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태의 요가로 세상 보기] 30. 우리 몸의 다섯 가지 층 - 판차 코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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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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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신체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층 가운데 가장 바깥쪽은 식량층이다. 식량층에서 시작해 안쪽의 생기와 마음, 지혜층을 넘고 제일 안쪽의 환희층으로 회귀하려면 몸 상태에 맞게 적절히 잘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현대 심리학자들이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 등으로 마음의 차원을 다뤘듯이, 전통요가 생리학에서는 인간의 신체는 다섯 가지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 다섯 층의 상호 연관성은 매우 미묘하고 복잡하게 작용하고 있는 바, 순수의식인 참 나(眞我), 즉 아트만(Atman)은 이 다섯가지 층에 의해 가려져 있다는 것이며 최종적으로는 다섯 층을 지나 결국은 본질인 이 아트만으로 회귀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창한다.

이 다섯 가지 층, 즉 판차 코샤(Panca Kosha)는 가장 바깥쪽에 속하는 것을 식량층(Annamaya Kosha) 또는 육체층이라고 하며, 안쪽으로 향하는 순서대로 그 다음이 생기층(Pranamaya Kosha), 그 다음이 심층(心層 Manomaya Kosa) 또는 마음층, 그 다음이 지혜층(Vijnamaya Kosha) 또는 이성층, 마지막으로 제일 안쪽에 위치한 지복층(至福層Anandamaya Kosha) 또는 환희층으로 분류한다.

이 모든 다섯 층(코샤, Kosha)에서 기(氣)의 조화로운 흐름으로 영적 에너지의 통로를 활성화시켜서 개인의 잠재된 우주적 에너지, 즉 쿤달리니(Kundalini)를 각성시켜야 된다는 것이다.

판차 코샤 가운데 가장 바깥 쪽에 위치한 첫 번째 층인 식량층은 음식을 통해 영양분을 섭취함으로써 생명 에너지를 공급받는 층이다. 몸은 먹은 대로 된다는 말이 있다. "당신이 먹은 것이 무언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고 했던 브리야 사바랭의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볼 때다.

따지고 보면 모든 삶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고 먹고 또 먹는 삶이다. 하루 종일 분주하게 날아다니는 새가 하는 일은 오로지 먹을 것을 찾는 일. 인간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하는 일이 밥 먹는 일이다.

삶의 가장 큰 감동은 살아있다는 그 자체다. 인생을 한껏 살아간다는 것은 고관대작이나 대부호가 되는 것도 아니고, 행복으로 가득찬 삶을 사는 것만도 아닌 것 같다. 기쁠 때도 있지만 고독하게 우는 날도 있고 성공의 희열을 느낄 때도, 실패로 인한 상실감으로 절망하고 낙담하는 날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경험은 생명을 가진 자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먹어야 산다." 이 짧은 문장보다 강력한 말이 또 있을까만 생명체는 먹어야 목숨을 부지한다는 점에서 진리다. 사람도 먹어야 산다. 인간 역시 생물의 한 종(種)이기 때문이다.

"밥 먹었냐?" "때 거르지 말아라." 흔히 멀리 있는 자식에게 부모들이 제일 먼저 묻고 당부하는 말이다. 끼니를 거르지 말라는 것이다. 아침 점심 저녁 제때 밥을 먹어야 몸의 순환과 기운을 잃지 않는다. 그래야 공부도 일도 잘하고 다른 사람과도 잘 어울릴 수 있다. 그래야 온전한 일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잘한다는 것은 매사에 집중하고 몰입한다는 뜻이다. 몸의 에너지가 잘 돌면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말과 행동이 부드러워진다.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린다고 느껴질 때야말로 몸과 마음이 가장 편안한 상태가 아닌가.

불가의 경전에서도 아침, 저녁 먹어야 할 음식이 다르고, 계절과 절기마다 먹어야 할 음식이 따로 있으며, 몸의 상태에 따라 음식을 조절하라고 가르친다. 몸의 울림은 심장에서 시작되고, 몸의 움직임은 머리에서 시작된다는 게 인체에 대한 의학적 기본 지식이다.

