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전

集賢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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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려 이래 조선 초기에 걸쳐 궁중에 설치한 학문 연구기관.

경복궁 수정전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 조선 고종. 세종 때 집현전으로 쓰이던 건물로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고종 때 재건되었다.

1392년(조선 태조 1) 7월에 제정된 관제에 따르면 고려의 제도를 도습하여 보문각(寶文閣)·수문전(修文殿)·집현전(集賢殿)이 그대로 존치되어 있었으나,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집현전을 확대하여 실제의 연구 기관으로 개편하였다(1420). 그 직제는 겸관(兼官)으로 영전사(領殿事:정1품) 2명, 대제학(大提學:정2품) 2명, 제학(提學:종2품) 2명과 전임관인 부제학(副提學:정3품) 1명, 직제학(直提學:종3품) 1명, 직전(直殿:정4품) 1명, 응교(應敎:종4품) 1명, 교리(校理:정5품) 1명, 부교리(副校理:종5품) 1명, 수찬(修撰:정6품) 1명, 부수찬(副修撰:종6품) 1명, 박사(博士:정7품) 1명, 저작(著作:정8품) 1명, 정자(正字:정9품) 1명이 있었다. 그 인원은 몇 차례 변경되면서 운영되었으며 1436년(세종 18) 20명으로 확정되었다.

집현전은 학자양성과 학문연구를 위한 기관이었다. 집현전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경연은 왕과 유신이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자리로 국왕이 유교적 교양을 쌓도록 하여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서연은 왕이 될 세자를 교육하는 것이다. 집현전관은 외교문서 작성도 하고 과거의 시험관으로도 참여했으며 집현전이 궁중에 있고 학사들이 문필에 능하다는 이유로 그들 중 일부는 사관(史官)의 일을 맡았다. 그리고 중국 고제(古制)에 대하여 연구하고 편찬사업을 하는 등 학술사업을 주도했다.

세종은 학사들의 연구에 편의를 주기 위하여 많은 전적(典籍)을 구입하거나 인쇄하여 집현전에 보관시키는 한편, 재주 있는 소장 학자에게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전을 베풀었다. 이로써 수많은 뛰어난 학자들이 집현전을 통하여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 20년대부터 집현전은 정치적인 역할도 하게 된다. 세종은 1442년에 첨사원을 설치하여 세자가 서무를 처결하게 하였다. 이 때 첨사원의 관원 후보로는 서연관이 가장 유리하였다. 서연관은 모두 집현전관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집현전관은 첨사원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1443년부터는 세자의 섭정이 이루어졌으므로 집현전관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문종이 즉위하면서부터는 집현전관의 정치기관으로의 진출이 늘어났다. 

이곳에서 이룩한 업적은 학문연구와 편찬사업 등이다. 편찬사업으로는 《고려사(高麗史)》 《농사직설(農事直說)》 《오례의(五禮儀)》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삼강행실(三綱行實)》 《치평요람(治平要覽)》 《동국정운(東國正韻)》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의 많은 서적을 편찬·간행하여 한국 문화사상 황금기를 이룩해 놓았다.

37년간 있었던 기관이지만 조선의 학문적 기초를 닦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많은 학자적 관료를 배출하여 세종대 뿐만 아니라 이 이후의 정치·문화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게 하였다. 후에 집현전과 같은 기능은 홍문관에서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1456년(세조 2) 단종(端宗) 복위를 꾀한, 후의 사육신(死六臣)을 비롯하여 반대파 인사가 집현전에서 많이 나오자, 세조(世祖)는 집현전을 폐지하는 한편 소장된 서적은 예문관(藝文館)에서 관장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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