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양반은 이혼이 자유로웠다?

의심 많은 교양인을 위한 상식의 반전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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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는 편이 좋은가, 아니면 하지 않는 편이 좋은가를 묻는다면 나는 어느 편이나 후회할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 소크라테스

이혼(離婚)은 혼인관계를 청산하고 갈라서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최고의 이혼 위자료는 1999년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이 아내에게 준 17억 달러다. 세계 자동차경주대회(F1) 주관사인 포뮬러원매니지먼트의 버니 에클레스톤 회장은 2009년 이혼하면서 위자료로 10억 달러를 지불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무기 거래상 아드난 카쇼기는 8억 7400만 달러의 위자료를 냈다. 농구 전설 마이클 조던은 2006년 이혼하면서 1억 6800만 달러, 골프계의 그렉 노먼은 2008년 이혼하면서 1억 300만 달러,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는 2010년 이혼하면서 1억 달러를 위자료로 지급했다. 팝스타 마돈나도 우리 돈 1000억 원대의 위자료를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2월, 영국 〈데일리메일〉은 구글의 에릭 슈미트 회장이 아내와 이혼하기 위해 15억 달러에 달하는 주식을 매각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이럴 경우 슈미트 회장은 위자료 자금 규모로 역대 두 번째에 오른다.

이혼에는 크게 협의이혼과 재판이혼이 있다. 협의이혼은 그 사유를 묻지 않지만 재판이혼은 이혼 사유가 있는 경우에 한해 가정법원에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 재판이혼은 다시 조정이혼과 소송이혼으로 나뉜다. 재판부의 조정을 통한 당사자 간 합의가 결렬되면 소송이혼 단계로 넘어간다. 재판이혼은 보통 소송까지 가지 않고 조정 단계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자의적 합의든 조정을 통한 합의든 이혼 비율의 70~80%가 조정합의로 이뤄진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전체 이혼 건수는 2006년 12만 4524건에서 2010년 11만 6858건으로 줄었다. 2008년 도입한 ‘이혼 숙려제’가 이혼 비중을 줄이는 데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도 있다. 이혼 숙려제는 협의이혼 중에 부부가 일정한 시간을 두고 이혼을 고민하며 양육권, 친권 등을 문서로 합의하는 제도다. 그런데 협의이혼보다 양육권이나 위자료, 재산 분배 등을 결정하는 재판이혼이 늘어나는 추세다. 2006년 재판이혼은 13%를 차지했지만 2010년에는 25%로 2배가량 증가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0년 평균 이혼 연령은 남성 45.0세, 여성 41.1세이고 이혼 부부의 평균 동거 기간은 13.0년이다. 이혼 사유로는 성격 차이가 45.4%로 가장 많고, 기타 21.3%, 경제 문제 12%, 건강 문제 10.7%, 배우자의 부정 8.6%, 가족 간의 불화 7.3%, 정신적·육체적 학대 4.8% 등이다. 혼인 상태에 있는 유배우 인구 1000명 당 이혼 건수를 뜻하는 ‘유배우 이혼율’은 4.7건(부부 1000쌍 당 약 9.5쌍이 이혼했다는 의미)에 달한다.

옛날에는 이혼이 없었다? 그렇지 않다. 유교의 영향으로 ‘정절’을 강조했던 조선시대에도 이혼은 존재했다. 남편은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이유를 들어 처에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요구했다. 불순구고(不順舅姑, 시부모에게 불손함), 무자(無子, 아들을 낳지 못함), 음행(淫行, 음탕함), 질투(嫉妬, 질투가 심함), 악질(惡疾, 몹쓸 병이 있음), 구설(口舌, 말이 많음), 도절(盜竊, 도둑질을 함)의 7가지 잘못이 있을 경우 처를 내칠 수 있었다. 다만 삼불거(三不去)라고 해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다거나 부모의 3년상을 같이 치렀거나, 가난할 때 시집와서 집안을 일으킨 경우는 내쫓지 못했다. 반대로 처가 이혼을 요구하려면 남편이 집을 나가 3년 이상 행방불명되었거나, 남편이 처의 조부모·부모를 때리거나 형제·자매를 죽이는 등 매우 한정된 경우에만 가능했다.

양반들은 이혼하려면 먼저 왕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평민은 자율적인 합의이혼이 가능했다. 이혼 사유는 대부분 칠거지악이었는데, 사정파의(事情罷議)라는 절차를 거쳤다. 사정파의는 둘이 마주 앉아 이혼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말하고 서로 승낙하는 일종의 합의이혼을 말한다. 이때 남편이 할급휴서(割給休書)를 주기도 했다. 할급휴서는 이혼할 때 상대방에게 주는 깃저고리 조각. 이 조각을 수세(이혼 증서)라고 하고, 한자로는 휴서(休書)로 표기했다. 할급휴서를 가진 여성은 재혼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는 조선시대에 비해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웠다. 여성의 지위가 남성 부럽지 않게 높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내가 이혼당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리(離)’나 ‘절(絶)’로 표현되는 일반적인 의미의 이혼과 ‘출(黜)’이나 ‘기(棄)’로 표현되는 처를 내치는 행위, 그리고 ‘거(去)’로 표현되는 처가 도망하는 것 등 3가지 형태의 이혼이 있었다.

고려의 이혼은 기처(棄妻)가 대부분이었다. 어쨌든 이혼하고 재혼한다는 것은 흔한 일로서 그다지 죄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를 방문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고려 견문기인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부잣집에서는 아내를 3~4명씩 맞아들이고 조금만 맞지 않으면 곧 이혼한다.···남자와 여자의 혼인에도 경솔히 합치고 헤어지기를 쉽게 한다”라고 적혀 있다. 재혼도 부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재혼한 부모를 둔 자녀들도 사회 진출에 차별을 받지 않았다. 과부나 이혼녀라는 이유만으로 불리한 재혼을 했던 것도 아니다. 성종,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등은 이혼한 여자를 왕비로 맞아들이기까지 했다.

이혼은 일제강점기에는 신문에서 비중 있게 다룰 정도로 큰 사회문제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은 남편 김우영과 이혼한 뒤 1934년 잡지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결혼식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지 않고 코에 꿰면 이혼은 없어지게 된다.” 프랑스 작가 쥘 르나르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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