예전부터 한국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고 할 정도로 밥에 대해 강한 애착을 보였다. '제 밥그릇은 제가 지니고 다닌다', '남의 밥을 먹어 봐야 부모 은덕을 안다', '눈물 어린 밥을 먹어보지 않고는 인생의 참 맛을 알 수 없다' 등의 속담은 한국인의 삶이 얼마나 밥과 긴밀히 연결됐는지 알려주는 방증이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란 말도 시사하는 바가 크며,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속담도 서로 나눠 먹는 삶, 더불어 살아감을 강조하는 말이다.

오늘날에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은 식구(食口), 즉 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솥밥 먹고 자랐다'는 말도 있듯이 밥은 사람의 일생에 깊이 관여한다.

또한 귀하고 소중한 인연들과 결별하고 그 절망과 슬픔으로 창자가 끊어질 듯한 잔인한 고통에 짓이겨질 때, 도저히 참기 힘든 결핍과 상실의 무게에 온통 머리가 하얗게 바래지고 맥없이 철퍼덕 주저앉아 버리는 감당키 어려운 상황에서도 피눈물 흘리며 꾸역꾸역 밥숟가락을 입에 떠 넣어야 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가련함이다.

그러나 나 챙겨 먹자고 그런 것만은 아니니 우선 우리 몸 맨 바깥층에 있는 식량층에 영양을 공급해야 생기층이 살아나고 몸의 그 안쪽 마음층, 지혜층을 통해 추모하고 애도하는 숭고한 마음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 모두 밥심에서 발원된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한계이자 인간으로 태어난 본태적 숙명이며 가장 인간다움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내 하루의 징검돌 같은/ 밥 한 그릇 여기 있다/ 내 하루의 노둣돌 같은 밥 한 그릇 여기 있다/ 네가 주인이라서 섬기며 살아 왔다 / 네가 목숨이라서 가꾸며 살아 왔다/ 그 세월 지난 듯도 한데 왜 아직도 배가 고프니?" 이우걸 시인의 '밥'이란 시다.

밥을 먹는다는 것,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성스러운 의식임을. 오늘도 밥상 앞에 앉아 목하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닌다는 것이니라. 하루 세끼 밥을 먹는다는 것은 우주와 더불어 사는 것이라"는 밥님의 설교를 듣고 있다.

우리 인체 다섯 층의 양파 껍질을 벗기고 벗겨 맨 안쪽에 위치한 더없이 복(福)된 지복층(Anandamaya Kosha), 즉 환희의 층으로 회귀하려면 무엇보다 급선무는 많이 배불리만이 아닌, 자신의 몸 상태에 맞게 적절히 잘 먹어야 된다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오늘 나는 그 밥값 한번 제대로 하고 있는지 돌아보리라.

<밥/ 최진태>

1.

나 밥 안 먹어/ 밥이 무기였었다/ 니 자식 나 봐

2.

끓어 넘친 건/ 눈물과 닮은 밥물/ 한세상 내내

3.

끓어 넘친 건/ 밥물이 아닌 눈물/ 애간장 타는

4.

뭉뚱그린 말/ 배고프지 어여와/ 세상 모든 말

5.

밥이라는 말/ 몇 번 들었을까요?/ 오늘 도대체

6.

수저 놓는 날/ 세상 하직하는 날/ 꽉잡아 힘껏

7.

니는 밥 문나?/ 밥에 피는 눈물꽃/ 병상의 오매

8.

밥 많이 무라/ 제일 사무치는 말/ 울컥 어무이~

9.

밥 좀 드이소/ 밥에 피는 생명꽃/ 보고싶소잉~

10.

병상에서도/ 니는 밥은 묵었나?/ 잠겨오는 목

11.

구절양장 길/ 밥심으로 산다네/ 죽으나 사나

12.

기도하노니/ 내 영혼 팔지 않길/ 한 그릇 위해

13.

한솥밥 먹어/ 가족을 식구란다/ 제때 들어와

14.

논에 물 들기/ 자식 입에 밥 들기/ 최고의 행복

15.

내 숨줄 위해/ 타 생명체의 목숨/ 먹는 이 숙명

16.

부모님 땅 속/ 안장하고 그 때도/ 꾸역꾸역한

17.

한울님이라/ 소반 위에 앉으신/ 고봉 밥그릇



최진태 부산요가지도자교육센터(부산요가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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