면 맛이 달라도 차이가 크게 느껴져서다. 그래서 익숙한 맛을 즐기는 편이다. “파스타는 열려 있는 편인데 냉면은 확 다르더라고요. 대신 하루 두 번도 갈 수 있어요.”
워낙 냉면을 좋아하다 보니 냉면의 신흥 강자를 소개하는 〈조선일보〉 기사의 패널로 참가한 적도 있다. 그녀의 냉면 사랑이 유난한 점이 가장 큰 몫을 했다. 당시 패널은 담당 기자와 그녀, 박정배 음식 칼럼니스트, 김인복 레스토랑 컨설턴트였다. ‘평냉 마니아들, 여기 아시나요’라는 기사로 평양냉면의 신흥 강자 다섯 곳을 소개하고 평가하는 코너였다. “냉면을 너무 좋아하는 팬으로 하루에 맛있는 냉면집 다섯 군데를 다니면서 이야기하는 것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겠어요. 다른 분들은 다섯 곳을 다녀야 하니까 조금씩 먹고 평가하는데 저는 다섯 그릇을 싹 비웠죠. 저는 전문가가 아니어서 기사에는 코멘트가 나가지 못했어요.” 냉면으로 보낸 그날 하루가 우연히도 서관면옥의 단골이 된 시작이었다. 김인복 레스토랑 컨설턴트는 당시까지만 해도 요리 전문가로 활동했다. 자신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은 없었지만 냉면이나 육개장 같은 메뉴를 개발했다. 그리고 안현모는 라이머와 연애하던 시기였다. 결혼도 앞두고 있었다. 안현모가 요리를 못해서 큰일이라고 말하자 김인복 레스토랑 컨설턴트가 요리를 배우러 양재동으로 오라고 했다. 안현모는 그건 abc도 모르는 유치원생에게 하버드 대학으로 초청하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라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그날 이후 시간이 지나서 라이머가 서초동에 맛있는 냉면집이 생겼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데려간 곳이 서관면옥이었어요. 입구에 들어서니 김인복 대표님이 있는 거예요. 마치 대표님이 서관면옥을 운영하는 줄 알고 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인사하게 됐어요.”
서관면옥에서 식초는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별히 공급을 받아 쓰고 있는 태바시 다시마초다. 면에 살짝 부어 먹으면 면의 풍미가 배가 된다. “마침 태바시 다시마초 대표가 남편 지인이에요.” 이미 만난 인연이 있는 데다 서로 연이 겹치는 부분도 있어 금세 친해졌다. 무엇보다 냉면이 맛있었다. 서관면옥은 총 네 종류의 냉면을 만든다. 일반적인 형태의 평양냉면과 비빔냉면인 ‘선비냉면’, 들기름과 김가루 등을 뿌려 먹는 ‘골동냉면’, 고기를 많이 넣은 쟁반냉면 형태의 ‘맛박이냉면’이다. 그녀가 이곳에서 가장 자주 주문하는 메뉴는 골동냉면이다. 평양냉면의 심심함은 반복해서 먹으면 가끔 지겨워지기도 하고, 시원한 느낌으로만 먹는 경우가 생기는데 서관면옥의 골동냉면은 그와는 결이 달라 매번 새롭다. “진짜 맛있어요.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평양냉면이 심심하다면 골동냉면은 새콤하고 고소하죠. 그릇에 들기름을 둘러주는데 그 들기름과 메밀 면이 상당히 구수해요. 볶은 버섯과 무채, 고기, 파 같은 고명이 어우러지기도 하고요. 들깻가루도 많이 뿌려져 있어 달걀밥에 참기름과 들깨를 잔뜩 붓고 먹는 그런 느낌이 들죠. 여기에 다시마초를 조금 뿌리면 정말 맛있어요.” 서관면옥은 국내산 메밀가루만 사용한 순면을 손수 뽑는다. 당연히 메밀 향이 진하고 구수하다. 뚝뚝 끊어지지만 탄성이 있어 식감이 좋다.
그녀만의 막국수와 메밀국수 맛집도 있다. 강원도에서 나고 서울에서 자랐지만 방학마다 강원도에서 살았다. 그래서인지 강원도식 동치미 막국수를 좋아한다. “어디든 뚫어놓은 막국숫집이 있어요.” 과천에는 강릉동치미막국수, 대치동에는 은마상가에 있는 봉평메밀막국수다. 기자 시절 자주 가던 영등포의 막국숫집도 있었는데 안타깝게 문을 닫았다. “네가 퇴사하니 문을 닫았다고 선후배들이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영등포시장 안에 있어서 가격도 쌌는데 가족 경영이라 가족 중에 한 사람만 아파도 문을 닫았어요. 문 닫는 일이 더 잦아져서 가족 중에 누가 아픈가 보다 싶었죠.” 그녀는 막국수로 남자를 판단하기도 했다. 물론 라이머를 만나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신기하게도 제가 만난 남자들은 막국수를 먹는 스타일대로 이뤄졌어요.” 그녀가 데리고 간 막국숫집에서 음식이 너무 맛있다고 잘 먹거나 다시 가자고 말하는 이는 성격도 좋고 사이도 좋았다. 하지만 맛있다고 말하면서 남기는 이나 너무 맵다거나 다시 가자고 했을 때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는 이들은 너무 곱게 자란 것 같아 싫어졌다. “남편은 뭐든 잘 먹어요. 봉평메밀막국수에 갔을 때는 네가 왜 좋아하는지 알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단 걸 좋아한데요.” 여의도 청수 메밀국수도 그녀의 단골집이다. 바로 뒤편에 벨기에 와플집이 붙어 있어 판메밀을 먹으면 와플까지 포장해온다. “와플집이 자주 문을 닫아서 아쉬워요. 가끔은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해요. 판메밀에 와플까지 픽업하면 완벽한 하루죠.”
안현모에게는 냉면과 막국수 때문에 생긴 몇 가지 걱정이 있다. 일을 하다 보면 해외 출장이 잦은데 LA나 뉴욕처럼 미식이 발달한 도시도 냉면 맛집이 없다는 현실이다. “저는 외국에서는 못 살아요. 막국수와 냉면이 너무 먹고 싶어서요. 자주 가던 낫토 소바 맛집이 폐업했는데 그 맛이 너무 그립기도 해요. 그런 가게가 사라지거나 대를 이을 사람이 없어서 명맥이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많아요.” 그녀에게는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엄마의 음식 같은 향수다. 간판은 똑같지만 맛이 바뀔까 걱정까지 한다. 못 말릴 정도의 면 사랑이다. 싱가포르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을 때 거절한 이유 중 하나가 막국수를 먹을 수 없다는 거였다. “저는 나이 들수록 취향이 더 뚜렷해지더라고요. 좋아하는 걸 더 적극적으로 먹을 수 있으니 좋아요. 그리고 냉면은 정크푸드나 파인다이닝 요리가 아닌 소박하고 편안한 음식이잖아요. 개인적으로 제가 딱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털털한 사람이죠.” 결혼 덕분인지 나이 들어감 덕분인지 퇴사 덕분인지 모르지만 삶이 더 자유로워졌다는 그녀에게 어쩌면 그게 냉면을 사랑해서가 아니냐고 물을 뻔했다. 사랑하면 닮는다는데 소위 그녀의 슴슴함과 담백함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알 것 같았다.
서관면옥
순 평양식 냉면 전문점인 서관면옥은 세계인이 사랑하고 한식을 대표하는 요리를 만들고 싶다는 김인복 대표의 생각에서 시작됐다. 서관면옥은 단순하지만 원칙을 지키고, 한 가지 바람으로 요리한다. 우리 고유의 멋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 평양냉면·골동냉면·선비냉면 1만3000원씩, 맛박이냉면 1만5000원
· 서울시 서초구 서초대로56길 11
· 매일 오전 11시 30분~오후 3시 30분, 오후 5시 30분~10시
· 02-521-9945
· @seogwanmyeonog
· seogwanmyeonog.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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